BC 1세기 폼페이의 어느 한낮부터 AD 8세기 콘스탄티노플의 한 새벽까지 — 한 제국이 그리스의 흙을 자기 흙으로 빚어낸 9세기.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세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난 호의 마지막에 우리는 BC 4세기의 그리스를 떠나오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이후 그리스 본토는 천천히 약해졌고, 이탈리아 반도의 한 작은 도시 〈로마〉가 천천히 자라기 시작했어요. BC 146년, 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자기 속주로 편입한 그날 이후, 미술사의 한 페이지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이번 호는 그 다음 페이지의 9세기를 다룹니다. BC 1세기 폼페이의 한 빌라에서 시작해, AD 79년 베수비오의 폭발, 2세기 트라야누스의 콜로세움과 판테온,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 그리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의 하기아 소피아까지. 그 9세기 동안 인류 미술사는 한 가지 큰 일을 했습니다 — 그리스의 〈비례와 위엄〉을 받아 자기네 〈규모와 권력〉으로 옮긴 일이지요.
로마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가지입니다. 〈사본〉. 이미 지난 호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그리스 조각의 거의 모두가 사실은 로마 시대 사본이에요.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의 모든 것을 사랑했고, 자기네 별장을 그리스 작품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모방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가 〈비례〉를 만들었다면, 로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콘크리트라는 새 재료를 발명해 거대한 돔을 처음으로 띄웠고, 한 번에 5만 명이 모이는 원형 경기장을 지었으며, 한 도시 안에 인공적인 물길을 깔았어요. 한 시대의 가장 큰 발명품이 아마 그 콘크리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4세기에 일어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는 일이지요. 그 결정 이후 로마 제국은 둘로 갈라집니다. 서쪽의 〈서로마〉는 5세기에 무너지지만, 동쪽의 〈동로마(비잔틴)〉는 그로부터 약 1,000년을 더 지속됩니다. 그 비잔틴이 빚어낸 미술이 〈모자이크〉입니다. 작은 유리 조각 수만 개를 한 벽에 박아 거대한 그림을 만든 양식 —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명상이 그 작은 유리 조각들 안에 담겨 있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입니다. 폼페이의 빌라, 베수비오의 폭발, 로마 포룸의 한낮, 하기아 소피아의 안쪽,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새벽. 제2부는 다섯 사람 —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그리고 무명의 모자이크 장인. 제3부는 다섯 작품 — 폼페이 벽화,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판테온,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폼페이의 빌라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새벽까지, 9세기의 다섯 풍경.
아우구스투스에서 유스티니아누스까지, 한 제국을 흔든 다섯 사람.
폼페이 벽화,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판테온,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
로마의 식탁, 모자이크 도구, 비잔틴 옷, 성가, 그리고 필사실의 한 시간.
BC 1세기 폼페이의 한 빌라에서 시작해, AD 79년의 거대한 폭발, 2세기의 로마 포룸, 6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거대 돔, 그리고 8세기의 새벽까지. 한 제국이 약 900년 동안 빚은 다섯 풍경을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한 제국의 한 시기씩, 다섯 자리를 차례로 보여 드립니다.

AD 79년 8월 23일, 베수비오 화산 기슭 폼페이의 한 빌라 거실. 그날의 풍경이 1,700년 동안 그대로 멈춰 있다가 우리에게 도착했습니다.
폼페이는 BC 6세기경 그리스 식민지로 시작된 작은 도시였습니다. BC 80년 로마의 술라 장군이 정복해 로마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그 후 약 150년 동안 부유한 로마 귀족들이 자기 별장을 짓는 〈휴양 도시〉로 자라났어요. AD 79년의 어느 한낮, 그 도시에는 약 1만 5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빌라의 거실로 들어가 보면 한 가지 사실이 곧 눈에 띕니다. 모든 벽이 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요. 그 빛깔이 너무 일관되어 후대에는 그것을 〈폼페이 적색(Pompeian Red)〉이라 부르게 됩니다. 〈진사(辰沙, cinnabar)〉라는 광물에서 추출한 안료였고, 매우 비쌌어요. 한 방의 벽 전체를 그 색으로 칠한다는 것은 그 집주인의 부와 지위를 한눈에 보여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짙은 붉은 위에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 가는 붓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신들의 잔치,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만남, 풍요로운 정원의 한 풍경.
폼페이의 가장 큰 매력은 한 가지 — 〈한 도시의 한낮이 그대로 멈춰 있다〉는 점입니다. AD 79년 8월 24일의 폭발 이후 도시 전체가 약 4미터 두께의 화산재 아래로 묻혔고, 그 화산재가 산소를 차단해 주어 거의 모든 것이 1,700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어요. 1748년 발굴이 시작된 후, 우리는 한 도시의 가구·음식·낙서·사람들의 마지막 자세까지 거의 그대로 만나게 됩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 폭발의 그날을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의 학자 소(小) 플리니우스가 자기 외삼촌 대(大) 플리니우스의 죽음에 관해 적은 두 통의 편지가 그날의 가장 정확한 기록입니다.
AD 79년 8월 24일 정오, 베수비오 화산이 약 1,700년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처음 분출한 것은 거대한 〈화산재 기둥〉이었어요. 약 30km 높이까지 솟아오른 그 기둥은 그 시대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그 모양을 두고 〈우산 소나무(이탈리아의 한 나무)와 닮았다〉고 적었어요. 그 형태가 너무 인상적이라, 오늘날 화산학에서 그런 분출을 〈플리니우스식(Plinian) 분출〉이라 부릅니다.
처음 몇 시간 동안 폼페이에는 작은 화산재가 천천히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약 절반은 미처 떠나지 못했어요. 다음 날 새벽, 더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화산 옆구리가 무너지면서 약 700°C의 〈화쇄류(pyroclastic flow)〉가 시속 100km로 폼페이로 쏟아져 내려왔어요. 그 한순간에 도시 안의 모든 사람이 즉사했고, 도시 전체가 약 4~6미터 두께의 화산재 아래에 묻혔습니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날 함대 사령관이었어요. 그는 폭발을 보고 곧장 배를 띄워 도시 사람들을 구하러 갔지만, 그도 결국 화산 가스에 질식해 죽었습니다.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그날 외삼촌의 마지막 모습을 멀리서 봤고, 약 25년 후 자기가 본 것을 한 통의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 편지가 인류 역사상 〈첫 자연재해 목격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도시의 마지막 18시간이 그 두 통의 편지 안에 그대로 살아 있어요.

로마 포룸(Forum Romanum)은 도시 한복판의 골짜기였습니다. 그 좁은 골짜기 안에 한 제국의 거의 모든 결정이 모여 있었어요.
로마 포룸은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늪지대였어요. BC 6세기경 로마 사람들이 이곳을 메우고 광장으로 만들었고, 그 후 약 1,000년 동안 한 제국의 정치·종교·법·상업이 모두 이 한 골짜기에서 일어났습니다.
AD 100년경의 한낮을 상상해 보면 — 흰 토가를 입은 시민들이 광장을 지나다니고, 한쪽에서는 원로원이 회의를 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신관이 신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상인들이 동방에서 들어온 향료와 도자기를 팔고 있었어요.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 이른바 〈오현제 시대(Five Good Emperors)〉였습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그 다섯 황제가 약 84년(AD 96~180) 동안 차례로 통치하며 로마 제국을 가장 넓고 안정된 모습으로 이끌었어요.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가지 —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정치권이 한 평화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국 북부에서 이집트까지, 스페인에서 이라크까지, 약 5,000만 명이 한 황제 한 사람 아래 살았어요. 그 시대의 미술이 〈규모와 권력〉을 추구한 것은 그 사실과 깊이 묶여 있습니다. 한 사람이 5,000만 명의 가운데에 있을 때, 그 한 사람을 돌로 깎으면 그 돌은 그저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제국 전체의 모습〉이 되니까요. 다음 부에서 만날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동상이 그 한 가지 사례입니다.

AD 537년 12월 27일, 콘스탄티노플의 새 성당이 완공됩니다. 그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첫 미사에 들어서며 한 줄을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라는 뜻입니다. AD 537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5년 10개월 만에 완공된 성당이고, 그 후 약 1,000년 동안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실내 공간이었어요. 가장 큰 특징은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돔이었습니다. 지름 31미터, 높이 56미터. 그 시대 어떤 건축물도 그 크기의 돔을 떠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 돔의 비결은 한 가지 — 〈펜덴티브(pendentive)〉라는 새 구조였습니다. 사각형 평면 위에 둥근 돔을 얹는다는 것은 그 전까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사각형의 네 모서리와 둥근 돔 사이에 큰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가 두 사람 — 안테미오스(Anthemius)와 이시도로스(Isidorus) — 가 그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삼각형 곡면 네 개를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었어요. 그 네 곡면이 돔의 무게를 사방의 기둥으로 흘려 보냅니다. 이 발명이 그 후 약 1,500년 동안 거의 모든 큰 돔 건축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비밀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돔의 아래쪽에 약 40개의 작은 창이 둥글게 뚫려 있어, 안쪽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돔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비잔틴의 한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적은 한 줄이 인상적입니다. "이 돔은 마치 황금 사슬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It seems as if hung from heaven by a golden chain)." 한 건축이 〈빛으로 자기 무게를 지운다〉는 발상 — 그것이 비잔틴 미술의 가장 깊은 한 가지 마음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저 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두 대륙(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한 좁은 해협 위에 자리 잡은, 인류 역사가 가장 오래 〈한 자리에서 같은 도시로〉 이어진 곳입니다.
이 도시의 첫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습니다. BC 7세기경 그리스 식민지로 시작된 작은 항구였어요. 그 후 약 1,000년이 지난 AD 330년 5월 11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도시를 자기 새 수도로 삼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콘스탄티누스의 도시)〉이라 이름 바꿨습니다. 그날부터 1453년 오스만 튀르크의 함락까지, 약 1,123년 동안 이 도시가 동로마 제국(비잔틴)의 수도였어요.
이 도시가 특별한 이유는 한 가지 — 〈자리〉입니다. 도시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한 곶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해협이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유일한 길이에요. 모든 동서 무역의 배가 이 좁은 해협을 지나야 했고, 그 모든 배에 콘스탄티노플이 세금을 받았습니다. 또한 도시의 세 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가로막고 있어, 1,000년 동안 거의 어떤 적도 이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어요.
8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약 50만 명이 사는 인류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같은 시기 서유럽의 가장 큰 도시 파리가 약 2만 명, 런던이 약 1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어요. 하기아 소피아의 거대한 돔이 도시 한가운데에 떠 있었고, 황제의 궁전과 광장과 시장이 그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한 도시가 〈인류 문명의 한가운데〉라는 자리를 1,000년 동안 지켰던 그 풍경이 — 다음 부에서 만날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가 — 우리 이번 호의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로마 제국의 9세기 동안 거의 100명에 가까운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미술사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다섯 사람을 만나 봅니다.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를 발주한 유스티니아누스, 그리고 무명의 모자이크 장인.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로마는 그리스의 사본인가, 자기네 미술인가〉.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결정한 한 가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는 BC 753년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했습니다. 약 700년 동안 〈공화정〉이었어요. 한 사람의 왕이 아니라 시민이 뽑은 두 명의 〈집정관〉이 도시를 이끌었습니다. 그 공화정이 한 사람의 손에서 끝납니다.
BC 27년, 한 청년이 로마 원로원 앞에 섰습니다.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 그의 양아버지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어요.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약 13년 동안 로마는 내전을 겪었고,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적을 물리치고 한 사람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왕〉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어요. 로마 시민은 약 500년 전 마지막 왕을 쫓아낸 후 〈왕〉이라는 단어 자체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새 이름을 받았어요. 그리고 자기를 〈프린켑스(Princeps, 첫 시민)〉라 불렀습니다. 왕이 아니라 〈첫 시민〉으로서 한 제국을 이끄는 형식 — 그것이 그 후 약 300년 동안 로마 황제의 모습이 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미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정해진 한 가지 양식〉으로만 만들게 한 일이지요. 옆 페이지의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는 그 양식의 가장 완성된 한 점입니다. 영원히 30대 초반의 모습, 흰 토가 위에 군복, 한 손은 들어 명령하는 자세. 이 한 양식의 동상이 제국 전역에 약 200점 이상 만들어져 모든 도시 광장에 세워졌어요. 그가 75세에 죽었을 때도 그 동상들의 얼굴은 여전히 30대였습니다. 한 황제가 〈자기 이미지〉를 처음으로 표준화한 그 결정이, 후대 모든 권력자의 초상화 전통의 시조가 됩니다.

트라야누스(Trajan)는 로마 제국이 가장 넓었던 시기의 황제였습니다. 그가 세운 한 기둥에 그의 한 전쟁의 모든 장면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요.
트라야누스는 AD 98년부터 117년까지 약 19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 시대 로마 제국의 영토는 가장 넓게 펼쳐졌어요 — 영국 북부에서 이라크까지, 스페인에서 이집트까지. 약 5,000만 명이 한 황제 한 사람 아래 살던 시기입니다. 트라야누스의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이 두 차례의 〈다키아 전쟁(AD 101~102, 105~106)〉이었어요. 오늘날의 루마니아 일대를 정복한 전쟁이고, 그곳에서 약 50만 kg의 황금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그 전리품으로 그는 로마에 거대한 새 광장 〈트라야누스 광장〉을 지었어요. 그 광장 한가운데에 한 기둥이 세워집니다. 높이 38미터, 흰 대리석 19개 토막을 쌓아 만든 거대한 기둥이었어요. 그 기둥의 표면에는 다키아 전쟁의 전 과정이 나선형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 약 2,500개의 인물이 길이 200미터의 띠 위에 줄지어 있는 거대한 부조였어요. 인류가 만든 첫 번째 본격적인 〈역사 다큐멘터리〉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 기둥이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큽니다. 한 사건의 전 과정을 시간순으로 돌아가며 보여 주는 형식 — 그것이 후대 〈서사적 부조〉의 시조가 됩니다. 19세기 이후 신문의 만화 스트립, 20세기 영화의 시퀀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는 그래픽 노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결국 그 한 기둥의 형식을 따라간 것입니다. 한 황제가 자기 전쟁을 영원히 남기고 싶어 한 그 마음이, 약 2,000년 후의 영화 한 편의 시조가 되었어요.
로마는 BC 1세기부터 약 300년 동안 그리스도교를 박해해 왔습니다. 한 황제의 한 결정이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뒤집었어요.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한 칙령을 내렸습니다.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라 부르는 그 한 줄짜리 명령은 단순한 내용이었어요 — "로마 제국 내에서 모든 종교에 자유를 인정한다." 그 한 줄 안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는 사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유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AD 312년의 〈밀비안 다리 전투〉에 관한 것입니다. 그날 콘스탄티누스가 자기 적을 향해 진군하기 직전에 하늘에서 한 가지 환상을 봤다고 전해져요. 〈In hoc signo vinces — 이 표시로 그대는 이기리라〉라는 라틴어 글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시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군대의 방패에 그 표시를 그리게 했고, 그날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1년 후 그가 그리스도교 공인을 결정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큰 결정이 AD 330년에 있었습니다.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일이지요. 새 수도의 이름은 자기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이 되었습니다. 이 두 결정 — 그리스도교 공인과 새 수도 건설 — 이 그 후 약 1,500년의 유럽사를 결정했어요. 미술사 측면에서 보면, 두 결정은 한 가지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 미술이 그리스의 〈인체 비례〉를 떠나 비잔틴의 〈상징과 빛〉으로 옮겨 가는 길의 시작점이 그 두 결정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잔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평가됩니다. 그가 약 38년 동안 통치하며 남긴 세 가지가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첫 번째 유산이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입니다. AD 528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 쌓여 온 로마법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려요. 그가 임명한 학자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가 약 4년 동안 약 200만 줄의 옛 법조문을 약 16만 줄로 정리했습니다. 이 책이 그 후 약 1,500년 동안 유럽 법체계의 기초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민법의 시조가 이 책 안에 있어요.
두 번째가 〈하기아 소피아〉입니다. AD 53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 옛 성당이 불탔어요. 유스티니아누스는 곧장 새 성당 건설을 명령했고, 5년 10개월 만에 우리가 지난 부에서 만난 그 거대한 돔을 완공시킵니다.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라는 두 수학자 출신 건축가에게 일을 맡겼고, 그들이 만든 〈펜덴티브 돔〉이 그 후 1,500년 거의 모든 큰 돔의 기본이 됩니다.
세 번째가 〈서로마의 회복〉입니다. AD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상태였어요.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찾으려 했고, 약 30년의 전쟁 끝에 이탈리아·북아프리카·스페인 남부를 일시적으로 회복합니다. 그 일시적 회복의 중심지가 이탈리아 동북부의 라벤나(Ravenna)였어요. 옆 페이지의 모자이크가 바로 그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San Vitale)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 황제가 자기 영토의 한가운데에 자기 모습을 영원한 모자이크로 남기고 싶어 한 마음 — 그 모습이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로마 미술은 그리스 미술의 모방인가, 자기네 미술인가〉.
로마 사람들 자신도 이 질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호라티우스(Horatius)라는 BC 1세기 시인이 한 줄을 적었습니다 — "정복된 그리스가 정복자(로마)를 정복했다(Graecia capta ferum victorem cepit)."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그리스를 이겼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가 로마를 이겼다는 말입니다. 사실 BC 146년 그리스 본토를 정복한 후 로마는 그리스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어요. 신들의 이름만 라틴어로 바꾸었을 뿐 — 제우스가 유피테르가 되고, 아테나가 미네르바가 되고, 아프로디테가 베누스(비너스)가 되었습니다. 신화의 줄거리는 거의 다 그리스의 것이었어요.
그러나 로마 미술이 그리스의 단순한 사본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로마는 한 가지를 새로 발명했어요 — 〈콘크리트(opus caementicium)〉입니다. 화산재·석회·물·자갈을 섞어 만든 이 재료는 굳으면 돌처럼 단단해지고, 거푸집 안에 부어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었어요. 그리스 사람들은 이 재료를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건축은 모두 〈기둥과 들보〉의 사각형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콘크리트로 거대한 〈돔〉과 〈아치〉를 처음 만들었어요. 판테온의 거대한 돔, 콜로세움의 50,000석, 거대한 수로교 — 이 모든 것이 콘크리트라는 한 발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답은 한 가지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모티프〉를 받아 썼지만, 〈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자기네 것을 새로 만들었어요. 그리스가 〈한 사람의 몸의 비례〉를 발명했다면, 로마는 〈한 도시의 공간의 비례〉를 발명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비잔틴이 한 가지를 더 얹었어요 —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방식〉. 그것이 바로 옆 페이지의 모자이크 공방이 만들고 있는 것이고, 다음 부의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가 그 정점입니다.
폼페이의 한 빌라 벽에 남은 프레스코, 한 황제의 영원한 30대 모습, 콘크리트로 처음 띄운 거대 돔, 라벤나의 한 벽 위 250만 개 유리 조각,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거대 성당. 9세기 로마와 비잔틴이 남긴 다섯 점입니다.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폼페이가 미술사에서 특별한 까닭은 한 가지 — 한 도시 거의 모든 집의 벽 그림이 그대로 우리에게 도착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시대의 거의 모든 회화 작품은 사라졌습니다. 캔버스에 그린 〈이젤 페인팅〉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벽에 직접 그린 〈프레스코〉였기 때문이에요.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그 벽 그림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폼페이만은 예외였어요. AD 79년의 화산재가 도시 전체를 산소로부터 차단해 주어, 약 1,700년 동안 모든 벽 그림이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학자들은 폼페이의 프레스코를 네 가지 양식으로 나눕니다. 제1양식(BC 2세기)은 단순히 벽을 대리석처럼 보이게 색칠하는 양식, 제2양식(BC 1세기)은 벽에 가짜 건축이나 풍경을 그려 공간이 더 깊게 보이게 하는 양식, 제3양식(AD 1세기 초)은 가는 선과 작은 그림으로 우아하게 장식하는 양식, 그리고 제4양식(AD 60~79)은 화려한 색과 환상적인 풍경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양식이에요. 우리가 옆 페이지에서 보고 있는 〈베티의 집〉 프레스코가 마지막 제4양식의 한 예입니다.
폼페이의 발굴은 미술사의 한 가지 큰 발견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로마 회화가 그리스 회화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폼페이의 벽 그림들은 — 가는 붓 선의 정교함, 깊은 공간감, 환상적인 색감 — 그리스 회화에 못지않은 수준이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도시의 화산재가 한 시대의 미술사 평가를 거의 한 번에 바꿔 놓은 그 사건 — 1748년 발굴이 시작된 후 우리가 만난 가장 큰 미술사적 선물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 동상은 1863년 로마 북쪽 약 12km 지점의 〈프리마 포르타(Prima Porta)〉라는 작은 마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리비아의 별장이 있었어요.
이 동상은 아우구스투스 사후 약 30년 후에 만든 사본으로 추정됩니다. 원본은 BC 20년경 한 청동 동상이었을 것이라 학자들은 봐요. 그 청동 원본은 사라졌고,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의 대리석 사본이지만, 그 안에 한 황제가 자기 모습을 〈영원히 30대〉로 박제하고 싶어 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동상의 자세한 부분 하나하나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어요. 머리에는 월계관이 없는 대신 〈시민 화관(corona civica)〉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한 시민을 죽음에서 구한 사람〉에게 주는 명예였어요. 즉 그가 황제가 아니라 〈첫 시민〉이라는 자기 정의를 강조하는 표시였습니다. 가슴 갑옷에는 BC 20년 파르티아 제국에서 잃었던 군기를 다시 찾아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요. 그의 정치적 가장 큰 외교 성과를 자기 가슴에 영원히 새긴 셈입니다.
발 옆에는 작은 큐피드가 돌고래를 타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요. 이것은 〈자기 가문이 베누스 여신의 후손〉이라는 그의 주장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한 동상이 단순히 한 사람의 모습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한 정치 프로그램 전체를 새기고 있는 셈이지요. 옆 페이지의 한 손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학자들은 그가 군대를 향해 명령하는 자세, 또는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자세를 새긴 것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든, 그 동상은 한 황제가 〈자기 권위를 영원히 시각화한 한 점〉입니다.

판테온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가지 — 한가운데 천장에 직경 9미터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는 점입니다. 비가 와도 닫히지 않습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의 신전〉이라는 뜻입니다. AD 12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지어졌고, 그 후 약 1,900년 동안 거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요. 한 가지 놀라운 사실 — 이 건물은 그 후 약 1,300년 동안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콘크리트 돔이었습니다. 1436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완공될 때까지요. 그리고 비철강 콘크리트 돔으로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입니다.
이 건물의 비결은 〈콘크리트의 점진적 변화〉입니다. 돔의 아래쪽은 무거운 트래버틴 돌을 섞은 콘크리트로, 가운데는 벽돌과 응회암을 섞은 콘크리트로, 가장 위쪽은 가벼운 부석(浮石, pumice)을 섞은 콘크리트로 만들었어요. 즉, 위로 갈수록 무게가 가벼워지도록 재료의 밀도를 단계적으로 바꾸어 그 거대한 돔이 자기 무게로 무너지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2,000년 전 한 건축가가 콘크리트의 화학을 그렇게 정교하게 다뤘다는 사실 — 그 한 가지가 가장 놀랍습니다.
그리고 천장의 〈오쿨루스(oculus)〉라 부르는 직경 9미터의 둥근 구멍. 이 구멍이 신전 안의 유일한 빛 통로입니다. 햇빛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와 한 시간마다 천천히 신전 안쪽 벽을 비추며 도는 모습이 마치 〈자연이 그리는 거대한 해시계〉같아요. 비가 오는 날에는 그 비가 신전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지만, 바닥에 미세한 경사와 작은 배수구가 있어 빗물이 곧 빠집니다. 한 건물이 자기 안의 〈빛〉과 〈하늘〉을 그렇게 직접 받아들이도록 설계된 그 마음 — 그것이 로마 건축이 그리스를 넘어선 한 가지 자리입니다.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한 벽에는 한 황제와 신하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유리 조각의 모자이크〉라는 사실이 보여요.
이 모자이크는 약 6세기 비잔틴 미술의 정점입니다. 가로 약 4미터, 세로 약 2.6미터의 한 벽면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12명의 신하〉가 거룩한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황제의 머리 뒤에 있는 둥근 〈후광(halo)〉입니다. 그 전까지 후광은 신과 성인에게만 허용되었어요. 한 살아 있는 황제가 자기 모자이크에 후광을 함께 새기게 한 것이 — 비잔틴이 〈신과 황제를 거의 같은 자리에 놓는〉 정치 신학의 시작이었습니다.
모자이크의 재료는 〈테세라(tessera)〉라는 작은 정육면체 유리 조각입니다. 황금색은 〈얇은 금박을 두 장의 투명 유리 사이에 끼워 만든 특수 유리〉를 사용했어요. 이 한 점 모자이크에 사용된 테세라는 약 250만 개로 추정됩니다. 한 사람의 장인이 한 평생 약 50만 개를 깎고 박을 수 있다고 하니, 약 5명의 장인이 약 1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작품인 셈입니다.
모자이크의 가장 깊은 비밀은 한 가지 — 유리 조각의 각도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모든 작은 유리 조각이 평평하지 않고 미세하게 다른 각도로 박혀 있어요. 그래서 한 자리에서 빛이 들어오면 어떤 조각은 빛을 받고 어떤 조각은 받지 못해, 전체가 〈깜빡거리는 것처럼〉 빛납니다. 6세기 라벤나의 한 모자이크 장인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을 자기 작품 안에 담은 그 발상 — 그것이 비잔틴 미술의 가장 깊은 마음입니다. 한 벽이 그저 그림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살아 있는 빛〉이 되도록 만든 것이지요.

하기아 소피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공식 종교 건물 사용 기간〉을 기록한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약 1,50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세 종교의 성소 역할을 했어요.
첫 번째 시기, AD 5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916년 동안은 〈동방정교회 대성당〉이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대주교가 이곳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했고, 약 1,000년 동안 인류 그리스도교의 중심 건물 중 하나였어요. 두 번째 시기,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 직후 메흐메드 2세가 이 건물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했습니다. 모자이크는 회칠로 가려졌고,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이 추가되었으며, 외벽에 거대한 첨탑(미나레트) 4기가 세워졌어요. 그 후 약 481년 동안 이슬람 모스크였습니다.
세 번째 시기, 1934년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꿨어요. 회칠을 일부 벗겨내 옛 비잔틴 모자이크를 다시 드러냈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흔적을 함께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 7월 24일, 터키 정부는 이 건물을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되돌렸어요. 지금도 무슬림은 이곳에서 예배하고, 일반 관광객은 비-예배 시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건물이 그렇게 세 가지 정체성을 거치며 약 1,500년을 지나왔다는 사실 — 그것이 이 건물의 가장 큰 의미일지도 모르겠어요. 외벽의 4기 미나레트는 1453년 이후에 추가된 이슬람의 흔적이고, 안쪽의 거대한 모자이크는 비잔틴의 흔적이며, 가장 안쪽의 옛 기둥들은 6세기에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옮겨 온 더 오래된 신전의 흔적입니다. 한 건물이 세 종교, 일곱 시대, 그리고 약 50개의 다른 정치 권력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했어요. 그 모든 역사를 한 자리에서 보여 주는 건축물이 인류 역사에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로마 시민의 식탁, 모자이크 장인의 도구, 비잔틴의 옷, 성가의 한 곡, 그리고 필사실의 한 시간. 신전과 모자이크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로마의 식탁은 그리스의 식탁보다 훨씬 호화로웠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한 가지 — 〈가룸〉이라는 생선 소스입니다.
가룸(garum)은 로마 사람들이 거의 모든 음식에 쳐 먹은 생선 발효 소스입니다. 작은 생선과 그 내장을 소금에 절여 햇볕에서 약 2~3개월 발효시키면 짙은 호박색의 진한 액체가 만들어졌어요. 동남아시아의 〈피시 소스(느억맘)〉와 거의 똑같은 원리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 가룸을 빵에도, 야채에도, 고기에도 쳐 먹었어요. 가룸을 만드는 공장이 폼페이 한쪽에 있었고, 그곳에서 만든 가룸이 로마 제국 전역으로 운반되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정식 만찬은 9가지 코스로 나뉘었어요. 〈전채 3가지(gustatio)〉— 굴, 달걀, 야채 — 로 시작해, 〈본 식사 3가지(prima, secunda, tertia mensa)〉 — 생선, 고기, 야생 조류 — 가 이어졌고, 마지막에 〈후식 3가지(secundae mensae)〉 — 과일, 견과류, 케이크 — 로 끝났습니다. 한 끼에 약 4~5시간이 걸렸어요. 그 동안 시민들은 〈클리네〉라 부른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식사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식사하는 것은 〈여자와 야만인의 풍습〉으로 여겨졌어요.
가장 흥미로운 일화 중 하나는 〈비텔리우스 황제의 한 끼〉입니다. AD 69년 잠시 황제였던 비텔리우스는 한 번의 만찬에 약 2,000마리의 생선과 7,000마리의 새를 차렸다고 전해져요. 그러나 비텔리우스 같은 사례는 예외입니다. 일반 시민의 일상 식사는 빵·올리브·치즈가 핵심이었고, 만찬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어요. 한 시대의 식탁이 한 시대 권력자의 〈도덕적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 — 로마 시대만큼 그 사실이 또렷한 시기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한 점의 비잔틴 모자이크가 완성되는 데에는 보통 다섯 종류의 장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도구가 모자이크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첫째가 〈디자이너(pictor imaginarius)〉입니다. 작품의 전체 구도를 큰 도면으로 그리는 사람이었어요. 둘째가 〈그림 그리는 장인(pictor parietarius)〉입니다. 디자이너의 큰 도면을 벽 위에 옮겨 색칠하는 사람이었어요. 모자이크가 박히기 전에 벽 자체에 색을 미리 칠해 두었습니다. 셋째가 〈테세라 자르는 장인(tessellarius)〉입니다. 작은 유리 조각 수만 개를 정확한 크기와 색으로 미리 잘라 두는 사람이었어요.
넷째가 〈모자이크 박는 장인(musearius)〉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이었어요. 회반죽이 굳기 전에 약 1평방미터를 한 번에 끝내야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빠르게 색깔을 골라 정확한 자리에 박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밀이 있었어요. 모든 테세라를 평평하게 박지 않고 미세하게 다른 각도로 박아, 빛이 들어올 때 깜빡이는 효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각도〉가 한 모자이크의 운명을 결정했어요. 다섯째가 〈광택 장인(politor)〉입니다. 모자이크가 굳은 후 표면을 부드럽게 다듬어 마지막 빛을 잡아 주는 사람이었어요.
한 점의 모자이크가 완성되는 데 약 1년이 걸렸고, 약 5~10명의 장인이 함께 일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의 다 사라졌어요. 우리는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가 누구의 작품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구 — 망치, 가위, 회반죽, 그리고 작은 유리 조각 한 더미 — 가 우리에게 그들의 손짓을 어렴풋이 알려 줍니다. 이름은 사라져도 손은 그렇게 길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비잔틴 황실의 옷은 그 자체가 한 권의 정치 책이었습니다. 색·재료·무늬 하나하나가 황제의 권력을 시각화한 것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색이 〈티리언 자주(Tyrian purple)〉입니다. 지중해의 한 작은 바다 달팽이 〈무렉스〉에서 추출한 짙은 자주색 안료였어요. 이 안료를 만드는 데 약 1만 마리의 무렉스가 필요했고, 그래서 비단 한 마에 그 색을 입히려면 같은 무게의 황금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에서 이 색은 황제와 그의 직계 가족에게만 허용되었어요. 황제의 옷장에서 한 번이라도 〈티리언 자주〉가 한 평민의 손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제위 찬탈의 의도〉로 해석되어 처형 사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핵심 재료가 〈비단(silk)〉입니다. 6세기까지 비단은 중국에서만 생산되어 〈실크로드〉를 통해 비잔틴까지 운반되었어요. 그러나 AD 552년 두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가 중국에서 누에알을 대나무 지팡이 안에 숨겨 비잔틴까지 가져옵니다. 그 한 가지 사건이 비잔틴을 〈서방 최초의 비단 생산 국가〉로 만들었어요. 그 후 약 700년 동안 비잔틴이 유럽 비단의 거의 모든 공급을 독점했습니다.
장신구도 같은 원리로 작동했습니다. 〈로로스(loros)〉라 부른 거대한 금실 띠는 황제와 그의 보좌관에게만 허용되었고, 진주 목걸이의 진주 개수는 신분에 따라 정해져 있었어요. 옷이 곧 정치, 보석이 곧 직위였던 시대 — 그 시대의 옷장이 한 시대의 권력 구조 그대로의 표현이었습니다. 옆 페이지의 모자이크 속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입은 자주색 옷, 머리에 두른 보석 왕관, 가슴의 십자가 페로내 — 그 모든 것이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한 권의 정치 매뉴얼이기도 했어요.

비잔틴과 서방의 그리스도교 음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 〈한 줄의 선율(monophony)〉.
그리스 음악과 가장 큰 차이가 한 가지 있었어요. 그리스에서는 신을 위한 리라와 잔치를 위한 아울로스가 분리되어 있었지만, 비잔틴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음악이 〈오직 노래(vocal)〉로만 표현되었습니다. 악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목소리만이 신에게 가는 통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단성 합창의 가장 유명한 형식이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입니다. AD 6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그 시대까지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교 성가들을 하나의 양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전해져요. (실제로는 약 9세기경에 정리되었지만, 그레고리오의 이름이 그대로 붙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은 한 가지 — 모든 가수가 같은 한 줄의 선율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화음도, 리듬의 강약도, 박자도 거의 없어요. 오직 한 줄의 라틴어 가사와 그 가사를 따라가는 한 줄의 선율뿐.
왜 화음이 없었을까. 한 가지 답은 〈영원에 대한 감각〉에 있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에게 음악은 〈신의 영원함〉을 사람의 귀로 듣게 하는 도구였어요. 영원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음악도 변하지 않는 한 줄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약 1,000년이 지난 9~10세기 무렵부터 서방에서 화음(다성)이 천천히 등장하지만, 비잔틴 동방교회는 그 후로도 약 500년 동안 단성 합창을 지켰어요. 한 시대의 음악이 한 시대의 시간 감각과 그렇게 깊이 묶여 있었던 셈입니다.

8세기 비잔틴 수도원의 한 작은 방. 그 방의 이름이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그 방에서 1년에 걸쳐 만들어졌어요.
중세 초기에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보통 1년이 걸렸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한 수도원의 한 방 — 스크립토리움 — 에서 일어났어요. 첫 단계가 양피지 만드는 일입니다. 송아지 가죽을 벗겨 석회수에 며칠 담그고, 털을 긁어내고, 햇볕에 말려 부드럽게 만든 한 장의 양피지가 책의 한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한 권의 두꺼운 책에 약 200~300마리의 송아지가 필요했어요.
두 번째 단계가 〈사본 작업(copying)〉입니다. 한 명의 수도사가 〈모범 책(exemplar)〉이라 부른 옛 책을 옆에 놓고, 새 양피지에 한 글자씩 그대로 옮겨 적었어요. 한 글자라도 잘못 적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천천히 작업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약 4~6쪽 정도를 옮겨 적을 수 있었어요. 세 번째 단계가 〈채식(illumination)〉입니다. 〈채식 장인(illuminator)〉이라 부른 다른 수도사가 책의 각 장 시작 부분에 큰 채색 글자와 작은 그림을 그렸어요. 이 채식이 한 권의 책을 단순한 글자 모음에서 한 점의 미술 작품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가 〈제본(binding)〉입니다. 모든 페이지를 모아 송아지 가죽으로 묶고, 표지를 나무판으로 만들어 그 위에 가죽을 입혔어요. 가장 호화로운 책에는 표지에 황금 부조와 보석을 박기도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1년의 시간과 5~6명의 수도사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고, 한 권의 가격이 작은 농장 한 채와 비슷했어요. 약 1,300년 후 우리가 1초에 한 권의 PDF를 다운로드받는 시대에 살면서, 한 권의 책이 1년에 만들어지던 그 자리를 가끔 떠올려 보는 것이 미술사의 한 가지 작은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BC 753 로마 건국 (전설)
BC 146 로마가 그리스 본토 정복 — 〈정복된 그리스가 정복자를 정복했다〉
BC 27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다 — 제정 시작
AD 79.08.24 베수비오 폭발 · 폼페이 매몰
AD 80 콜로세움 완공 (5만 석)
AD 96 ~ 180 오현제 시대 — 제국 황금기
AD 113 트라야누스 기둥 완공
AD 126 판테온 완공 (하드리아누스)
AD 313 밀라노 칙령 — 그리스도교 공인
AD 330 콘스탄티노플 천도 (콘스탄티누스)
AD 395 로마 제국 동서로 분할
AD 476 서로마 멸망 (게르만 침공)
AD 528 〈로마법 대전〉 편찬 시작 (유스티니아누스)
AD 537 하기아 소피아 완공
AD 547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
AD 552 누에알 밀반입 — 비잔틴 비단 산업 시작
AD 730 ~ 843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 — 비잔틴 미술의 큰 위기
1054 동서 교회 분열 (가톨릭 vs 정교회)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 비잔틴 멸망
1748 폼페이 발굴 시작

1. 폼페이 〈베티의 집〉 프레스코 AD 1세기 — 한 도시의 벽 그림이 그대로 남은 한 점.
2.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AD 1세기 초 — 영원히 30대인 첫 황제.
3. 콜로세움 AD 80 — 옆 그림. 5만 석의 거대 원형 경기장.
4. 트라야누스 기둥 AD 113 — 38미터 위에 새겨진 약 2,500인의 부조.
5. 판테온 AD 126 — 인류 최초의 거대 콘크리트 돔. 1,300년 동안 세계 최대.
6. 산 비탈레의 모자이크 AD 547 — 250만 개의 유리 조각.
7. 하기아 소피아 AD 537 — 한 건물이 세 종교를 살았다.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7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한 제국을 흔든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제국이 빚은 9세기.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소 플리니우스 〈편지〉 · 프로코피우스 〈건축에 관하여〉 · 케네스 클라크 〈Civilisation〉 · 대영박물관·바티칸·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8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에서 13세기 고딕의 절정까지. 한 시대 사람들이 〈신의 빛〉을 어떻게 한 채의 성당으로 지었는지에 관한 5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