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미술사Luna Art History · 2026
Vol
05
No.5 · 20부작
피렌체 대성당 — 브루넬레스키의 돔
SPECIAL ISSUE · 한 사람의 이름이 다시 불리는 자리

르네상스의 시작

14세기 피렌체의 한 화가 지오토에서 15세기 플랑드르의 반 에이크까지 — 약 1,000년의 익명을 깨고 한 사람의 이름이 다시 불리기 시작한 150년.

LUNA WHALE · ART HISTORY54 PAGES · 4 PARTS
EDITOR'S LETTER · 여는 글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다섯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난 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13세기의 거대한 고딕 성당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성당은 한 시대 전체의 일이었어요. 한 사람의 이름이 사라지고 한 시대 전체의 손만 남은 그 자리. 그 풍경에서 떠나, 우리는 이번 호에서 미술사의 가장 극적인 한 전환점에 도착합니다 — 한 사람의 이름이 다시 불리기 시작한 자리.

그 한 사람의 이름이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입니다. 그는 1305년경 이탈리아 파도바의 작은 예배당, 〈스크로베니 예배당(Cappella degli Scrovegni)〉의 안벽 전체에 38개의 프레스코 연작을 그렸어요. 그 한 채의 작은 예배당이 미술사의 한 기점이 됩니다. 〈서양 미술이 다시 인간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자리〉. 그 한 채의 안벽 위에서 마리아의 슬픔이 처음으로 〈인간의 슬픔〉으로 그려졌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처음으로 〈한 어머니가 한 아들을 잃는 일〉로 그려졌습니다.

이 호의 두 번째 큰 주인공은 〈피렌체〉라는 한 도시입니다. 14~15세기 약 150년 동안 피렌체에서 한 가지 일이 일어나요. 한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 —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여러 후원자들 — 이 한 사람의 화가, 한 사람의 조각가, 한 사람의 건축가에게 직접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합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약 1,000년 동안의 익명을 깨고 〈한 사람의 이름이 다시 불리는 시대〉를 열었어요. 지오토 다음에 마사초, 그 다음에 도나텔로, 그 다음에 브루넬레스키, 그 다음에 우첼로, 그 다음에 보티첼리 —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이름이 살아남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주인공은 〈빛〉이에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그 변화가 15세기 중엽 알프스 북쪽의 한 도시 〈브뤼주(Bruges)〉로 옮겨 갑니다. 그곳에서 한 명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가 한 가지 발명을 해요. 〈유화(oil paint)〉입니다. 그가 1432년 완성한 〈겐트 제단화〉는 그 한 가지 발명의 결정체이고, 그 후 약 500년의 서양 회화의 표준 기법이 그 한 점에서 시작됩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인간의 얼굴〉이, 15세기 플랑드르에서 〈빛 속의 인간〉이 되었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입니다. 1320년경의 피렌체, 새벽의 피렌체, 지오토의 작업실, 반 에이크의 작업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 제2부는 다섯 사람 — 지오토,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반 에이크, 그리고 한 가지 의문(왜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나). 제3부는 다섯 점 —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비탄〉, 피렌체 대성당의 돔, 도나텔로의 〈다비드〉(청동),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 식탁, 템페라와 유화, 옷, 궁정 음악, 베니스의 르네상스 안료.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2026년 9월 · 루나웨일 미술사 편집실
EDITOR — Luna Whale
02
CONTENTS · 목차

한 호의 네 부

A

시대의 풍경

1320년경의 피렌체에서 1430년경의 브뤼주까지, 약 100년의 다섯 풍경.

P.04 – P.15
B

이름이 다시 불린 사람들

지오토,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반 에이크 — 익명의 시대를 깬 다섯 이름.

P.16 – P.27
C

남긴 다섯 점

스크로베니의 비탄, 피렌체의 돔, 청동 다비드, 성 삼위일체, 겐트 제단화.

P.28 – P.39
D

그들의 한 끼, 한 곡, 한 벌

초기 르네상스의 식탁, 템페라와 유화 도구, 피렌체 패션, 궁정 음악, 베니스 안료.

P.40 – P.51
03
A
PART A · 5 STORIES · 시대의 풍경

초기 르네상스의 다섯 풍경

1320년경 피렌체의 좁은 골목에서 1430년경 브뤼주의 한 작업실까지. 한 도시의 한 화가가 한 점의 작은 작품을 그리고 있던 약 100년의 풍경 다섯을 따라갑니다.

한 시대가 한 도시 안에서, 한 작업실 안에서 천천히 시작되었습니다.
04 · CHAPTER OPENER
04
PART A · 다섯 풍경

초기 르네상스의 다섯 풍경

한 도시에서 한 시대가 어떻게 천천히 깨어났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A1

1320년 피렌체의 거리

한 도시의 한가운데, 막 시작된 두오모의 풍경 · P.06
A2

새벽의 피렌체

피아잘레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본 한 도시 · P.08
A3

지오토의 프레스코 작업실

젖은 회벽 위의 한 시간 · P.10
A4

반 에이크의 플랑드르 작업실

유화의 첫 시대 · 1430년경 브뤼주 · P.12
A5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

한 장의 거울이 미술의 천 년을 바꾼 1413년 · P.14
05
A · 01 · 1320 피렌체
1320년 피렌체의 거리
1320년의 피렌체 — 좁은 골목, 갓 시작된 두오모의 외벽, 양털을 짜는 상인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든 시인 단테가 막 떠나간 도시.
06
A · 01 · 1320 피렌체 · 인구 약 9만 명

한 도시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다

14세기 초의 피렌체는 인구 약 9만 명의 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 한 곳에서 그 후 200년의 미술사가 거의 다 시작됩니다.

1320년경의 피렌체 — 그 도시는 이미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어요. 부의 출처는 한 가지 — 〈양모(wool)〉였습니다. 영국 본토에서 들어온 거친 양모가 피렌체의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라는 양모 길드 작업장에서 정교한 모직물로 가공되었고, 그 모직물이 다시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어요. 한 도시의 약 30%가 양모 산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에 종사했습니다.

두 번째 산업이 〈은행〉이었어요. 13~14세기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유럽 최초의 〈복식부기〉를 발명했고, 〈환어음(letter of credit)〉이라는 한 가지 도구로 유럽 전역의 자금 흐름을 통제했습니다. 가장 큰 은행이 메디치 은행, 그리고 그 다음에 페루치·바르디 은행이었어요. 한 도시의 은행 자본이 결국 한 시대 미술의 후원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세 번째 — 한 권의 책. 1320년경 피렌체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1308년부터 쓰기 시작한 〈신곡(La Divina Commedia)〉이 1320년경 거의 완성됩니다. 그 책이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 토스카나 방언〉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어요. 그 책 한 권이 이후 600년의 이탈리아어의 표준이 되었고, 동시에 〈한 도시의 자기 언어로 쓰인 책〉이라는 새 모델을 유럽에 처음 보여 주었습니다. 한 도시의 자존심이 그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그 자존심이 미술의 다른 한 시대의 자존심으로 이어집니다.

시기1320년경
인구약 9만 명
주력산업양모·은행
한 권의 책단테 〈신곡〉
한 도시의 자존심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어요 — 그 자존심이 다른 한 시대의 미술이 되었습니다.
07
A · 02 · 새벽 피렌체
새벽의 피렌체
피아잘레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본 새벽의 피렌체 — 두오모의 거대한 돔, 산타 크로체, 베키오 다리, 그리고 토스카나의 부드러운 안개.
08
A · 02 · 피렌체 풍경 · 한 도시의 윤곽

한 도시의 윤곽이 미술이 되다

피렌체의 윤곽 — 두오모의 돔, 베키오 궁전의 종탑, 베키오 다리 — 은 그대로 한 시대 미술의 윤곽이기도 합니다.

옆 페이지의 풍경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 가지 — 〈두오모의 돔〉입니다. 그 거대한 붉은 벽돌 돔은 1418년부터 1436년까지 18년에 걸쳐 한 사람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 의 손으로 만들어졌어요. 그 돔이 1436년 완공되었을 때, 그것은 〈로마 판테온 이후 1,300년 만에 처음 만들어진 거대 돔〉이었습니다. 한 도시가 〈우리도 옛 로마처럼 만들 수 있다〉라는 자존심을 그 한 채로 증명한 셈이지요.

두 번째 윤곽이 〈산타 크로체(Santa Croce)〉라는 작은 성당이에요. 그 성당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까닭은 한 가지 — 그 안벽에 지오토가 1320년경 그린 프레스코 연작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디 예배당〉과 〈페루치 예배당〉이라 부르는 두 작은 자리에 있는 그 그림들이 — 그리고 우리가 다음 페이지에서 만날 〈스크로베니 예배당〉과 함께 — 지오토의 가장 중요한 세 작업입니다.

세 번째 윤곽은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의 종탑이에요. 1299년부터 짓기 시작한 그 궁전이 한 도시의 정치적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피렌체는 그 시대에 한 가지 새로운 정치 형식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공화정(repubblica)〉입니다. 왕도 황제도 없이 한 도시의 시민들이 자기 대표를 직접 뽑아 다스리는 형식이었지요. 그 정치 형식 자체가 옛 로마 공화정의 부활이었고, 한 도시의 시민들은 자기들이 〈로마의 후예〉라는 자존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자존심이 결국 한 시대 미술 — 〈로마의 부활(rinascita)〉 — 의 동력이 되었어요.

두오모1418~1436 (18년)
산타 크로체지오토 프레스코
정치 형식공화정 (repubblica)
자존심"로마의 후예"
한 도시의 윤곽이 그대로 한 시대의 윤곽이었어요 — 그 도시가 한 시대 전체의 자존심이었습니다.
09
A · 03 · 지오토 작업실
지오토의 프레스코 작업실
14세기 지오토의 프레스코 작업실 — 갓 바른 회벽 위에 한 색씩 빠르게 입히는 〈프레스코 부오노(buon fresco)〉의 한 시간.
10
A · 03 · 프레스코 · "젖은 그림"

젖은 회벽 위의 한 시간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한, 젖은〉을 뜻합니다. 갓 바른 젖은 회벽 위에 한 시간 안에 한 색씩 빠르게 입히는 한 가지 그림 기법이에요.

프레스코 부오노(buon fresco) — 〈진짜 프레스코〉라 부른 그 기법은 매우 빠르고 정확해야 했어요. 첫째, 벽에 굵은 회반죽 〈아리치오(arriccio)〉를 한 겹 바릅니다. 둘째, 그 위에 가는 회반죽 〈인토나코(intonaco)〉를 그 날 그릴 부분만큼만 다시 발라요. 셋째, 그 인토나코가 마르기 전 — 보통 6~8시간 안에 — 색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회반죽의 석회가 마르면서 안료를 〈물리적으로〉 가두는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한 번의 반응이 천 년 동안 색을 살아 있게 만들어요.

한 가지 큰 어려움은 〈수정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반죽이 마르고 나면 그 부분은 더 이상 색이 받지 않아요. 잘못 그린 부분은 회반죽 자체를 다시 깎아 내고 새로 발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프레스코 화가는 매일 아침 자기가 그 날 그릴 한 부분 — 한 얼굴이나 한 손 — 을 미리 정확히 결정해야 했어요. 그 결정 단위를 〈조르나타(giornata)〉, 즉 〈하루의 일〉이라 불렀습니다. 한 채의 큰 프레스코는 약 200~400개의 조르나타로 나뉘어 그려졌어요. 한 사람의 화가가 한 작품을 1~2년에 걸쳐, 매일 아침 한 조르나타씩 천천히 완성했습니다.

지오토의 가장 큰 작업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약 38개의 큰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이 약 700개의 조르나타로 나뉘어 약 2년에 걸쳐 그려졌어요. 우리가 다음 부에서 만날 그 〈비탄(Lamentation)〉의 한 장면 —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그 한 장면 — 은 약 6일에 걸쳐 그려졌습니다. 마리아의 얼굴 한 개에 그가 쓴 시간이 약 8시간. 그 한 얼굴이 그 후 700년 동안 인류가 본 가장 슬픈 얼굴 중 하나가 되었어요.

기법프레스코 부오노
단위조르나타 (하루의 일)
한 큰 작업200~700 조르나타
한 얼굴약 8시간
한 얼굴에 그가 쓴 시간이 약 8시간 — 그 한 얼굴이 700년 동안 가장 슬픈 얼굴 중 하나가 되었어요.
11
A · 04 · 반 에이크 작업실
반 에이크의 플랑드르 작업실
15세기 반 에이크의 플랑드르 작업실 — 작은 나무 패널 위에 가는 붓으로 한 점씩 입히는 유화의 시작.
12
A · 04 · 유화 · 반 에이크의 발명

한 가지 새 기법이 유럽 전체를 바꾸다

15세기 초 알프스 북쪽의 한 작은 도시 〈브뤼주(Bruges)〉에서 한 명의 화가가 한 가지 결정적 발명을 합니다. 〈유화(oil paint)〉입니다.

그 화가의 이름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였어요. 그가 활동한 부르고뉴 공국의 도시 브뤼주는 그 시대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한자 동맹과 지중해 무역이 만나는 항구로, 베니스 다음으로 큰 무역 도시였어요. 그 도시의 후원으로 반 에이크가 한 가지 새 기법을 시도해 봅니다.

그 전까지 유럽 회화의 표준 기법은 〈템페라(tempera)〉였어요. 가는 안료 가루를 달걀 흰자에 풀어 만든 안료입니다. 빠르게 마르고 색이 또렷했지만, 한 가지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 색을 부드럽게 섞을 수가 없었어요. 한 색이 마르고 나면 그 위에 다른 색을 정확히 덮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템페라 그림은 색의 경계가 또렷한 〈선화에 가까운 그림〉이 되었어요.

반 에이크가 한 가지를 바꿉니다 — 안료를 달걀 대신 〈아마유(linseed oil)〉에 풀었어요. 아마유는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한 색이 마르기 전에 다음 색을 그 위에 부드럽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색의 그라데이션〉, 즉 〈한 색이 다른 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자리〉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사람의 피부, 옷의 주름, 거울 안의 작은 풍경 — 그 모든 것이 처음으로 〈빛 속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30년대 반 에이크의 유화가 알프스 북쪽에서 시작되어, 1450년대에는 이탈리아로 옮겨 가고, 1480년대에는 유럽 전체의 표준 기법이 됩니다. 그 후 약 500년 동안 유화가 서양 회화의 가장 큰 흐름이었어요.

발명자얀 반 에이크
시기1430년경 브뤼주
매체아마유 + 안료
표준 기간약 500년 (1430~1900)
한 화가의 한 가지 매체 변화가 — 그 후 500년의 서양 회화의 표준이 되었어요.
13
A · 05 · 원근법 시연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
1413년경 피렌체 광장에서 — 브루넬레스키가 한 장의 거울로 〈선 원근법〉을 처음 시연한 그 한 시간.
14
A · 05 · 선 원근법 · 1413년

한 장의 거울이 천 년의 그림을 바꾸다

1413년경 피렌체의 한 광장에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한 가지 시연을 했습니다. 그 시연이 그 후 500년 서양 회화의 거의 모든 그림 형식을 결정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한 장의 작은 나무 판자 위에 〈피렌체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을 정확하게 그렸어요. 그 판자 한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한 광장의 중앙에 서서, 그 판자를 자기 얼굴 앞에 들고, 그 작은 구멍에 한쪽 눈을 가져다 댔어요. 다른 한 손에는 거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거울에 비치는 그림이 — 자기가 직접 본 세례당과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한 광장의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3차원의 풍경을 2차원의 그림 위에 정확히 옮기는 한 가지 수학적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요.

그 방법이 〈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입니다. 한 가지 단순한 규칙으로 요약돼요 — 모든 평행선은 화면의 한 점(소실점, vanishing point)으로 모인다. 그 한 가지 규칙이 그 후 모든 화가에게 한 가지 새 도구를 줍니다. 〈한 화가가 한 그림을 그릴 때, 그 그림 안의 모든 공간을 자기 눈으로 본 그대로 정확히 옮길 수 있는 도구〉를요.

그 발명을 처음 그림에 적용한 사람이 1425년의 마사초였어요. 우리가 C4에서 만날 〈성 삼위일체(Trinità)〉의 배경에 그 새 원근법이 처음 사용됩니다. 그 한 그림 안에서 깊이가 수학적으로 정확해졌고, 그 후 모든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 형식을 따라가요. 브루넬레스키의 한 시연이 그 후 약 500년의 그림 형식 — 우리가 〈사실적 그림〉이라 부르는 모든 형식 — 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장의 거울이 천 년 동안의 그림을 바꾼 셈이에요. 그리고 그 형식은 20세기 초 세잔과 피카소가 깨뜨릴 때까지 약 500년 동안 흔들리지 않습니다.

발명자브루넬레스키
시기1413년경 피렌체
규칙모든 평행선 → 소실점
처음 적용1425 마사초 〈성 삼위일체〉
한 장의 거울이 천 년의 그림을 바꿨어요 — 그 후 500년 서양 회화의 거의 모든 형식이 그 한 시연에서 시작됩니다.
15
B
PART B · 5 PEOPLE · 이름이 다시 불린 사람들

이름이 다시 불린 사람들

중세 약 1,000년의 익명을 깨고 한 사람씩 이름이 다시 불리기 시작합니다. 지오토(화가), 브루넬레스키(건축가), 도나텔로(조각가), 반 에이크(유화 발명자), 그리고 한 가지 의문 — 왜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나.

한 사람씩 이름이 살아남기 시작한 자리.
16 · CHAPTER OPENER
16
PART B · 다섯 사람

초기 르네상스의 다섯 이름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B1

지오토 — 천 년 만에 다시 불린 첫 이름

1267 ~ 1337 · 화가 · P.18
B2

브루넬레스키 — 거대 돔과 원근법

1377 ~ 1446 · 건축가·발명가 · P.20
B3

도나텔로 — 청동 다비드를 만든 사람

1386 ~ 1466 · 조각가 · P.22
B4

반 에이크 — 유화의 발명자

1390 ~ 1441 · 플랑드르 화가 · P.24
B5

한 가지 의문 — 왜 피렌체였나

한 도시가 한 시대를 만든 다섯 가지 조건 · P.26
17
B · 01 · 지오토
지오토의 작업실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 — 14세기 초 피렌체의 한 양치기 소년 출신 화가. 〈서양 미술이 다시 인간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자리〉.
18
B · 01 · 지오토 · 1267 ~ 1337

한 양치기 소년이 한 시대를 시작하다

지오토는 1267년경 피렌체 근교의 한 양치기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약 1,000년 만에 〈서양 미술의 첫 이름〉이 됩니다.

한 가지 전설이 있어요. 어린 지오토가 양을 치고 있을 때, 그가 평평한 바위 위에 한 마리 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을 지나가던 한 화가 〈치마부에(Cimabue, 1240-1302)〉가 그 그림을 보고 한 가지 결정을 했어요. 〈이 아이를 내 작업실에 데려가야겠다.〉 그 한 결정이 미술사의 한 줄기를 만든 셈입니다. 치마부에 자신도 그 시대의 큰 화가였지만, 그는 〈자기 제자가 자기를 능가했다〉고 인정한 거의 첫 화가가 됩니다. 단테가 〈신곡 연옥편〉 11곡에서 그 일을 한 줄로 적었어요 — "치마부에는 회화를 지배한다고 믿었지만, 이제 지오토가 명성을 얻고, 치마부에의 명성은 흐려졌다." 한 사람의 화가 이름이 한 권의 책에 적힌 그 한 줄이 — 약 1,000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지오토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바꾼 것이 있어요. 〈사람의 얼굴을 인간의 얼굴로 다시 그리는 것〉입니다. 그 전 1,000년의 비잔틴 미술과 중세 미술의 인물들은 모두 평면적이고 무표정했어요. 신성한 인물을 그릴 때 〈그 인물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오토는 거꾸로 갔어요. 마리아의 슬픔을 한 어머니의 슬픔으로 그렸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렸습니다. 그 한 가지 결정이 그 후 700년의 모든 서양 회화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작업 세 가지가 — 1305년경의 〈스크로베니 예배당〉(파도바, 38개 프레스코), 1320년대의 〈산타 크로체 바르디 예배당〉(피렌체,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1320년대의 〈산타 크로체 페루치 예배당〉(세례자 요한과 복음서 요한)입니다. 모두 프레스코 연작이고, 모두 약 700년 동안 거의 그대로 살아남았어요. 1334년에는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설계를 맡았는데, 그가 1337년 세상을 떠난 후 다른 한 사람이 그 종탑을 완공합니다. 한 사람의 양치기 소년이 한 시대 전체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미술사에서 그렇게 또렷한 〈첫 이름〉이 다시 나오기까지 다른 1,000년이 더 걸리지는 않았어요.

생몰1267 ~ 1337
스승치마부에
대표 작업스크로베니 1305
설계피렌체 종탑 1334
"치마부에는 회화를 지배한다고 믿었지만, 이제 지오토가 명성을 얻었다." — 단테, 1320
19
B · 02 · 브루넬레스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 돔을 만든 한 사람의 건축가. 그리고 〈선 원근법〉의 발명자.
20
B · 02 · 브루넬레스키 · 1377 ~ 1446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발명하다

브루넬레스키는 한 명의 〈건축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건축가〉라는 직업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그는 한 명의 〈문제 해결자〉였습니다.

그는 1377년 피렌체에서 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금세공사로 훈련받았고, 그래서 정교한 손재주가 평생 그의 무기였습니다. 1401년 약 24세에 그는 한 가지 큰 시합에 참가합니다. 〈피렌체 세례당의 새 청동문 디자인〉을 정하는 시합이었어요. 그가 한 친구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와 함께 결승까지 갔지만, 그 시합은 기베르티가 이깁니다. 그 한 패배가 그를 다른 길로 보냈어요.

그는 친구이자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 두 사람이 1402년부터 약 10년 동안 로마의 옛 폐허를 직접 측정하고 스케치했어요. 그 시대 누구도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옛 로마 건축의 기둥, 아치, 비례,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판테온의 거대한 돔(직경 43m, 약 BC 27년)〉의 구조를 처음으로 공학적으로 분석한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이었어요. 1413년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가 한 광장에서 한 가지 시연을 합니다. 〈선 원근법〉을 처음 보여 준 것이지요. 우리가 A5에서 만난 그 시연이에요.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일은 한 가지 — 피렌체 대성당의 돔이었습니다. 1296년부터 짓기 시작한 그 성당은 1296년의 시점에서 〈본관은 짓되 돔은 어떻게 지을지는 나중에 결정한다〉는 한 가지 이상한 결정으로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1418년이 되어도 본관은 다 지어졌지만 돔만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직경 약 45미터의 그 거대한 구멍을 어떻게 덮을 것인가 — 약 100년 동안 누구도 답을 내지 못했어요. 1418년 한 시합에서 브루넬레스키가 한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 "안쪽 돔 + 바깥쪽 돔, 두 겹의 돔으로 짓되, 전통 거푸집(centering)을 쓰지 않고 〈물고기 가시(herringbone)〉 패턴의 벽돌 쌓기로 자기 자신을 받치게 한다." 이 답이 1420년부터 1436년까지 16년 만에 그 거대한 돔을 완공시킵니다. 한 사람이 한 도시의 한 시대를 다른 한 시대로 옮긴 그 한 작업 — 1436년 3월 25일의 그 봉헌식이, 르네상스의 가장 또렷한 한 시작점입니다.

생몰1377 ~ 1446
로마 연구1402~1412
원근법1413년
두오모 돔1420 ~ 1436
한 사람이 한 도시의 한 시대를 다른 한 시대로 옮겼어요 — 1436년 봉헌식의 그 한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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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3 · 도나텔로
도나텔로의 청동 주조소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 — 피렌체의 한 청동 주조소. 1430년경 청동 〈다비드〉의 밀랍 모형을 다듬는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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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3 · 도나텔로 · 1386 ~ 1466

천 년 만에 다시 벗은 사람

도나텔로는 한 명의 조각가였어요. 그러나 그가 한 가지 한 일이 미술사의 한 줄기를 결정합니다 — 〈사람의 몸을 다시 사람의 몸으로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도나텔로는 1386년 피렌체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은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도나텔로〉는 그의 친근한 별명입니다. 어려서 한 금세공사 작업실에서 일했고, 그 후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1402년부터 로마로 떠났어요. 우리가 B2에서 본 그 〈로마 폐허 측정 여행〉의 다른 한 사람이 도나텔로였습니다.

그가 약 1430~1440년 사이에 피렌체에서 한 점의 청동상을 만듭니다. 〈청동 다비드(David, 약 158cm)〉입니다. 그 작품 한 점이 미술사의 한 큰 줄기를 결정해요. 그것이 약 1,000년 만에 처음 만들어진 〈완전한 누드(nude)〉의 인물 조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호 그리스 편에서 본 5세기 BC의 폴리클레이토스 〈도뤼포로스〉 이후 약 1,800년 만에 — 한 인간의 몸이 옷에 가려지지 않은 채 정면으로 다시 그려진 셈이지요. 그 한 점이 1,000년 동안의 〈몸의 금기〉를 깨뜨렸어요.

왜 다비드였을까. 한 가지 정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거인 골리앗을 한 돌로 쓰러뜨린 한 양치기 소년이에요. 그 시대 피렌체는 정확히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 작은 공화정 도시국가 피렌체가, 거대한 밀라노 공국이나 나폴리 왕국 같은 〈골리앗〉들 사이에서 자기 독립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비드가 〈피렌체 그 자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도나텔로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그 청동 다비드를 만들었고, 그것이 메디치 가의 안뜰에 세워졌어요. 한 가문의 후원으로 한 도시의 정치적 자존심이 한 점의 조각으로 응축된 그 사례 — 르네상스가 〈한 사람의 후원자 + 한 사람의 예술가〉라는 새 형식으로 만들어진 한 시대였다는 사실이 이 한 점에 다 들어가 있어요. 도나텔로는 그 후 약 80세까지 작업을 이어갔고, 1466년 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한 가지 — 〈사람의 몸이 다시 사람의 몸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일이었어요.

생몰1386 ~ 1466
청동 다비드약 1430~1440
크기약 158 cm
후원메디치 가문
약 1,000년 만에 처음 만들어진 완전한 누드 인물 조각 — 한 점이 한 시대의 〈몸의 금기〉를 깨뜨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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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반 에이크
반 에이크의 작업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약 1390-1441) — 부르고뉴 공국 브뤼주의 궁정 화가. 한 새 매체로 〈빛 속의 인간〉을 처음 그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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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얀 반 에이크 · 약 1390 ~ 1441

알프스 북쪽의 다른 시작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어요. 알프스 북쪽의 한 작은 도시 브뤼주에서 다른 한 시작이 있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약 1390년 오늘날의 벨기에 마세이크(Maaseik)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형 후베르트(Hubert van Eyck)도 화가였고, 두 형제가 함께 작업한 작품이 있습니다 — 우리가 C5에서 만날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입니다. 후베르트가 1426년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얀이 그 작업을 1432년에 완공해요.

얀 반 에이크는 1425년부터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Philip the Good)〉의 궁정 화가가 됩니다. 그 시대 부르고뉴 공국은 오늘날의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일대에 걸친 거대한 영토였어요. 공작은 정치적 임무로 반 에이크를 여러 번 외국으로 보냅니다 — 스페인, 포르투갈 등. 한 화가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신뢰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시대 〈화가〉라는 직업의 위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었는지를 보여 줘요.

그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바꾼 것이 〈유화 기법〉입니다. 우리가 A4에서 본 그 변화 — 달걀 흰자 대신 아마유에 안료를 푸는 한 가지 단순한 변화 — 가 그의 작업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한 변화가 한 가지를 처음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빛이 어떻게 사람의 피부 위에서 빛나는지〉를 그대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Arnolfini Portrait, 1434)〉을 보면, 한 신부의 초록색 드레스의 빛, 한 거울의 안쪽에 비친 작은 풍경, 한 강아지 털 한 가닥씩까지 — 모두 한 화가의 한 시간씩으로 그려져 있어요. 그 그림 한 점에 그가 쓴 시간이 약 6개월. 한 가지 새 매체가 한 사람의 인내와 만났을 때, 〈한 점의 그림에 한 인간의 시간 전부〉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 그것이 반 에이크의 가장 깊은 가르침일지도 모릅니다.

생몰약 1390 ~ 1441
궁정부르고뉴 (선량공)
매체유화 (아마유)
대표작겐트 제단화 1432
한 점의 그림에 한 인간의 시간 전부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 반 에이크의 가장 깊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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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한 가지 의문
피렌체 풍경
피렌체 — 한 작은 도시. 인구 9만 명, 왕도 황제도 없는 공화정. 그러나 그곳에서 한 시대 전체가 시작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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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한 가지 의문

피렌체였나

14~15세기 유럽에는 피렌체보다 큰 도시들이 많이 있었어요. 베니스, 밀라노, 파리, 런던, 콘스탄티노플. 그런데 왜 르네상스는 그중 가장 작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역사학자들이 다섯 가지 조건을 자주 제시합니다. 첫째 〈정치 형식〉이에요. 피렌체는 그 시대 거의 유일한 〈공화정〉이었습니다. 한 도시의 시민들이 자기 대표를 직접 뽑는 그 형식이, 한 사람의 시민이 한 점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후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한 명의 왕이 모든 후원을 독점한 다른 도시들과 그 점이 달랐습니다.

둘째 〈경제 구조〉예요. 피렌체는 양모와 은행이라는 두 산업으로 부유했고, 그 부가 한 가족(왕가)이 아니라 약 50~100개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메디치, 페루치, 바르디, 스트로치, 피티 — 그 가문들이 서로 〈누가 가장 멋진 작품의 후원자가 되느냐〉를 두고 경쟁했어요. 그 경쟁이 한 사람의 화가에게 한 점의 작품을 주문하는 새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셋째 〈고전의 부활〉입니다. 피렌체는 1340년경부터 옛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을 자기 도시의 자존심으로 적극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했어요. 그 운동의 중심에 페트라르카(Petrarca, 1304-1374), 보카치오(Boccaccio, 1313-1375) 같은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넷째 〈한 사람의 후원자〉입니다. 1389년에 태어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약 30년 동안 피렌체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됩니다. 그가 〈한 사람의 후원자가 한 시대 전체를 어떻게 만드는가〉의 가장 또렷한 사례예요. 그가 후원한 사람들이 —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우첼로, 그리고 후의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 한 시대 전체의 명단입니다. 다섯째 〈규모〉예요. 피렌체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한 사람의 화가가 다른 한 사람의 화가를 거의 매일 만날 수 있는 도시였어요. 그 가까움이 〈경쟁〉과 〈영향〉의 가장 빠른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한 시대가 시작되려면 가장 큰 도시가 아니라, 가장 빠르게 흐를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피렌체가 그 시대 그런 도시였어요.

조건 1공화정
조건 2분산된 부
조건 3고전의 부활
조건 4코시모 데 메디치
한 시대가 시작되려면 가장 큰 도시가 아니라, 가장 빠르게 흐를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27
C
PART C · 5 WORKS · 남긴 다섯 점

한 점씩 가까이

1305년 파도바의 한 작은 예배당의 38개 프레스코, 1436년 피렌체의 거대한 돔, 1430년경의 청동 다비드, 1427년의 한 작은 프레스코, 그리고 1432년 겐트의 한 거대한 제단화. 초기 르네상스 150년의 다섯 점.

한 점을 천천히, 가까이.
28 · CHAPTER OPENER
28
PART C · 다섯 점

남긴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C1

지오토 〈비탄(Lamentation)〉

1305년경 · 스크로베니 예배당 · P.30
C2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두오모 돔〉

1420 ~ 1436 · P.32
C3

도나텔로 〈청동 다비드〉

약 1430~1440 · 158cm · P.34
C4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 · 산타 마리아 노벨라 · P.36
C5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1432 · 12개 패널 · P.38
29
C · 01 · 비탄
지오토 〈비탄〉
지오토 〈비탄(Lamentation, Compianto sul Cristo morto)〉, 1305년경. 프레스코, 약 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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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1 · 〈비탄〉 · 1305년경

한 어머니가 한 아들을 잃다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슬픔이 인간의 슬픔으로 그려진 자리〉가 어디인지 묻는다면, 많은 학자가 이 한 장면을 가리킵니다.

이 프레스코는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의 한 작은 예배당, 〈스크로베니 예배당(Cappella degli Scrovegni)〉의 안벽에 그려져 있어요. 그 예배당을 의뢰한 사람이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라는 한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시대 최악의 〈고리대금업자〉였고, 단테가 〈신곡 지옥편〉에서 직접 이름까지 적어 비난한 사람이었어요.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죄를 〈교회에 가장 비싼 작품을 의뢰함으로〉 씻으려 했던 것이 이 예배당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지오토는 1305년경 그 예배당의 안벽 전체에 38개의 프레스코를 그렸어요.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 마리아의 어린 시절,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그리스도의 탄생·생애·고난·부활까지의 거의 전체를 시간 순으로. 38개의 장면 중 한 장면이 이 〈비탄〉입니다.

이 한 장면이 미술사적으로 한 시대를 바꾼 까닭은 한 가지 — 모든 인물이 〈인간〉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죽은 아들의 얼굴을 자기 얼굴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어요. 그 한 동작이 그 전 1,000년의 비잔틴 미술에서는 절대 그려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신성한 마리아가 그렇게 〈한 어머니의 자세〉로 한 아들을 안는 일은 신성모독에 가까웠어요. 그러나 지오토는 거꾸로 갔습니다. 그 한 자세가 그 그림을 〈인간의 그림〉으로 만들었어요. 〈하늘의 천사들도 같이 운다〉 — 그 한 장면의 위쪽에 작은 천사들이 자기 옷을 찢으며 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천사들조차 〈사람처럼〉 우고 있습니다. 한 시대가 〈인간이 다시 인간이 된 자리〉가 — 이 한 장면 안에 있어요. 1305년의 그 한 봄, 그 작은 예배당 안에서 지오토가 약 6일에 걸쳐 그 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동안 — 미술사의 한 시대가 다른 한 시대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기1305년경
매체프레스코 (약 6일)
크기약 200×185 cm
장소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하늘의 천사들조차 〈사람처럼〉 울고 있어요 — 그 한 장면이 한 시대를 다른 시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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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두오모 돔
피렌체 두오모 돔
피렌체 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Santa Maria del Fiore) — 거대 돔, 직경 약 45m, 높이 약 116m. 1420~1436년 브루넬레스키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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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두오모 돔 · 1420 ~ 1436

로마 이후 1,300년의 첫 거대 돔

이 돔이 1436년에 봉헌되었을 때, 그것은 〈로마 판테온(BC 27년) 이후 1,300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거대 돔〉이었습니다. 한 도시의 한 시대가 그 한 채로 시작되었어요.

피렌체 대성당의 본관은 129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약 100년 후인 1380년대에 본관은 완성되었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었어요. 본관 한가운데의 직경 약 45미터의 거대한 구멍을 무엇으로 덮을 것인가. 그 시대 누구도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거푸집(centering)을 만들기에는 그 안쪽 공간이 너무 컸고, 거대한 구조물의 무게가 본관 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어요. 약 30년 동안 그 구멍 위에는 임시 천막만 덮여 있었습니다.

1418년 피렌체 시 정부가 한 가지 시합을 엽니다 — 〈누가 이 돔을 지을 수 있는가〉. 여러 기술자와 건축가가 답을 제시했어요. 한 사람은 〈돔 안쪽을 흙으로 가득 채운 뒤 그 위에 돔을 짓고, 완공 후 흙을 파내자〉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각 도시의 모든 동전을 그 흙 안에 섞어 넣자,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흙을 다 파낼 것이다〉라는 농담 같은 답을 했어요. 브루넬레스키가 한 가지 진지한 답을 제시합니다 — "두 겹의 돔 + 거푸집 없이 짓는 자체 지지 구조 + 물고기 가시(헤링본) 패턴의 벽돌 쌓기."

그 답이 1420년부터 1436년까지 16년에 걸쳐 실현됩니다. 약 400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어요. 안쪽 돔과 바깥쪽 돔 사이에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있고, 그 통로를 통해 노동자들이 매일 위로 올라가 한 단씩 돔을 쌓았습니다. 거푸집이 없었기 때문에, 돔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자기 자신의 무게를 자기 자신이 받쳐야 했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물고기 가시 패턴〉이었습니다. 한 단의 벽돌이 다음 단의 벽돌을 잡아 주는 그 구조가, 거대한 구조물이 천천히 자기 자신을 지을 수 있게 만들었어요. 1436년 3월 25일 — 〈수태고지 축일〉 — 에 그 돔이 봉헌되었습니다. 그날 피렌체의 거의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여 있었어요. 한 도시가 자기 손으로 한 시대 전체를 시작한 그 봄날이, 우리가 〈초기 르네상스의 가장 또렷한 봉헌식〉이라 부르는 그 한 순간입니다.

기간1420 ~ 1436 (16년)
직경약 45 m
높이약 116 m
벽돌약 400만 개
한 도시가 자기 손으로 한 시대를 시작한 봄날 — 1436년 3월 25일의 그 봉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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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청동 다비드
도나텔로 〈청동 다비드〉
도나텔로 〈청동 다비드(David)〉, 약 1430~1440년. 청동, 158cm.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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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청동 다비드 · 1430~1440

천 년 만에 다시 벗은 청동

158cm의 한 청동상. 그것이 약 1,000년 만에 처음 만들어진 〈완전한 누드의 인물 조각〉이었습니다.

이 청동상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학자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1430년경, 1440년경, 또는 그 사이의 어느 시점. 정확한 시기를 모르는 까닭은 한 가지 — 그 시대 이미 한 가지 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 폴리클레이토스 〈도뤼포로스〉(BC 5세기) 이후 약 1,800년 만에 만들어진 자유 입상의 누드 청동. 누구도 정확한 의뢰 기록을 남길 정도로 정상적인 작품이 아니었어요.

도나텔로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다른 쪽 다리는 가볍게 둔 균형 자세〉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한 시대 폴리클레이토스가 발명한 그 자세를 그대로 가져온 셈이지요. 한 손에는 거인을 죽인 칼, 다른 한 손에는 거인의 머리를 누른 발 — 다비드는 골리앗의 머리 위에 한쪽 발을 가볍게 얹고 있어요. 자기 승리를 자랑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약간 슬픈 자세입니다. 한 어린 양치기 소년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이, 이 작품을 단순한 영웅상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요.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다비드는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 모자가 〈월계관〉이 아니라 〈평민의 모자(berretto)〉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 다비드의 다리에는 〈가죽 부츠 또는 정강이 보호대〉가 그려져 있는데,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완전한 누드입니다. 그 결과 그 모습이 〈고대 영웅〉도 〈성경 인물〉도 아닌, 어딘가 〈한 동시대의 부드러운 청년〉처럼 보여요. 한 시대 다비드는 한 도시 피렌체의 정치적 자존심의 상징이었어요 — 거대한 골리앗(밀라노·나폴리·교황령)들 사이에서 자기 독립을 지키는 작은 공화정. 메디치 가의 안뜰에 세워졌던 이 청동상이 16세기 메디치 가가 추방되었을 때 시 정부에 압수되었고, 1865년에 바르젤로(Bargello) 국립미술관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가서 직접 보면 — 약 158cm. 우리 어른의 키와 거의 같아요. 그 한 사람의 키가 한 시대 전체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시기약 1430~1440
매체청동 주조
크기158 cm
소장바르젤로 (피렌체)
한 사람의 키가 한 시대 전체의 자존심이었어요 — 158cm의 한 청동이 1,000년의 금기를 깨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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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4 · 성 삼위일체
마사초 〈성 삼위일체〉
마사초 〈성 삼위일체(Trinità)〉, 1427년. 프레스코, 약 667×317cm.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36
C · 04 · 성 삼위일체 · 1427

한 그림에 처음 들어간 3차원 공간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27세에 세상을 떠난 한 짧은 생애의 화가였어요. 그러나 그가 1427년 그린 한 점의 프레스코가 그 후 500년 서양 회화의 모든 공간을 결정합니다.

마사초는 1401년 피렌체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톰마소 디 세르 조반니 디 시모네(Tommaso di Ser Giovanni di Simone). 〈마사초〉는 〈크고 거친 톰마소(big clumsy Tom)〉라는 친근한 별명입니다. 그가 어린 화가로 활동하던 1424년경 피렌체에서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나는데, 그 사람이 우리가 B2에서 만난 브루넬레스키였어요. 브루넬레스키가 자기 〈선 원근법〉을 한 어린 화가에게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1427년 한 점의 그림으로 결실을 맺어요.

그 그림이 〈성 삼위일체〉입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한 안벽에 그려진 약 667×317cm의 거대한 프레스코예요. 그림 한가운데에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 위에 성부, 그 사이에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있습니다. 양옆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 앞에는 이 그림을 의뢰한 한 부부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 인물들이 서 있는 공간 그 자체입니다.

그림 안에는 거대한 〈로마식 아치 천장〉이 그려져 있어요. 그 아치의 깊이가 — 보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깊이 — 가 이 그림에서 처음으로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졌습니다. 모든 평행선이 한 점(소실점)으로 모여 들어가는 그 한 가지 규칙이, 그림 안에 처음으로 진짜 3차원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한 그림 이후로 모든 르네상스 화가들이 자기 그림 안에 〈공간〉을 그려 넣게 됩니다. 평면적이던 한 채의 그림이 한 채의 작은 방으로 바뀌는 그 한 순간 — 이 한 점에서 시작되었어요. 마사초는 이 그림을 그린 다음 해 1428년 2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짧은 생애가 그렇게 큰 한 시대를 시작한 그 사례는,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시기1427년
크기약 667×317 cm
장소산타 마리아 노벨라
화가 생애1401 ~ 1428 (27년)
평면적이던 그림이 한 채의 작은 방으로 바뀐 그 한 순간 — 이 한 점에서 시작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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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5 · 겐트 제단화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후베르트·얀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어린 양의 경배, Ghent Altarpiece)〉, 1432년. 유화, 약 350×460cm (펼쳤을 때). 성 바보 대성당, 겐트.
38
C · 05 · 겐트 제단화 · 1432

12개의 패널에 들어간 한 시대

한 점의 제단화에 12개의 큰 패널이 있고, 그 12개에 약 25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점의 그림 안에 한 시대 전체가 들어 있는 그 사례.

이 제단화는 1432년 5월 6일 — 〈성 십자가 발견 축일〉 — 에 벨기에 겐트(Gent)의 성 바보 대성당(Sint-Baafskathedraal)에서 봉헌되었어요. 의뢰한 사람은 그 도시의 한 부유한 상인 요스 베이트(Joos Vijd)와 그의 아내였습니다. 후베르트 반 에이크가 1426년에 그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얀이 1430~1432년에 마무리했어요. 패널 뒷면에 라틴어로 그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 "후베르트가 시작했고, 동생 얀이 완성했다."

이 제단화는 〈펼쳤다 닫았다 할 수 있는 형식(triptych)〉이에요. 평일에는 안쪽이 닫혀 있어 바깥쪽 8개 패널만 보이고, 일요일과 축일에는 안쪽이 펼쳐져 12개 패널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 안쪽 가운데에 가장 큰 장면이 있어요 — 〈어린 양의 경배(Adoration of the Mystic Lamb)〉. 한 들판 한가운데에 한 마리 어린 양이 제단 위에 서 있고, 그 양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성배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 양 주위로 약 250명의 사도, 성인, 순교자, 동정녀, 천사, 그리고 예언자가 모여 있어요. 한 그림 한 채에 한 신학 전체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그 신학이 아니에요. 〈빛〉입니다. 그 250명의 인물 한 명 한 명의 옷, 보석, 머리카락, 그리고 그 들판의 풀, 꽃, 작은 새의 깃털 한 가닥씩까지 — 모두 한 색의 빛 속에 정확히 그려져 있어요. 그 정도로 정밀한 빛의 묘사는 그 시대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능성이 한 가지 — 〈유화(oil paint)〉라는 한 가지 새 매체 — 에서 왔어요. 우리가 A4와 B4에서 본 그 한 가지 매체 변화의 가장 위대한 첫 결정체가 이 한 점입니다. 1432년 봉헌된 이후로 약 600년 동안 약 13번 도난·전쟁·약탈을 겪었고, 그중 1934년에 한 패널이 도난되어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이에요. 그러나 나머지 11개 패널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겐트의 그 성당에 있습니다. 6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한 점 — 한 새 매체와 한 사람의 인내가 만났을 때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 주는 한 점입니다.

시기1432년
패널12개 (펼쳤을 때)
크기약 350×460 cm
소장성 바보 대성당 (겐트)
한 그림 한 채에 한 시대 전체가 들어 있어요 — 한 새 매체의 가장 위대한 첫 결정체.
39
D
PART D · 5 STORIES · 그들의 한 끼, 한 곡, 한 벌

초기 르네상스 사람의 일상

15세기 피렌체의 식탁, 템페라와 유화 도구, 부유한 상인의 옷, 한 궁정의 음악, 그리고 베니스의 르네상스 안료.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시대의 일상 안에 미술의 또 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40 · CHAPTER OPENER
40
PART D · 다섯 가지 잡학

초기 르네상스 사람의 일상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D1

15세기 피렌체의 식탁

한 상인 가문의 한 끼 · 포크의 시작 · P.42
D2

템페라와 유화 도구

달걀에서 아마유로 · P.44
D3

15세기 피렌체의 옷

파를루코 · 가무라 · 비단 · P.46
D4

한 궁정의 한 곡

기욤 뒤페이 · 모테트 · 폴리포니의 시작 · P.48
D5

베니스의 르네상스 안료

15세기 청금석·홍옥수·새 합성 안료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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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1 · 식탁
초기 르네상스 식탁
15세기 피렌체 상인 가문의 식탁 — 흰 빵, 토스카나 양고기 구이, 검은 후추, 사프란이 들어간 노란 리조토, 그리고 작은 베니스 유리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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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1 · 15세기 피렌체의 식탁

흰 빵이 식탁에 다시 오르다

15세기 피렌체 식탁의 가장 큰 변화가 한 가지 있었어요 — 〈흰 빵〉이 다시 보통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의 검은 통밀 빵이 트렌처(접시 대신 쓰던 빵)이었던 데 비해, 15세기 피렌체에서는 〈팡 비안코(pan bianco, 흰 빵)〉가 부유한 상인 가문의 식탁에 다시 일상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흰 빵을 만들려면 밀가루를 가는 체로 한 번 더 거르는 한 가지 추가 노동이 필요했어요.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도시가 그 시대 별로 없었는데, 피렌체는 그 시대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한 가지 — 〈사프란(saffron)〉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어요. 사프란은 한 송이 크로커스 꽃의 작은 빨간 암술 세 개에서 한 가닥씩 뽑는 한 가지 향신료입니다. 1kg의 사프란을 얻으려면 약 15만 송이의 꽃이 필요했어요. 그 시대 같은 무게의 황금 정도로 비쌌습니다. 그 비싼 사프란을 한 끼 식사에 한 줌 넣은 〈리조토 알라 밀라네제(risotto alla Milanese, 노란 리조토)〉 같은 음식이 부유한 상인의 식탁의 자랑이었어요.

가장 큰 변화는 한 가지 — 〈포크〉가 드디어 식탁에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호 D1에서 본 그 〈악마의 도구〉가, 15세기 베니스에서 일반 부유층의 식탁에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베니스의 상인들이 비잔틴과 무역하면서 가져온 그 도구를, 그 시대 〈고급 식탁의 한 가지 표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에는 약 50년 늦게 — 1500년경 — 들어왔어요. 한 가지 도구가 한 시대를 가로질러 한 도시에 자리 잡는 그 속도가 — 다시 한번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한 끼의 식사가 그 시대의 부와 그 시대의 무역과 그 시대의 미감을 동시에 담고 있는 자리 — 그것이 15세기 피렌체의 식탁이었어요.

흰 빵 (팡 비안코)
향신료사프란 (= 황금 가격)
포크 (베니스)약 1450
포크 (피렌체)약 1500
한 끼의 식사가 그 시대의 부와 무역과 미감을 동시에 담는 자리 — 15세기 피렌체의 식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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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템페라와 유화
템페라와 유화 도구
15세기 화가의 도구 — 작은 사발의 달걀 흰자(템페라), 작은 병의 아마유(유화), 안료 가루, 가는 다람쥐 털 붓, 나무 패널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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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매체의 변화

달걀에서 아마유

15세기의 가장 큰 매체 변화가 한 가지 있었어요. 그 변화가 그 후 500년 서양 회화의 거의 모든 그림 형식을 바꿉니다.

15세기 초까지의 표준 매체는 〈템페라(tempera)〉였습니다. 안료 가루를 달걀 흰자나 노른자에 풀어 만든 안료예요. 빠르게 마르고, 색이 또렷하고, 약 600년이 지나도 변색이 거의 없는 매우 안정적인 매체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한계 — 색을 부드럽게 섞을 수가 없었어요. 한 색이 약 30분 안에 마르기 때문에, 그 위에 다른 색을 얹으면 두 색의 경계가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그 결과 템페라 그림은 〈선이 또렷한 그림〉이 되었어요.

1430년대 반 에이크가 한 가지를 바꿉니다 — 안료를 달걀 대신 〈아마유(linseed oil)〉에 풀었어요. 아마유는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 보통 며칠 동안 — 한 색이 마르기 전에 다음 색을 그 위에 부드럽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처음으로 〈색의 그라데이션〉을 가능하게 했어요. 한 사람의 피부에서 〈빛이 들어오는 곳〉부터 〈그늘이 깊어지는 곳〉까지의 미세한 변화 — 그것이 처음으로 한 그림 위에 그려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화의 한 가지 더 큰 매력이 〈투명한 광택층(glaze)〉이었어요. 한 색을 두텁게 칠한 다음 그 위에 거의 투명한 다른 색의 얇은 층을 한 겹 더 올리면, 두 색이 〈광학적으로 섞여서〉 마치 보석 안의 깊은 색처럼 보였습니다. 그 효과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의 빨간 망토에서, 그리고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록 드레스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여요. 그 한 가지 매체 변화가 1430년 브뤼주에서 시작되어, 1450년대 이탈리아의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를 거쳐, 1480년대 베니스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에 이르러 유럽 전체의 표준이 됩니다. 다음 호에서 만날 〈고전기 르네상스〉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 한 새 매체 위에 그려졌어요.

템페라달걀 + 안료
유화아마유 + 안료
시작1430 반 에이크
유럽 표준1480년대
한 매체의 한 가지 변화가 빛이 사람의 피부 위에 어떻게 닿는지를 처음으로 그릴 수 있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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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옷
15세기 피렌체 옷
15세기 피렌체 부유한 상인의 옷 — 비단 가무라(여성), 두꺼운 양털 파를루코(남성), 가죽 벨트, 황금 핀, 그리고 천연 염색의 짙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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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15세기 피렌체의 옷

한 도시 옷이 곧 그 도시의 산업이었다

15세기 피렌체에서 옷은 단순한 일상품이 아니었어요. 그 도시의 가장 큰 산업이고, 그 도시의 가장 큰 자존심이었습니다.

피렌체의 양모 길드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그 시대 유럽에서 가장 큰 모직물 산업 중 하나였어요. 영국 본토에서 들어온 거친 양모를 피렌체의 약 200개의 작업장에서 정교한 모직물로 가공했습니다. 한 장의 모직물이 만들어지는 데에 약 30개의 손이 거치는 한 가지 분업 형식 — 〈빨래꾼·세팅꾼·실 잣는 사람·천 짜는 사람·염색공·재단사〉가 차례로 한 천에 자기 한 시간씩을 들이는 형식이었어요. 그 분업이 한 가지 매우 비싼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 〈피렌체 빨강(rosso fiorentino)〉이라 부른 깊은 빨간 모직물이었습니다.

가장 큰 옷의 종류가 두 가지였어요. 남성은 〈파를루코(parluco) 또는 두꺼운 양털 가운(lucco)〉을 입었습니다. 무릎 또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한 장의 두꺼운 옷으로, 그 위에 두꺼운 망토를 둘렀어요. 여성은 〈가무라(gamurra)〉라 부른 한 가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허리가 잡힌 형태에 긴 소매가 따로 묶여 있는 그 한 가지 디자인이었어요. 그 시대의 가장 비싼 옷 한 벌이 한 명의 평민이 5년을 일해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변화 — 1430년대부터 피렌체에서 〈사치 금지법〉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지난 호 D3에서 본 그 〈평민은 빨간색을 입을 수 없다〉는 법이, 부유한 상인 계층이 자기 옷의 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부〉가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새 형식이 그 도시에서 처음 만들어진 셈이지요. 그 형식이 약 100년 후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옷 한 벌이 한 시대 전체의 한 가지 변화를 보여 주는 자리 — 1430년대 피렌체였어요.

남성파를루코·루코
여성가무라
길드아르테 델라 라나
자랑피렌체 빨강 (rosso)
한 사람의 부가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새 형식이 — 1430년대 피렌체에서 처음 만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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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음악
15세기 이탈리아 궁정 음악
15세기 이탈리아 한 궁정의 음악 — 류트, 비올, 작은 오르간, 그리고 한 가수가 〈여러 줄의 멜로디〉를 동시에 부르는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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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폴리포니의 시작

한 줄에서 여러 줄

우리는 지난 호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단일 멜로디를 만났어요. 15세기에 한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 〈여러 줄의 멜로디가 동시에 흐르는 음악〉이 시작됩니다.

그 음악 형식이 〈폴리포니(polyphony)〉, 〈여러 소리〉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한 곡에 두 줄, 세 줄, 네 줄의 다른 멜로디가 동시에 흐르는 형식이에요. 그 시작은 12~13세기에 이미 있었지만, 15세기 부르고뉴 공국과 플랑드르의 한 작곡가들이 그 형식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가장 큰 이름이 기욤 뒤페이(Guillaume Du Fay, 약 1397-1474)예요.

뒤페이는 부르고뉴 궁정의 음악가였습니다. 1436년 — 우리가 C2에서 본 그 피렌체 두오모 돔의 봉헌식 — 에 그가 한 곡을 작곡했어요. 〈Nuper rosarum flores(장미꽃들)〉라는 제목의 한 모테트(motet)였습니다. 그 곡이 그 봉헌식에서 직접 연주되었어요. 그 곡의 음악적 비례가 — 4 : 6 : 2 : 3 — 정확히 그 돔의 건축적 비례와 같았습니다. 한 사람의 작곡가와 한 사람의 건축가가 한 가지 수학적 비례를 공유한 그 사례 — 르네상스가 〈수와 비례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그 한 곡 안에 들어 있어요.

15세기 폴리포니의 가장 큰 매력은 한 가지 — 〈모방(imitation)〉이었습니다. 한 줄의 멜로디가 시작되면, 약 4박 후에 다른 한 줄의 같은 멜로디가 다른 음높이로 시작되고, 또 4박 후에 세 번째 줄이, 네 번째 줄이 차례로 들어와 — 한 곡 안에 한 멜로디가 4번 다른 시점에 들어가는 그 형식이에요. 그 형식이 그 후 약 200년의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의 표준이 됩니다. 16세기 팔레스트리나, 17세기 바흐의 푸가까지 — 모두 15세기 부르고뉴 작곡가들의 그 한 가지 발명에서 옵니다. 한 도시의 음악과 한 도시의 그림이 같은 〈비례〉라는 한 가지 단어 위에서 만났던 1436년 — 그 봄날이 르네상스의 또 다른 한 가지 시작점이었어요.

형식폴리포니 (여러 소리)
대표 작곡가기욤 뒤페이
대표 곡Nuper rosarum flores 1436
기법모방 (imitation)
한 사람의 작곡가와 한 사람의 건축가가 〈비례〉라는 한 단어 위에서 만났어요 — 1436년의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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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베니스 안료
15세기 베니스 안료
15세기 베니스의 안료 — 청금석 가루, 홍옥수, 황금 잎, 그리고 그 시대 새로 합성되기 시작한 〈납백(lead white)〉, 〈베르밀리온(vermi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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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베니스의 새 안료

처음 만들어진 합성 안료

중세의 거의 모든 안료는 〈천연 광물〉에서 추출되었어요. 15세기 베니스에서 한 가지 새 흐름이 시작됩니다 — 사람의 손으로 만든 〈합성 안료〉의 시대.

중세 안료의 한 가지 큰 한계가 있었어요 — 모든 색이 〈자연 광물의 매장량〉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 한 광산에서만, 홍옥수는 인도양 일부에서만 — 한 자리에서 광물이 떨어지면 한 색이 사라졌습니다. 15세기 베니스의 한 길드가 한 가지 다른 길을 시도했어요. 화학적으로 색을 〈만들어 내는〉 길입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한 가지가 〈납백(piombo bianco, lead white)〉이에요. 납을 식초 증기에 노출시키면 그 표면에 흰색 가루가 쌓이는데, 그 가루가 가장 깨끗한 흰색 안료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의 흰색은 백악(chalk)에서 오는 약간 누런 흰색이었는데, 납백은 매우 순수한 흰색이었어요. 두 번째가 〈베르밀리온(vermilion, 주사 + 화학 처리)〉입니다. 천연 주사(cinnabar)에서 한 단계 더 처리해 만든 가장 깨끗한 빨간색이었어요. 세 번째가 〈가벼운 푸른색 〈스마트(smalt)〉〉. 코발트 산화물을 녹인 유리를 가루로 갈아 만든 푸른색이었습니다. 청금석보다 약 10분의 1 가격이었어요.

이 새 안료들이 15세기 후반 유럽 회화에 큰 변화를 만듭니다. 〈색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더 많은 화가들이 더 많은 색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시대 베니스의 안료 시장 〈리알토〉에서는 매일 약 200명의 거래상들이 모였습니다. 천연 안료뿐 아니라 새 합성 안료까지 모두 그 한 시장을 거쳤어요. 그래서 15~16세기 베니스 화가들 —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베로네세 — 의 그림이 다른 도시 화가들의 그림보다 색이 풍부해 보이는 까닭이 그것입니다. 그들이 그 시대 가장 빠르게 새 안료를 시도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음 호에서 만날 〈고전기 르네상스〉의 빛은 그 시대 베니스의 한 시장이 만든 빛이기도 합니다.

새 안료 1납백 (lead white)
새 안료 2베르밀리온
새 안료 3스마트 (smalt)
시장베니스 리알토 (200명)
색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더 많은 화가들이 더 많은 색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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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시대 연표

초기 르네상스 150년

피렌체 풍경

1267 지오토 출생

1296 피렌체 대성당 본관 착공

1302 단테, 피렌체에서 추방

1305 지오토,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 시작

1320년경 단테, 〈신곡〉 거의 완성

1334 지오토, 피렌체 종탑 설계

1337 지오토 사망

1377 브루넬레스키 출생

1386 도나텔로 출생

1389 코시모 데 메디치 출생

1390년경 얀 반 에이크 출생

1401 마사초 출생

1402 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 로마로 떠남

1413년경 브루넬레스키, 〈선 원근법〉 시연

1418 두오모 돔 시합 — 브루넬레스키 채택

1420 두오모 돔 공사 시작

1425 반 에이크, 부르고뉴 궁정 화가

1427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8 마사초 사망 (27세)

약 1430~1440 도나텔로 〈청동 다비드〉

1430년경 반 에이크, 〈유화〉 기법 확립

1432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봉헌

1434 코시모 데 메디치, 피렌체 사실상 통치 시작

1436.03.25 피렌체 두오모 돔 봉헌 (뒤페이 모테트 연주)

1441 얀 반 에이크 사망

1446 브루넬레스키 사망

1450년경 유화 기법, 이탈리아로 전파

1466 도나텔로 사망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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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핵심 일곱 점

이 호의 일곱 점

브루넬레스키

1. 지오토 〈스크로베니 비탄〉 1305 — 인간의 슬픔이 처음으로 인간의 슬픔으로 그려진 자리.

2.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 — 한 그림 안에 처음 들어간 수학적 3차원 공간.

3. 도나텔로 〈청동 다비드〉 약 1430~1440 — 1,000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누드 인물 청동.

4.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1432 — 유화의 가장 위대한 첫 결정체. 12개 패널, 약 250 인물.

5.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두오모 돔〉 1420~1436 — 로마 이후 1,300년의 첫 거대 돔.

6.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 1434 — 한 거울 안에 한 시대 전체가 들어간 그림.

7. 뒤페이 〈Nuper rosarum flores〉 1436 — 두오모 돔 봉헌식의 한 모테트. 음악과 건축의 같은 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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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PHON · 닫는 글

다섯 번째 호를 다 따라간 후

EDITORIAL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9월 1쇄

이 호의 4부

A 시대 풍경 5장면 · B 다시 불린 다섯 이름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도시 피렌체와 한 도시 브뤼주에서 한 시대가 시작된 약 150년.

주요 참고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바사리 〈예술가 열전〉 1550 · 마사초·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 동시대 기록 ·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라틴어 명문 · 우피치·바르젤로·산타 마리아 노벨라·산타 크로체·스크로베니 예배당·성 바보 대성당 디지털 컬렉션

이미지 출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NEXT ISSUE · Vol.06 예고
황금기 르네상스

1450년부터 1520년까지 약 7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 세 거장이 한 시대 안에서 동시에 활동한 인류 역사의 가장 드문 70년.

LUNA WHALE · ART HISTORY VOL.05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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