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부터 1520년까지 약 70년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세 거장이 한 시대 안에서 동시에 활동한 인류 역사의 가장 드문 7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여섯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1432년 봄 겐트 성당의 한 제단화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1436년 봄에는 피렌체 두오모 돔이 봉헌되고 있었어요. 〈한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1430년대 유럽의 두 도시에서 동시에 증명되고 있었지요. 그 한 시대의 다음 70년 — 1450년부터 1520년까지 — 이 우리가 〈고전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또는 〈황금기 르네상스〉라 부르는 시기입니다.
왜 〈황금기〉라 부를까요. 한 가지 단순한 사실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 — 이 세 거장이 한 시대 안에서 동시에 활동했다는 사실이지요. 인류 역사에서 그 세 사람과 같은 수준의 천재 세 명이 한 시대 한 도시 한 후원자 아래에서 동시에 작업한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이 호는 그 한 가지 드문 사례에 관한 한 권의 책입니다.
이 호의 두 도시가 〈피렌체〉와 〈로마〉예요. 1450~1490년대의 무게 중심은 피렌체였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1449-1492)〉의 후원 아래 보티첼리, 다 빈치, 그리고 어린 미켈란젤로가 작업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1492년 로렌초가 세상을 떠난 후, 1500년대의 무게 중심은 빠르게 〈로마〉로 옮겨 갑니다. 로마의 새 후원자가 한 사람의 교황 — 율리오 2세(Julius II, 1503-1513) — 였어요. 그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라파엘로에게 바티칸의 〈서명의 방〉을, 브라만테에게 새 성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동시에 의뢰합니다. 한 사람의 후원자가 한 시대 전체를 만든 또 한 사례가 1500년대 초의 바티칸이었어요.
가장 깊은 한 가지 변화가 있어요. 〈예술가의 위상〉입니다. 14세기의 지오토는 한 명의 〈장인(craftsman)〉이었어요. 1400년대의 도나텔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1500년대에 이르러,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한 명의 〈천재(genius)〉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화가가 왕이나 교황과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자기 작품에 자기 가격을 정할 수 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의뢰는 거절할 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1500년대에 처음 만들어집니다. 한 시대가 〈장인〉으로부터 〈예술가(artist)〉로 한 단어를 옮겨 간 그 변화가 이 호의 가장 깊은 한 줄기예요.
제1부는 다섯 풍경 — 새벽의 로마, 1515년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 현장, 1490년대 레오나르도의 작업실, 1510년 시스티나 천장, 1511년 바티칸의 라파엘로. 제2부는 다섯 사람 —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알브레히트 뒤러(북부 르네상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왜 세 거장이 동시에 살았나). 제3부는 다섯 점 —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피에타〉, 시스티나 〈아담의 창조〉,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1480년대 피렌체에서 1515년 로마까지, 70년의 다섯 풍경.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알브레히트 뒤러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피에타, 아담의 창조, 아테네 학당.
1500년대 로마 식탁, 유화 도구, 귀족 패션, 궁정 음악, 인체 비례 연구.
1480년대 후반 피렌체의 메디치 정원에서 1515년 봄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 공사 현장까지. 한 시대의 무게 중심이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 가던 7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의 무게가 어떻게 한 도시에서 다른 한 도시로 옮겨 갔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1500년대 초의 로마는 약 1,000년 동안의 〈잠〉에서 막 깨어나던 도시였어요. 그 도시가 그 후 약 100년 동안 유럽 미술의 중심이 됩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로마는 약 1,000년 동안 정치적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습니다. 비잔틴 시대(콘스탄티노플), 카롤링거 시대(아헨), 14세기 아비뇽 유수(프랑스 아비뇽) — 거의 모든 시대의 정치적 중심이 로마가 아닌 다른 도시였어요. 그러나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서방 분열〉이 끝나고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면서, 그 도시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1471년 시스토 4세(Sixtus IV)가 교황이 됩니다. 그가 로마에 한 가지 큰 그림을 그렸어요. 〈로마를 옛 로마처럼 다시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473년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을 짓기 시작했고, 1481년 그 안벽 전체에 보티첼리,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같은 그 시대의 가장 큰 화가들을 모셔 프레스코 연작을 그리게 했어요. 약 40년 후 그 같은 예배당의 천장에 한 사람이 4년에 걸쳐 천장화를 그리게 됩니다 — 미켈란젤로입니다.
1503년 그의 조카 율리오 2세(Julius II)가 다시 교황이 됩니다. 그가 더 큰 결정을 내렸어요. 1,200년 된 옛 성베드로 대성당을 헐고 새 성당을 짓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그 결정은 그 시대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매우 논쟁적이었어요.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에 지은 그 성당이 거의 무너지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통째로 헐고 새로 짓는 것은 〈한 시대의 자존심〉이 〈한 시대의 신앙〉보다 앞서는 일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오는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한 시대 전체를 〈로마〉라는 한 자리로 모여들게 만들었어요. 새 성베드로의 첫 돌이 1506년 4월 18일에 놓였고, 그 한 채의 건물이 약 120년에 걸쳐 약 7명의 건축가의 손을 거쳐 1626년에 완공됩니다.

새 성베드로 대성당은 한 사람이 지은 건물이 아니에요. 약 120년에 걸쳐 일곱 건축가의 손이 차례로 한 채를 지은 한 가지 사례입니다.
첫 번째 건축가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였어요. 율리오 2세가 1505년 그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깁니다. 브라만테의 첫 설계는 〈그리스 십자가(평등 십자가) 평면도 + 거대한 중앙 돔〉이었어요. 그 시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1506년 첫 돌이 놓인 그 자리가 그가 결정한 자리였어요.
그러나 1514년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나면서 공사가 한 차례 멈춥니다. 율리오 2세도 1513년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그 후 새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21)가 라파엘로에게 새 설계를 맡깁니다. 라파엘로는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긴 본관)〉로 바꿨어요. 그러나 라파엘로도 1520년 3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공사는 또 멈춥니다.
그 후 안토니오 다 상갈로, 발다사레 페루치 같은 건축가들이 차례로 설계를 수정했지만, 1547년 미켈란젤로가 72세에 새 건축가로 임명됩니다. 그가 평면을 다시 〈그리스 십자가 + 중앙 돔〉으로 되돌리고, 가장 큰 결정 — 거대한 〈성베드로 돔〉의 형태 — 을 직접 결정했어요. 그러나 그도 1564년 89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 돔은 그가 죽은 후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1590년에 완공합니다. 마지막에 카를로 마데르노가 본관을 라틴 십자가로 다시 늘렸고, 17세기 잔로렌초 베르니니가 광장을 둘러싼 거대한 회랑을 1657~1667년에 완성해요. 1506년 4월 18일의 첫 돌부터 1667년 베르니니의 마지막 회랑까지 — 약 161년에 걸친 한 채의 건물이 새 성베드로 대성당입니다. 한 시대 전체가 한 채에 들어 있는 셈이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업실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한 가지 사실에 놀랐을 거예요. 거기에는 〈그림 작업실〉이 따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동시에 거기 있었어요.
레오나르도는 1452년 피렌체 근교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4세에 피렌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작업실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어요. 베로키오는 그 시대 피렌체의 가장 큰 작업실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고,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같은 다른 화가들이 같은 작업실에서 함께 훈련받았습니다.
1482년 30세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납니다. 그곳 후원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일 모로 il Moro〉) 공작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한 통의 편지를 썼어요. 그 편지가 미술사에서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편지에 자기를 〈공학자, 군사 기술자, 건축가, 운하 설계자, 다리 설계자〉로 먼저 소개하고, 마지막에 한 줄로 〈저는 그림도 잘 그립니다〉라고 적었어요. 그 시대의 가장 큰 화가 중 한 사람이 자기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먼저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 그것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가 평생 채운 노트는 약 13,000장에 이릅니다. 해부학, 식물학, 수학, 물리학, 광학, 군사 기술, 비행 기계, 음악, 건축, 회화 —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손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어요. 그가 평생 완성한 그림은 약 15점 정도입니다. 그 시대 다른 화가들이 보통 평생 약 50~100점을 완성했던 데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예요. 그러나 그 15점 안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암굴의 성모〉, 〈성 안나와 성 모자〉 같은 작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에 그렇게 적은 수의 그림만을 완성했음에도 그 한 점씩이 그 후 500년의 미술의 표준이 된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그 일을 거절했습니다. 자기는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는 이유였어요. 그러나 율리오 2세가 강제로 그 일을 맡겼고, 그 거절이 그 후 약 4년 반의 한 천장이 됩니다.
1508년 5월,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당시 33세)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프레스코를 그리라고 명령했어요. 처음 계획은 단순했습니다 — 천장에 12사도를 그리는 정도.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그 계획을 거절하고 자기 계획을 제시했어요. 구약의 〈창세기〉 9개 큰 장면 + 12 예언자와 무녀 + 200명 이상의 인물 + 4명의 〈성서 영웅〉 — 모두 합쳐 약 343명의 인물을 한 천장에 그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업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첫째 〈자세〉. 약 21미터 높이의 천장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4년 반 동안 거의 매일 비계 위에서 머리를 뒤로 젖힌 자세로 천장을 향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자세 때문에 그의 목과 척추가 평생 손상되었어요. 그가 그 시기에 쓴 한 편의 시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내 턱이 자기 가슴에 닿고, 등은 굽고, 붓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얼굴을 적신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둘째 〈규모〉. 한 천장에 약 343명의 인물을 그리는 일은 그 시대 누구도 한 적이 없었어요. 미켈란젤로는 〈조수〉를 거의 쓰지 않고, 거의 모든 인물을 자기 손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약 460㎡의 면적, 약 4년 반의 시간, 약 일주일에 한 인물의 속도로 — 1512년 10월 31일 그 천장이 처음 공개됩니다. 율리오 2세를 비롯한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한 사람이 한 평생에 한 채의 가장 위대한 작품을 완성한 자리가 바로 거기였다는 것을요. 그 천장 한 채가 그 후 500년 동안 거의 모든 화가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라파엘로조차 시스티나 천장을 보고 자기 그림 형식을 바꿨어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의 같은 시기, 같은 바티칸의 다른 한 방에서 라파엘로가 같은 율리오 2세를 위해 다른 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1508년 율리오 2세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같은 해에, 라파엘로(당시 25세)에게는 자기 개인 서재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안벽 네 벽을 모두 프레스코로 채우라고 의뢰했습니다. 그 한 방에서 1509~1511년 약 2년에 걸쳐 라파엘로가 그린 4개 거대 프레스코가 — 〈성체 논쟁(신학)〉, 〈아테네 학당(철학)〉, 〈파르나소스(시)〉, 〈정의의 미덕(법)〉 — 그 시대 인간의 4가지 지식 영역을 각각 한 벽씩 차지하는 형식이었어요.
가장 유명한 한 점이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입니다. 한 거대한 고전 건축물 안에 약 50명의 옛 그리스 철학자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 가 모여 있는 그림이에요. 그 한 벽이 그 후 500년 동안 〈서양 철학의 시각적 정의〉가 됩니다. 우리가 다음 부 C5에서 천천히 만날 한 점이지요.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 아테네 학당 안의 거의 모든 철학자가 그 시대 라파엘로 주변의 실제 인물의 얼굴로 그려져 있어요. 한가운데 플라톤은 레오나르도의 얼굴이고, 그 옆 아리스토텔레스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얼굴이며, 앞쪽에서 글을 쓰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 뒤쪽 한구석에서 자기 자기 모자를 쓰고 정면을 보고 있는 한 청년이 라파엘로 자신입니다. 한 그림 한 채 안에 그 시대의 모든 천재가 함께 들어가 있는 셈이지요. 1500년대 초의 로마가 그렇게 작은 도시였다는 사실 — 한 화가가 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자리에 사는 다른 모든 천재의 얼굴을 그 안에 새길 수 있을 정도로 — 이 한 점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 — 세 거장이 한 시대 안에서 거의 동시에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알프스 북쪽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그 시대에 그렇게 많은 천재가 동시에 살았을까.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레오나르도가 평생 채운 노트가 약 13,000장에 이릅니다. 그 노트가 〈한 사람의 머리 안에 인류의 거의 모든 호기심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의 증거입니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 15일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한 공증인 피에로(Ser Piero)였고, 어머니는 카테리나(Caterina)라는 평민 여성이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평생 〈공증인〉이나 〈의사〉 같은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어요. 역설적으로, 그 한 가지 제약이 그를 〈한 가지 직업에 묶이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14세에 피렌체로 와서 베로키오의 작업실에 견습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그림, 조각, 청동 주조, 금세공, 건축 모형까지 모든 것을 동시에 배웠어요. 1472년 약 20세에 화가 길드에 등록되었지만, 그는 그 후로도 베로키오의 작업실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1482년 30세에 밀라노로 떠나, 그곳에서 약 17년 동안 활동해요. 그곳에서 〈최후의 만찬(1495~1498)〉, 〈암굴의 성모(1483~1486)〉, 〈비트루비우스 인간(약 1490)〉 같은 작품들이 만들어집니다.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공하면서 그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요. 그곳에서 1503년부터 약 4년에 걸쳐 한 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 〈모나리자(Mona Lisa)〉입니다. 그 그림을 그는 평생 자기 곁에 두었어요. 1516년 64세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앙부아즈 성으로 가, 그곳에서 1519년 5월 2일 6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모나리자〉가 있었어요. 그 그림이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한 점입니다. 한 사람의 천재의 호기심이 그렇게 깊으면, 한 점의 그림조차 16년에 걸쳐 그릴 수 있다는 사실 — 그것이 레오나르도의 가장 깊은 가르침일지도 모르겠어요.

미켈란젤로가 89세까지 산다는 사실은 한 가지 매우 드문 일이었어요. 그 시대의 평균 수명이 약 35세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89세에도 여전히 새 작품을 깎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토스카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한 석공 가족에 의해 키워졌습니다. 〈나는 어릴 때 망치와 끌 사이에서 자랐다〉라고 자기가 말한 적이 있어요. 13세에 피렌체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의 작업실에 들어갔고, 곧 메디치 정원의 조각 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어린 미켈란젤로의 가장 깊은 스승 — 옛 그리스 로마의 조각 — 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23세인 1498년 그가 첫 큰 걸작을 완성해요. 〈피에타(Pietà)〉입니다. 우리가 C3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약 2년 후 1501년에는 피렌체로 돌아와 4년에 걸쳐 5미터 높이의 〈다비드(David)〉를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깎아 냅니다. 그것이 1504년에 공개되고, 그가 한 사람의 〈천재 조각가〉로 인정받기 시작해요. 그러나 1508년 율리오 2세가 그를 〈화가〉로 강제로 끌고 갑니다. 시스티나 천장 4년 반의 시작이었어요.
그가 평생 〈자기 자신과 싸운〉 가장 큰 작업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율리오 2세 묘비(Tomb of Julius II)〉입니다. 1505년에 그 묘비를 의뢰받은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약 40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들어가는 거대한 묘비를 설계했어요. 그러나 율리오가 1513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새 교황 레오 10세가 그를 다른 일로 끌고 가면서, 그 묘비 작업은 평생 그를 따라다닙니다. 1505년 처음 의뢰부터 1545년 약 40년 만에 매우 축소된 형태로 마침내 완공된 그 묘비가, 그의 평생 가장 큰 미해결 과제였어요. 그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San Pietro in Vincoli)〉 성당에 마지막으로 그 묘비를 세웠을 때 그는 이미 70세였습니다. 그 후로도 약 20년을 더 살면서, 89세에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그는 매일 새 조각을 깎고 있었어요. 그가 마지막으로 깎고 있던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는 미완성으로 남아, 그 미완성이 오히려 그 작품의 가장 큰 깊이가 되었습니다.

라파엘로가 1520년 4월 6일 — 자기 37세 생일 — 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 로마 전체가 멈췄어요. 한 시대 전체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한 번 멈춘 사례.
라파엘로는 1483년 4월 6일 우르비노(Urbino)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도 한 화가였습니다. 어머니가 8세에, 아버지가 11세에 차례로 세상을 떠나,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화가 작업실은 계속 남아 있었고, 그가 그곳에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며 자랐습니다.
17세에 그는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Perugino)의 작업실에 들어갔어요. 페루지노는 그 시대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었고, 라파엘로는 약 4년 동안 그곳에서 훈련받았습니다. 1504년 21세에 피렌체로 와서, 그곳에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직접 보게 돼요. 그 두 거장의 작업이 그의 그림 형식을 결정합니다 — 다 빈치로부터 〈부드러운 빛과 그림자〉를, 미켈란젤로로부터 〈역동적인 인체〉를 배웠어요.
1508년 25세에 율리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옵니다. 우리가 A5에서 본 〈서명의 방〉이 그곳에서 1509~1511년에 완성됩니다. 그 후 그는 율리오 2세, 그리고 새 교황 레오 10세의 거의 모든 그림 의뢰를 받았어요. 한 사람이 한 도시의 거의 모든 큰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 사례는 그 시대 그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동시에 약 50명의 조수를 거느린 거대한 〈라파엘로 작업실〉을 운영했고, 1514년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새 성베드로 대성당의 두 번째 건축가까지 맡았어요.
1520년 4월 6일 — 자기 37세 생일이자 죽음의 날 — 에 그가 세상을 떠납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고열〉이라고 짧게만 기록되어 있어요. 그의 시신이 4월 7일 판테온 — 옛 로마의 거대한 신전 — 안에 안치됩니다. 그 한 시대의 한 사람이 그 한 도시의 가장 오래된 한 건물에 묻힌 그 한 가지 사실 — 그것이 라파엘로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그가 37세에 떠난 후, 한 시대가 한 번 멈췄어요. 그리고 그 후로 르네상스는 다른 시대 — 우리가 다음 호에서 만날 〈매너리즘〉 — 으로 옮겨 갑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만의 일이 아니었어요. 알프스 북쪽 독일의 한 화가가 같은 시기에 다른 한 황금기를 만듭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한 헝가리 출신 금세공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금세공 훈련을 받았는데, 그 정교한 손재주가 그의 평생 무기가 됩니다. 13세에 그린 자화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한 점이 〈역사상 가장 어린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어요.
1494년 23세에 뒤러는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합니다. 베니스에 약 1년 머물렀고, 그곳에서 조반니 벨리니, 안드레아 만테냐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직접 봤어요. 그 첫 방문이 그의 그림 형식을 완전히 바꿉니다. 알프스 북쪽에서 자란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 원근법〉, 〈인체 비례 연구〉, 〈고전 신화〉 같은 형식을 직접 흡수해 자기 그림에 적용했어요. 그가 한 일이 한 가지 —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알프스 북쪽으로 옮긴 일〉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판화〉입니다. 그가 1500년대에 그린 일련의 동판화·목판화가 — 〈멜렌콜리아 I(Melencolia I, 1514)〉, 〈기사·죽음·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 1513)〉,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His Study, 1514)〉 같은 —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어요. 그 시대까지 〈한 점의 작품〉이 한 도시 한 후원자에게만 속해 있었던 것에 비해, 뒤러의 판화는 처음으로 〈한 작품이 동시에 여러 사람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새 형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후 약 500년의 〈복제 가능한 미술〉의 출발점이 됩니다. 사진, 인쇄, 디지털 — 모두 뒤러의 1500년대 판화에서 시작된 한 가지 형식의 후예예요. 한 사람의 손이 알프스 북쪽에 〈르네상스〉를 옮기고, 동시에 〈복제 가능한 미술〉이라는 새 형식을 처음 만든 그 사례 — 그것이 뒤러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 그들의 생애가 1452년부터 1564년까지의 약 110년 안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한 시대의 천재가 동시에 살았던 사례는 거의 없어요.
몇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의 후원자〉. 율리오 2세 한 사람이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를 동시에 후원했고, 코시모와 로렌초 데 메디치가 보티첼리, 다 빈치, 어린 미켈란젤로를 동시에 후원했어요. 한 명의 후원자가 한 도시의 거의 모든 큰 천재를 동시에 자기 곁에 모은 그 한 가지 결정이 — 한 시대의 〈동시성〉을 만들었습니다.
둘째 〈한 도시의 작은 규모〉. 1500년 인구 약 10만 명의 피렌체와 약 5만 명의 로마. 그렇게 작은 도시에서 한 사람의 천재가 다른 한 사람의 천재를 거의 매일 만날 수 있었어요. 우리가 A5에서 본 〈아테네 학당〉의 모든 인물이 라파엘로 주변의 실제 인물의 얼굴이었던 것 — 그 한 가지 사실이 그 도시가 얼마나 작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째 〈경쟁〉. 1500년대 초의 로마는 거의 매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새 작품을 의뢰하는 도시였어요. 그 경쟁의 강도가 한 사람의 천재가 다른 한 사람의 천재를 끌어올리는 한 가지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1503년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두 벽에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경쟁이 — 그 두 사람을 모두 다음 단계로 끌어올린 한 사례예요.
넷째 〈고전의 폭〉. 1450년대부터 옛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이 거의 다 회복되었어요. 그 시대 한 사람의 천재가 〈자기가 무엇을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가 한 사람의 학문의 깊이를 한 단계 더 깊게 만들었어요. 다섯째 〈인쇄술〉. 145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된 후 약 50년 안에 — 1500년경 — 유럽 전역에 약 1,500만 권의 인쇄 책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가 한 사람의 천재가 다른 한 사람의 천재의 작업을 〈빠르게〉 알 수 있게 만들었어요. 한 시대가 한 시대를 만드는 모든 조건이 1500년경에 거의 동시에 모인 것 — 그것이 황금기 르네상스의 가장 큰 한 가지 답일지도 모릅니다.
레오나르도 〈모나리자〉(약 1503-1519), 〈최후의 만찬〉(1495-1498), 미켈란젤로 〈피에타〉(1499), 시스티나 〈아담의 창조〉(1512),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1511). 황금기 70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예수가 한 식탁 위에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한 그 한 순간 — 그 한 문장이 12사도의 얼굴 위에 흐르는 그 순간이, 이 그림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이 그림은 1495년부터 1498년까지 약 3년에 걸쳐 그려졌어요. 의뢰한 사람은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였고, 장소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수도원의 식당 안벽이었습니다. 매일 식사 시간에 그 한 그림 아래에서 수도사들이 자기 식사를 했어요. 한 그림이 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식사를 〈성스러운 한 시간〉으로 바꾸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한 가지 — 그 시대의 모든 〈최후의 만찬〉 그림이 한 가지 형식을 따르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가 그 형식을 완전히 깬 것입니다. 그 전까지의 모든 〈최후의 만찬〉은 12사도가 식탁 한쪽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 다른 한쪽에 따로 앉아 있는 형식이었어요.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12사도를 모두 식탁의 같은 쪽에 앉히되, 각각 3명씩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임처럼 그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 그가 그린 〈순간〉이 다른 시대의 어떤 〈최후의 만찬〉과도 달랐어요. 다른 그림들은 보통 〈성찬의 한 순간〉, 즉 그리스도가 빵을 들어 올리는 평온한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그린 한 순간은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한 문장이 막 떨어진 직후의 한 순간이었어요. 12명의 얼굴 한 명 한 명이 그 한 문장에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그 0.5초의 한 순간이 한 그림에 그려진 것이지요. 한 사도는 충격으로 두 손을 들고, 한 사도는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저인가요?〉를 묻고, 베드로는 칼을 잡고 있고, 유다만 한 손을 식탁 위로 떨어뜨리고 있어요. 한 그림 한 점이 한 식탁 위의 한 0.5초를 12개의 다른 인간 반응으로 그린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이 그림은 1980~1999년 약 20년에 걸친 복원 후에도 매우 손상된 상태이지만, 그 한 순간만은 여전히 그 안에 살아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23세에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깎은 한 점이, 그 후 500년 동안 〈가장 슬픈 어머니의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이 〈피에타〉는 1498년 미켈란젤로가 23세 때에 의뢰받은 작품이었어요. 의뢰한 사람은 프랑스 추기경 장 빌레르 드 라그롤라(Jean de Bilhères-Lagraulas)였고, 그가 자기 묘비에 놓을 한 점의 조각을 부탁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카라라(Carrara)의 대리석 산에서 한 거대한 흰 대리석 덩어리를 직접 골라, 약 1년 만에 그 한 점을 깎아 냈어요.
이 한 점이 한 시대를 바꾼 까닭이 한 가지 — 마리아의 얼굴입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피에타〉(이탈리아어로 〈자비/연민〉이라는 뜻)에서 마리아는 약 50대의 늙은 어머니로 그려졌어요.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를 자기 죽은 아들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약 20대의 젊은 여자로 깎았습니다. 그 결정에 대해 한 친구가 〈왜 마리아가 그렇게 어린가〉라고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의 대답이 한 줄로 남아 있어요 — "순결한 여자는 늙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깊은 의미는 다른 데에 있었어요. 마리아의 그 젊은 얼굴이 〈슬픔이 한 어머니를 늙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처음 안았던 그 첫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리아는 자기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동시에 자기가 처음 아기를 안았던 30년 전 베들레헴의 그 첫 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셈이에요. 한 시대의 슬픔이 한 시대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그 한 가지 자세 — 그 자세가 이 한 점을 한 시대 전체의 가장 깊은 한 점으로 만듭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자기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에요. 마리아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MICHEL · A[N]GELVS · BONAROTVS · FLORENT[INVS] ·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 한 줄이 그가 평생 자기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고, 그가 그것을 새긴 이유는 한 가지 — 〈누군가가 이 작품을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나서〉였다고 전해져요. 한 사람의 천재가 자기 작품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그 한 순간이, 〈예술가〉라는 단어의 새 정의가 시작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레오나르도가 1503년에 그리기 시작한 한 점의 작은 초상이, 그가 1519년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약 16년이 한 얼굴 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약 500년 동안 학자들의 논쟁이 있었어요. 가장 유력한 답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 1479-1542)〉라는 한 피렌체 상인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가 1503년에 자기 새집의 장식용으로 한 화가에게 자기 부인의 초상을 의뢰했고, 그 화가가 우연히 그 시대 가장 큰 화가 — 다 빈치 — 였어요. 〈모나(Mona)〉는 그 시대 〈마돈나(Madonna, 부인)〉의 줄임말이고, 〈리사〉가 그녀의 이름. 그래서 〈모나리자〉. 이탈리아어 다른 이름 〈라 조콘다(La Gioconda)〉는 그녀의 남편 성에서 온 〈조콘도 부인〉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 빈치는 그 그림을 의뢰한 사람에게 한 번도 전달하지 않았어요. 그는 그 한 점의 그림을 평생 자기 곁에 두었습니다. 1503년부터 151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약 16년 동안 그 그림은 항상 그의 작업실에 있었고, 그가 가는 모든 곳 — 피렌체, 로마, 마지막에 프랑스 앙부아즈 — 까지 그를 따라갔어요. 그가 죽은 후 그 그림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넘어갔고, 그 후 약 500년 동안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으로 남아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됩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스푸마토(sfumato)〉예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 흐려지다〉라는 뜻입니다. 한 색이 다른 색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 마치 연기가 공기로 흩어지는 것처럼 — 거의 사라지게 만드는 한 가지 기법이에요. 그 결과 모나리자의 입가, 눈가, 얼굴 윤곽 — 모든 경계선이 약간씩 흐려져 있습니다. 그 흐림이 한 가지 매우 이상한 효과를 만들어 내요. 우리가 그녀의 입가를 똑바로 보면 그녀가 웃지 않는 것 같지만, 다른 곳을 보면서 곁눈으로 그녀의 입가를 보면 그녀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미세한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다 빈치는 약 30개의 매우 얇은 광택층(glaze)을 한 얼굴 위에 차례로 입혔어요. 한 얼굴에 16년이 들어갔다는 것이 그렇게 가능했던 것입니다. 1911년 이 그림이 한 이탈리아 직공에 의해 도난당했고, 약 2년 후 1913년에 다시 발견되어 루브르로 돌아왔어요. 그 도난 사건이 〈모나리자〉를 그 후 100년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 점의 그림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한 장면이 시스티나 천장의 가장 한가운데에 있어요. 두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하지만 닿지 않는 그 약 2cm의 공간 안에, 인류의 모든 갈망이 들어 있습니다.
시스티나 천장의 9개 큰 〈창세기〉 장면 중 가장 유명한 한 장면이 이 〈아담의 창조〉입니다. 천장의 거의 한가운데에 있고, 미켈란젤로가 4년 반의 작업 중 약 1510년에 그렸어요. 한 장면 안에 두 인물 — 왼쪽에 아담, 오른쪽에 신 — 이 있고, 두 인물의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이 뻗어 있습니다.
이 장면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한 가지 — 그 두 손가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 2cm의 작은 공간이 두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어요. 그 시대까지의 거의 모든 종교화에서 신과 인간의 만남은 〈완성된 만남〉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만남을 〈영원히 닿을 듯 닿지 않는 만남〉으로 그렸어요. 그 한 가지 결정이 이 그림을 〈인간의 갈망〉의 가장 깊은 한 장면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신의 주위에 있는 〈붉은 천〉의 모양이, 1990년 한 미국 의사 프랭크 메슈버거(Frank Meshberger)가 발견한 것처럼, 정확히 〈인간의 뇌〉의 단면도 모양과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90년대에 약 6년 동안 직접 시신을 해부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일치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가 〈신이 아담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를 그 시대 의학의 가장 깊은 발견 — 〈뇌가 정신의 자리〉라는 것 — 으로 그린 셈입니다. 한 시대의 미술과 한 시대의 의학이 한 그림 한 점에서 만난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는 사례예요. 1980~1994년 약 14년에 걸친 복원이 끝난 후 이 한 장면이 처음 다시 공개되었을 때, 약 2cm의 그 공간이 그 후 500년 동안 인류가 가장 많이 본 그림 한 부분이 됩니다.

한 그림 한 채 안에 약 2,000년의 서양 철학이 다 들어가 있어요. 그 안의 한 사람씩의 얼굴이 그 시대 라파엘로 주변의 실제 천재들의 얼굴이고요.
이 프레스코는 1509~1511년 라파엘로가 26~28세 때에 바티칸 〈서명의 방〉의 한 안벽에 그린 한 점입니다. 그림 안의 거대한 고전 건축물 — 옛 로마식 거대 아치 천장 — 안에 약 50명의 옛 그리스 철학자가 모여 있어요. 한가운데에 두 인물이 있는데, 왼쪽이 플라톤이고 오른쪽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은 손가락을 위쪽 — 〈이데아의 세계〉 — 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쪽 — 〈현실의 세계〉 — 으로 펼치고 있어요. 그 한 가지 자세가 두 철학자의 가장 큰 차이를 한 그림 안에 담은 셈입니다.
그 외에도 모든 철학자가 정확한 자기 자세로 그려져 있어요. 왼쪽 앞에 푸른 옷을 입은 한 노인이 〈피타고라스〉인데, 그가 자기 노트에 기하학 도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른쪽 앞에 자기 컴퍼스로 한 도형을 그리고 있는 한 사람이 〈유클리드〉예요. 그림 한가운데 계단 위에 누워 있는 한 인물이 〈디오게네스〉이고, 앞쪽 한구석에서 탁자에 기대 글을 쓰고 있는 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한 가지 더 있어요 — 그 50명의 철학자 거의 모두가 라파엘로 주변 실제 인물의 얼굴로 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한가운데 플라톤은 레오나르도의 얼굴이에요. 라파엘로가 1500년대 초에 직접 본 다 빈치의 얼굴을 그 한 그림에 입힌 것이지요. 앞쪽에서 글을 쓰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입니다. 같은 시기 시스티나 천장에서 작업하던 그를 라파엘로가 직접 보고 그렸어요. 유클리드의 얼굴은 브라만테예요. 그리고 그림 오른쪽 한구석, 검은 모자를 쓰고 정면을 보고 있는 한 청년이 라파엘로 자기 자신입니다. 한 그림 한 채 안에 그 시대 로마의 모든 천재의 얼굴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지요. 우리가 1500년대 초의 로마가 어떤 도시였는지를 가장 또렷하게 알 수 있는 한 점 — 이 그림입니다.
1500년대 로마의 교황 식탁, 황금기의 유화 도구, 귀족의 패션, 궁정 음악, 그리고 〈인체 비례〉 연구.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4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이후, 1500년대 유럽 식탁에는 그 전에 없었던 새 식재료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설탕, 코코아, 토마토, 감자, 칠면조 — 모두 〈신대륙〉에서 왔어요.
1500년대 로마의 부유한 식탁의 가장 큰 변화가 한 가지 있었어요 — 〈설탕〉이 보통 사람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설탕은 동방에서 오는 매우 비싼 향신료의 하나였어요. 그러나 1500년대 초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이 시작되면서 설탕의 가격이 약 10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 시대 로마의 부유한 식탁에 〈설탕 조각상〉, 즉 설탕으로 만든 작은 동물·건물·인물 모양의 디저트가 자랑이 되었어요.
두 번째로 큰 변화가 〈파스타〉입니다. 파스타는 사실 13세기에도 있었지만, 1500년대에 들어 일반 가정의 식탁에 올라오는 한 가지 음식이 됩니다. 그 시대 가장 유명한 형태가 〈마케로니(maccheroni, 마카로니)〉였어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파스타에 〈토마토 소스〉를 넣는 것은 그 시대에는 없었어요. 토마토가 1530년대에 신대륙에서 처음 들어왔지만, 약 200년 동안 〈독초〉로 여겨졌습니다. 토마토 + 파스타의 조합은 1700년대 후반에야 나오는 것이었어요.
가장 큰 변화는 한 가지 — 〈은 식기〉의 보급입니다. 그 전까지 부유한 식탁에서도 식기는 거의 도자기나 나무, 또는 백랍(pewter)이었어요. 그러나 1500년대 초 신대륙의 페루·멕시코의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면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은의 양이 약 10배로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1500년대의 부유한 식탁에서는 거의 모든 식기 — 칼, 숟가락, 그리고 새로 보급되기 시작한 포크 — 가 은으로 만들어졌어요. 한 사람의 식기 한 세트의 가격이 그 시대 평민 한 사람의 1년 소득에 가까웠습니다. 한 끼의 식사가 한 시대의 항해와 한 시대의 광산과 한 시대의 미감을 동시에 담는 자리 — 그것이 1500년대 로마 교황의 식탁이었어요.

15세기 화가들이 나무 패널 위에 그림을 그렸다면, 1500년대에 새로운 표면이 등장합니다 — 천으로 짠 〈캔버스(canvas)〉입니다.
그 전까지 모든 그림의 표면은 〈나무 패널(panel)〉이었어요. 거의 모든 큰 작품 —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 모두 나무 위에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나무 패널에는 한 가지 큰 한계가 있었어요. 큰 그림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장의 큰 나무 판은 무게도 무겁고, 시간이 지나면 휘거나 갈라졌어요. 그래서 약 2미터 이상의 그림을 만들려면 여러 장의 패널을 이어붙여야 했고, 그 이음새가 약점이 되었습니다.
1500년대 베니스의 화가들이 한 가지를 시도했어요. 〈배의 돛에 사용되던 거친 천(canvas)〉을 그림의 표면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캔버스는 가볍고, 두루 말 수 있고, 거의 무한대의 크기로 만들 수 있었어요. 1500년대 후반 티치아노부터 거의 모든 화가가 캔버스를 표준 표면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그 후 500년의 〈큰 그림〉의 시대를 열었어요.
또 한 가지 — 〈팔레트(palette)〉가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 화가들은 작은 도자기 그릇이나 조개껍질에 안료를 한 가지씩 따로 풀어 사용했어요. 그러나 1500년대에 들어 한 화가가 한 손에 들고 동시에 여러 색을 사용할 수 있는 〈팔레트〉라는 한 가지 도구가 발명됩니다. 처음에는 사각형 나무판이었고, 1600년대에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동그란/타원형 형태로 발전했어요. 한 화가가 한 손으로 여러 색을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된 그 한 가지 변화가, 그 시대 화가들이 캔버스 위에서 더 자유롭게 색을 섞고 그라데이션을 만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한 시대 화가의 도구는 한 시대 화가의 그림 형식을 결정합니다 — 1500년대의 캔버스와 팔레트가 1500년대의 황금기 회화를 만들었어요.

1500년대 이탈리아의 옷차림은 그 전 시대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복잡해졌어요. 한 도시가 자기 옷차림을 한 가지 〈문화 자산〉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1500년대 남성 옷의 가장 큰 특징이 〈더블릿(doublet)〉이에요. 몸에 꼭 맞는 짧은 상의로, 안에 솜이나 양털을 채워 두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서코트(surcoat)〉라 부른 짧은 외투를 둘렀어요. 다리에는 〈호스(hose)〉라 부른 매우 꼭 맞는 양말 같은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시대 남성 옷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 〈호스의 색〉이었어요. 두 다리를 각각 다른 색으로 입는 〈미파르티(mi-parti)〉가 유행이었습니다. 한 다리는 빨강, 다른 한 다리는 노랑 — 그런 식이었어요.
여성 옷의 가장 큰 특징은 〈코르사주(corsage, 상의)〉와 〈키르틀(kirtle, 치마)〉의 분리였습니다. 그 전까지 한 장의 드레스로 입던 형식에서, 1500년대에는 위와 아래가 따로 분리된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위쪽 코르사주는 가슴이 드러나는 깊은 V자형 네크라인이 일반적이었고, 그 아래에는 매우 정교한 자수가 놓인 흰 셔츠 〈카미차(camicia)〉가 보이게 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 한 가지가 〈사치 금지법〉의 거의 완전한 사라짐이었어요. 1500년경 피렌체와 베니스에서는 한 사람의 부와 한 사람의 옷이 거의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한 자수 드레스 한 벌의 가격이 그 시대 평민 한 사람의 약 10년 소득에 해당했고, 한 가족의 결혼식에 들어가는 옷값만 그 시대 평균 가족의 약 20년 소득에 가까웠어요. 한 도시의 부유한 가문들이 〈누가 더 멋진 옷을 입는가〉를 두고 경쟁했고, 그 경쟁이 그 시대 옷차림을 한 단계 더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도시의 옷이 한 시대의 자존심이 된 그 사례 — 그것이 1500년대 이탈리아의 옷차림이었어요.

1500년경 유럽 음악에 한 사람의 거장이 있었어요. 우리가 지금 거의 모르는 그 한 사람의 이름이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입니다.
조스캥 데 프레(약 1450-1521)는 1500년경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였어요.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이 없지만, 부르고뉴 공국 일대(오늘날 벨기에 또는 프랑스 북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1480년대에 이탈리아로 와서 밀라노 스포르차 공작과 페라라 에스테 공작, 그리고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 합창단의 음악가로 차례로 활동했어요. 그 시대 한 음악가가 그렇게 유명해서 인쇄업자가 그 사람의 이름만 표지에 적어도 책이 잘 팔린 첫 사례가 조스캥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작곡한 곡이 약 350곡에 이릅니다. 미사 18곡, 모테트 약 100곡, 그리고 약 70곡의 세속 노래(샹송, chansons). 그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모방 다성음악(imitative polyphony)〉이에요. 우리가 지난 호 D4에서 본 뒤페이의 형식을 한 단계 더 정교하게 만든 것입니다. 한 곡 안의 4개 성부가 거의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흐르는 것처럼 들리게 만든 그 한 가지 형식이 그 후 약 100년의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의 표준이 되었어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조스캥은 〈말과 음악의 일치〉를 처음 진지하게 시도한 작곡가였습니다. 그 전까지의 음악은 가사와 멜로디가 거의 무관했어요. 그러나 조스캥은 한 가사의 한 단어 한 단어가 그 단어의 의미와 어울리는 멜로디로 그려지게 만들었습니다. 〈슬프다〉라는 단어에는 내려가는 멜로디를,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단어에는 올라가는 멜로디를. 그 한 가지 형식이 — 〈가사 그림(word painting)〉이라 부른 — 그 후 약 400년의 클래식 음악의 표준이 됩니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의 작곡가 토마스 모를리, 그리고 17세기 모테베르디·푸르셀·바흐까지 모두 조스캥의 그 한 가지 발명에서 옵니다. 한 시대의 거장이 한 시대 후의 거의 모든 거장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조스캥 데 프레입니다.

레오나르도가 1490년에 그린 한 장의 작은 잉크 드로잉이, 그 후 500년 동안 〈인간의 비례〉를 보여 주는 가장 유명한 한 그림이 됩니다.
이 한 장의 드로잉은 옛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 BC 1세기)의 한 책 〈건축 십서(De Architectura)〉의 한 줄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에요. 그 한 줄이 — "인간의 몸을 양팔과 양다리를 펼친 채로 그리면, 정확히 한 사각형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약간 움직이면, 정확히 한 원 안에도 들어간다."
그 한 줄을 그림으로 옮긴 시도는 그 시대 여러 화가가 했어요. 그러나 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습니다. 한 사람을 사각형에 맞추려면 원이 어긋나고, 원에 맞추려면 사각형이 어긋났어요. 레오나르도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 사각형의 중심과 원의 중심이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각형의 중심은 〈배꼽〉이 아니라 〈음부〉에, 원의 중심만 〈배꼽〉에 있어야 그 두 도형이 한 인체 안에 정확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한 가지 발견이 1500년대 인체 비례 연구의 표준이 됩니다.
이 드로잉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은 한 가지 더 있어요. 이 드로잉은 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한 가지 신학적·철학적 명제를 처음으로 시각적으로 증명한 한 점입니다. 그 시대 신학자들은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말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것을 〈인간의 몸 안에 우주의 가장 완벽한 두 도형 — 원과 사각형 — 이 동시에 들어 있다〉는 한 가지 시각적 사실로 증명한 셈이지요. 인간의 몸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주의 축소판〉이라는 그 한 가지 명제가 — 그 후 약 500년의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가장 깊은 한 가지 신념이 됩니다. 한 장의 작은 종이 위의 한 명의 누드 인물이 — 한 시대 전체의 가장 깊은 한 가지 명제를 담은 사례. 그것이 〈비트루비우스 인간〉이에요.

1450 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1452.04.15 레오나르도 다 빈치 출생 (빈치)
1471 시스토 4세 교황 / 알브레히트 뒤러 출생
1473 시스티나 예배당 시작
1475 미켈란젤로 출생 (카프레세)
1481 시스티나 안벽 프레스코 (보티첼리·페루지노)
1482 레오나르도, 밀라노로 떠남
1483 라파엘로 출생 (우르비노)
1492 콜럼버스의 첫 항해 / 로렌초 일 마니피코 사망
1495~1498 레오나르도 〈최후의 만찬〉 (밀라노)
1498~1499 미켈란젤로 〈피에타〉
1501~1504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3 율리오 2세 교황 즉위
약 1503 레오나르도, 〈모나리자〉 시작
1505 브라만테, 새 성베드로 설계 시작
1506.04.18 새 성베드로의 첫 돌
1508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 시작 / 라파엘로, 서명의 방 시작
1509~1511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2.10.31 시스티나 천장 공개
1513 율리오 2세 사망 / 레오 10세 즉위
1514 브라만테 사망 / 뒤러 〈멜렌콜리아 I〉
1516 레오나르도, 프랑스로 떠남
1519.05.02 레오나르도 사망 (앙부아즈)
1520.04.06 라파엘로 사망 (37세)
1521 조스캥 데 프레 사망
1527 〈로마 약탈(Sacco di Roma)〉 — 황금기의 끝
1528 알브레히트 뒤러 사망
1547 미켈란젤로, 새 성베드로의 새 건축가
1564 미켈란젤로 사망 (89세)

1. 레오나르도 〈최후의 만찬〉 1495~1498 — 한 식탁 위의 0.5초가 12개의 다른 인간 반응으로 그려진 사례.
2.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8~1499 — 23세가 한 시대 전체를 깎은 사례. 그가 평생 자기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
3.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 — 옆 그림. 5미터 높이의 한 덩어리 대리석에서 4년 만에.
4. 레오나르도 〈모나리자〉 1503~1519 — 한 얼굴에 16년이 들어간 한 점. 약 30개 광택층.
5.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 1508~1512 — 4년 반의 460㎡ 천장에 343명의 인물.
6.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 — 한 그림 한 채에 2,000년의 서양 철학과 그 시대 모든 천재의 얼굴.
7. 미켈란젤로 새 성베드로 돔 1547~1590 — 그가 89세에 결정한 형태가 그 후 1세기에 완공된 사례.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10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동시에 산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시대에 세 거장이 동시에 활동한 인류 역사의 가장 드문 70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바사리 〈예술가 열전〉 1550 · 마틴 켐프 〈Leonardo da Vinci: The Marvellous Works of Nature and Man〉 · 윌리엄 월리스 〈Michelangelo〉 · 우피치·바티칸 박물관·시스티나·루브르·산 피에트로·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1520년 라파엘로 사망 직후부터 1600년까지 약 80년. 황금기 르네상스의 〈완성〉을 깨뜨린 한 시대 — 매너리즘과 동시에 베네치아의 빛을 만든 티치아노·틴토레토·베로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