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 직후부터 1600년까지 약 80년 — 황금기 르네상스의 〈완성〉을 깨뜨리고, 베네치아의 〈빛과 색〉이 새 시대를 연 8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일곱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난 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1520년 4월 6일의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날 라파엘로가 37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한 시대 — 황금기 르네상스 — 가 한 번 멈췄어요. 그리고 1527년에는 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마 약탈(Sacco di Roma)〉이에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해, 약 8개월 동안 도시 전체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 한 사건이 황금기 르네상스의 〈완성된 자존심〉을 한 번에 깨뜨렸어요.
그 깨어진 자존심 위에서 새 미술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매너리즘(Mannerism)〉이라 부릅니다. 〈마니에라(maniera, 양식)〉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말이고,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양식〉이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양식만 남은 그림〉을 의미해요. 황금기의 〈완벽한 비례〉, 〈자연스러운 자세〉, 〈고전적 균형〉을 일부러 깨뜨리는 한 시대였습니다. 인물의 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자세는 비틀어지고, 색은 인공적이 되고, 공간은 어긋나는 — 그 모든 것이 매너리즘의 표시예요. 폰토르모, 파르미자니노, 그리고 후기 미켈란젤로 자신이 그 시대의 가장 또렷한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매너리즘이 이 호의 전부는 아닙니다. 같은 시기 알프스 남쪽의 한 도시 — 베네치아 — 에서 다른 한 미술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어요. 황금기 르네상스가 〈선(disegno)〉을 가장 중요시했다면, 베네치아의 새 미술은 〈색(colore)〉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티치아노(약 1488-1576), 틴토레토(1518-1594), 베로네세(1528-1588) — 이 세 명의 화가가 한 시대 베네치아를 만들었어요. 그들의 그림은 매너리즘처럼 어긋나지도 않고, 황금기처럼 완벽하지도 않은, 어떤 새 형식이었습니다. 한 점의 그림이 〈빛이 색 안에서 흐르는 한 풍경〉이 된 것이 베네치아 회화의 가장 깊은 한 줄기예요.
그리고 알프스 북쪽에서도 다른 한 흐름이 있었어요. 스페인 톨레도에서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한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와, 플랑드르의 〈농민의 시인〉 피터르 브뢰헐(1525-1569). 두 사람이 매우 다른 길을 갔지만, 모두 그 시대 매너리즘의 한 끝과 다른 한 끝을 보여 줍니다. 엘 그레코가 인물을 길게 늘리고 색을 강하게 만든 〈영적 매너리즘〉이라면, 브뢰헐은 농민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일상의 매너리즘〉이었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 — 새벽의 베네치아, 노을의 대운하, 티치아노의 작업실, 엘 그레코의 톨레도, 무라노 유리 공방. 제2부는 다섯 사람 —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 브뢰헐, 그리고 한 가지 의문(왜 황금기는 깨졌나). 제3부는 다섯 점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브뢰헐 〈농민의 결혼〉,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베네치아의 빛에서 톨레도의 어둠까지, 80년의 다섯 풍경.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 브뢰헐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우르비노의 비너스, 최후의 만찬,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농민의 결혼, 가나의 결혼식.
베네치아 식탁, 매너리즘 패션, 베네치아 안료, 산 마르코 음악, 알두스 인쇄소.
1530년대 베네치아 대운하의 새벽에서, 1590년대 톨레도의 폭풍 풍경까지. 한 시대의 무게가 〈로마〉에서 〈베네치아〉와 〈톨레도〉로 옮겨간 8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가 어떻게 한 도시에서 다른 여러 도시로 옮겨 갔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베네치아는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른 자리에 있어요. 약 118개의 작은 섬과 약 400개의 다리가 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물 위의 도시〉입니다.
1500년대의 베네치아는 인구 약 18만 명의 큰 도시였어요. 같은 시기 피렌체가 약 7만, 로마가 약 5만이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가장 큰 특징은 인구가 아니라 〈자리〉예요. 도시 전체가 한 호수 안에 떠 있고, 거의 모든 이동이 곤돌라(gondola)나 작은 배로 이루어지는 도시였습니다.
그 한 가지 자리가 베네치아의 미술을 결정했어요. 그 도시의 모든 화가가 매일 〈빛이 물 위에 어떻게 흩어지는가〉를 보고 있었어요. 노을 한 시간이 같은 건물 한 채를 다섯 가지 다른 색으로 비추는 그 풍경을, 그들은 매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 화가들의 그림은 처음부터 〈색〉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어요. 피렌체 화가들이 〈선(disegno)〉을 중요시했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colore)〉을 중요시했습니다. 그 한 가지 차이가 그 후 약 100년 동안 이탈리아 미술의 가장 큰 두 흐름 — 피렌체-로마 vs 베네치아 — 이 됩니다.
또 한 가지 — 베네치아의 자리가 그 도시를 매우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었어요. 베네치아는 그 시대 거의 유일한 〈공화정〉이었고, 외부 권력 —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 화가들은 다른 도시 화가들이 그릴 수 없는 주제까지 그릴 수 있었어요. 누드, 신화, 부유한 상인의 일상 — 그 모든 것이 베네치아에서는 자유로웠습니다. 우리가 다음 부 C1에서 만날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그 자유의 가장 또렷한 사례예요.

베네치아 노을의 한 시간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알아요. 같은 한 자리가 그 한 시간 안에 약 다섯 가지 다른 색으로 변합니다.
그 다섯 색이 그 시대 베네치아 화가들의 팔레트가 됩니다. 첫째 노을의 〈오렌지-황금〉, 둘째 살루테 성당 흰 대리석의 〈진주빛 핑크〉, 셋째 호수 표면의 〈푸르스름한 회색〉, 넷째 곤돌라의 〈검은 그림자〉, 다섯째 그 모든 색을 묶는 〈붉은 산 마르코 종탑〉. 티치아노의 그림 한 점을 가까이 보면 — 옆 페이지의 풍경과 정확히 같은 다섯 색이 그 한 점 안에 모두 들어 있어요.
이 도시의 빛이 만든 가장 큰 한 가지 발명이 〈공기 원근법(atmospheric perspective)〉입니다. 멀리 있는 물건이 점점 〈푸르스름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그 효과를, 베네치아 화가들이 처음으로 그림에 정확히 옮겼어요. 그 전 피렌체 화가들의 〈선 원근법〉이 〈공간의 수학적 깊이〉를 그렸다면, 베네치아의 〈공기 원근법〉은 〈공기 안의 빛의 깊이〉를 그렸습니다. 두 도시의 두 가지 다른 깊이의 그림이 — 그 후 500년의 거의 모든 풍경화의 두 가지 표준이 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베네치아의 노을이 가장 화려한 까닭이 〈공해〉라는 점이에요. 1500년대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에는 약 200개의 유리 공방이 있었고, 그 공방들이 매일 거대한 양의 연기를 호수 위로 날렸습니다. 그 연기 입자들이 노을빛을 산란시켜 베네치아의 노을을 다른 어떤 도시의 노을보다 화려하게 만든 것이지요. 한 도시의 〈빛〉이 한 도시의 〈산업〉의 부산물이기도 했던 그 사례 — 그것이 1500년대 베네치아의 노을입니다.

티치아노는 약 70세 이후로 자기 그림에서 점점 〈붓 자국〉이 거칠어졌어요. 그가 평생 가장 마지막 시기에는 손가락에 직접 안료를 묻혀 그림을 그렸습니다.
티치아노의 작업실은 베네치아 비리(Birri) 거리에 있었어요. 1530년대부터 1576년 그가 약 88세에 페스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 그가 작업한 자리였습니다. 그 작업실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가지 — 〈자연광이 들어오는 큰 창〉이었어요. 그 창문에서 들어오는 베네치아 호수의 반사광이 그의 모든 작품의 빛을 결정했습니다.
티치아노의 작업 방식은 그 시대 다른 화가들과 매우 달랐어요. 첫째 그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직접 그렸습니다. 미리 작은 스케치를 거의 만들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직접 구도를 결정해 가는 방식이었어요. 둘째 그는 한 그림을 약 1~2년에 걸쳐 매우 천천히 그렸습니다. 한 층을 그리고 약 6개월을 말리고, 그 위에 다시 한 층을 그리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약 10~20개의 광택층(glaze)이 한 그림 위에 차례로 쌓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한 가지 — 그의 약 70세 이후의 그림에서는 〈붓 자국〉이 점점 거칠어지고, 마지막에는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림들이 만들어집니다. 그 시대의 다른 화가들은 그 자국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의 표시로 여겼지만, 티치아노는 그것을 자기 양식으로 만들었어요. 그 결과 그의 후기 그림은 가까이서 보면 거의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정확한 인물과 공간이 떠올라 보이는 한 가지 새 형식이 되었습니다. 그 형식이 그 후 약 400년 동안 거의 모든 〈자유로운 붓터치〉의 시조가 돼요. 17세기 렘브란트, 19세기 들라크루아, 20세기 들 쿠닝 — 모두 1500년대 티치아노의 손가락에서 시작된 한 가지 흐름의 후예입니다.

엘 그레코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énikos Theotokópoulos).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별명이에요. 그가 스페인 톨레도에서 만든 한 시대.
엘 그레코는 1541년 베네치아 통치하의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비잔틴식 이콘 화가로 훈련받았고, 약 26세인 1567년 베네치아로 와서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 약 3년을 보냈어요. 그 후 1570년 로마로 가, 그곳에서 약 6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576년 — 그가 35세인 — 에 그는 한 결정을 내려요. 스페인 톨레도(Toledo)로 떠나는 결정이었습니다.
왜 톨레도였을까요. 그 시대 톨레도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새 수도 후보 중 하나였어요. 한 새 수도가 만들어지면 한 화가에게는 거대한 기회가 옵니다. 엘 그레코는 그 기회를 노렸지만, 결국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를 새 수도로 결정했고, 톨레도는 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엘 그레코는 그곳에 평생 남아, 1614년 73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8년 동안 톨레도에서 작업했어요.
그가 톨레도에서 만든 양식이 미술사에서 가장 독특한 한 양식입니다. 인물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고, 색은 인공적인 빨강·파랑·노랑이 되며, 공간은 어둠 속에서 조각조각 빛나는 한 양식이에요. 그 양식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들이 — 19세기 후반의 세잔, 20세기 초의 피카소 — 였습니다. 피카소는 자기 〈청색 시대〉가 엘 그레코의 후기 그림에서 직접 왔다고 인정했어요. 한 시대의 가장 〈변두리에서〉 작업한 한 화가가, 그 후 300년의 미술의 한 줄기를 만든 그 사례 — 그것이 엘 그레코입니다.

우리가 5호에서 보았듯, 베네치아 정부는 1291년 모든 유리 공방을 무라노 섬으로 옮겼어요. 약 300년 후인 1500년대 후반, 그 작은 섬이 한 가지 새로운 발명을 합니다.
1500년대 후반 무라노에는 약 200개의 유리 공방이 있었고, 약 3,000명의 유리 장인이 일하고 있었어요. 그 시대 베네치아 인구의 약 2%가 유리 산업과 직접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1500년경 한 가지 새 발명을 했는데, 그것이 한 시대의 미술과 가구와 옷차림 모두를 바꿨어요. 〈크리스털 유리(cristallo)〉입니다.
그 전까지의 유리는 약간 푸르스름하거나 노르스름한 색이었어요. 모래 안에 들어 있는 철 산화물 때문이었습니다. 무라노 장인들이 한 가지를 발견했어요. 모래에 〈망간 산화물(manganese oxide)〉을 약간 섞으면 철의 색이 거의 사라져 〈수정처럼 투명한 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1500년대 후반의 베네치아 〈크리스털〉 유리잔이 그 시대 유럽 모든 부유한 식탁의 자랑이 되었어요. 한 잔의 가격이 그 시대 평민 한 사람의 약 1년 소득에 해당했습니다.
두 번째 발명이 〈거울(specchio)〉이었어요. 1500년대 중엽 무라노 장인들이 평평한 유리 뒷면에 주석과 수은을 섞은 얇은 합금을 입히는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그 결과 처음으로 〈완전히 평평하고 깨끗한〉 거울이 만들어졌어요. 그 전까지의 거울은 모두 청동을 광택 처리한 것으로, 약간 어두운 반사만 보였습니다. 무라노의 새 거울은 한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 주는 첫 거울이었어요. 그 한 가지 발명이 1500년대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약 100년 동안 유럽 전체의 자화상 회화의 황금기를 만들었습니다. 한 화가가 자기 자신을 그릴 수 있게 된 그 한 가지 가능성이 — 무라노의 한 작은 섬에서 나왔어요.
티치아노(약 1488-1576), 틴토레토(1518-1594), 엘 그레코(1541-1614), 그리고 알프스 북쪽의 피터르 브뢰헐(1525-1569). 황금기의 〈완성〉을 한 명씩 다른 방향으로 깨뜨린 네 사람.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완성은 깨졌나.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티치아노가 약 88세까지 산 것은 그 시대 매우 드문 일이었어요. 그 88년 동안 그가 그린 그림이 약 600점에 이릅니다.
티치아노는 약 1488~1490년경 베네치아 북쪽 알프스 산자락의 작은 마을 피에베 디 카도레(Pieve di Cadore)에서 태어났어요. 정확한 생년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릅니다. 약 9세에 베네치아의 한 화가 작업실에 견습으로 들어갔고, 그 후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가장 큰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와 그의 제자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의 작업실에서 차례로 훈련받았어요.
1510년 그가 22세였을 때 한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의 스승 조르조네가 32세에 페스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1516년 조반니 벨리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티치아노가 28세에 베네치아 회화의 가장 큰 자리에 올라옵니다. 그 후 약 60년 동안 그는 거의 모든 베네치아 큰 의뢰를 독점했어요. 동시에 그가 받은 외부 의뢰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스페인 펠리페 2세, 교황 바오로 3세 — 그 시대 가장 큰 권력자들로부터 왔습니다.
그의 평생 가장 큰 후원자가 카를 5세 황제였어요. 황제가 1533년에 티치아노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한 화가가 한 황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첫 사례였어요. 그 시대까지 화가는 〈장인〉이고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그 한 가지 룰을 깬 거예요. 그 후로 약 200년 동안 거의 모든 큰 화가가 비슷한 작위를 받게 됩니다. 1576년 8월 27일 티치아노가 약 88세에 페스트로 세상을 떠납니다. 같은 해 베네치아 인구의 약 1/3이 페스트로 사망했어요. 그러나 베네치아 정부는 그를 위해 한 가지 특별한 결정을 내려,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된 일반 묘지 규정을 무시하고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Santa Maria dei Frari) 성당 안에 안치했습니다. 한 화가의 마지막 자리가 한 도시의 가장 큰 성당의 안쪽이었던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틴토레토는 작업의 속도가 그 시대의 누구보다 빨랐어요. 그는 한 점의 거대한 그림을 약 1주일에 완성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야코포 틴토레토의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였어요. 〈틴토레토〉는 〈작은 염색공〉이라는 뜻인데, 그의 아버지가 〈티네르(tintore, 염색공)〉였기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그는 151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고, 평생 베네치아를 거의 떠나지 않았어요. 잠시 티치아노의 작업실에 견습으로 들어갔지만, 약 10일 만에 〈쫓겨났다〉고 전해집니다. 티치아노가 그의 재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많아요.
그 후 틴토레토는 거의 독학으로 자기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업실 벽에 한 줄이 적혀 있었어요 — "미켈란젤로의 데생, 티치아노의 색(Disegno di Michelangelo, colore di Tiziano)." 그 두 가지를 결합하겠다는 것이 그의 평생 목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역동적인 인체〉(미켈란젤로)와 〈베네치아 색〉(티치아노)을 한 그림 안에 결합했고, 그 결합이 그의 가장 큰 양식이 됩니다.
그의 가장 큰 작업이 베네치아 〈산 로코 신도회 회관(Scuola Grande di San Rocco)〉의 안벽 전체에 약 60점의 거대한 프레스코와 캔버스를 그린 것이에요. 1564년부터 1587년까지 약 23년에 걸쳐 그린 그 한 채의 건물 안에, 그의 평생 가장 큰 작업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그가 1564년 그 의뢰를 받기 위해 한 시합에 참가했을 때, 다른 화가들이 모두 〈스케치〉를 제출했는데, 틴토레토만 〈완성된 한 점의 그림〉을 제출했어요. 다른 화가들이 약 1주일 안에 그릴 수 없는 일을 그가 1주일 만에 해 낸 것이지요. 그 한 가지 사실이 그를 〈가장 빠른 붓〉이라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1594년 그가 76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그린 그림이 약 1,000점이 넘습니다. 한 사람의 화가가 평생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린 사례 — 미술사에 거의 없어요.

엘 그레코는 한 평생에 〈비잔틴 이콘〉, 〈베네치아 색〉, 〈매너리즘 자세〉라는 매우 다른 세 가지 양식을 모두 흡수해, 한 가지 새 양식을 만들었어요.
그가 어릴 때 크레타에서 받은 훈련은 〈비잔틴 이콘〉이었어요. 평면적이고, 황금 배경에, 인물이 길게 늘어진 그 형식이 그의 평생 그림의 한 줄기가 됩니다. 26세에 그가 베네치아로 와서 티치아노 작업실에서 약 3년을 보내요. 그곳에서 〈베네치아의 색〉을 배웠습니다. 그 후 1570년 로마로 가, 그곳에서 약 6년 동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후기 매너리즘 — 길게 늘어진 인체, 비틀어진 자세 — 을 직접 봤어요. 그 세 가지가 한 사람의 손에서 결합되었습니다.
1576년 그가 35세에 스페인 톨레도로 떠납니다. 왜 그곳이었을까. 그 시대 로마에서 그가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고 전해져요. 한 사람의 추기경 앞에서 〈만약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을 다 지우면, 내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가 로마 미술계에서 그의 자리를 거의 지웠고, 그가 다른 자리를 찾아 떠나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었어요. 톨레도는 그가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변두리〉였습니다.
그가 톨레도에서 만든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 한 가지 — 〈인물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의 후기 그림에서 한 사람의 몸은 보통 인체 비례의 약 8등신이 아니라 약 10~12등신으로 그려졌어요. 머리는 작고, 목은 길고,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옷은 길게 흐릅니다. 그 결과 모든 인물이 〈영적인 황홀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의 그림이 다른 어떤 매너리즘 화가보다 강한 영적 느낌을 주는 까닭이 그 한 가지 형식 때문입니다. 1614년 그가 73세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그림은 약 300년 동안 거의 잊혀졌습니다. 1900년경 세잔과 피카소가 그를 〈재발견〉하면서, 그가 다시 미술사의 가장 큰 한 사람이 됩니다.

브뢰헐은 그 시대 누구도 그리지 않은 주제를 그렸어요. 농민의 결혼식, 농민의 식사, 농민의 춤, 농민의 사냥. 그 시대 〈낮은 사람들의 일상〉이 처음으로 큰 그림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피터르 브뢰헐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어요. 약 1525~1530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그는 플랑드르(오늘날 벨기에·네덜란드 일대)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고,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화가로 훈련받았어요. 1551년경 약 25세에 그가 한 가지 큰 여행을 떠납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가서 약 2년에 걸쳐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까지 여행했어요. 그 여행이 그의 그림에 한 가지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 알프스 산맥의 거대한 풍경이 그 후 그의 그림 안에 늘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한 것이, 그가 〈주제〉를 바꾼 것이에요. 그 시대 모든 큰 그림은 〈종교〉나 〈신화〉나 〈귀족 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뢰헐은 그 모든 것을 떠나, 플랑드르 농민의 일상을 큰 그림의 주제로 가져왔어요. 〈농민의 결혼식(1567)〉, 〈농민의 춤(1568)〉, 〈눈 속의 사냥꾼(1565)〉 같은 작품들이 그 새 주제의 가장 또렷한 사례입니다. 농민이 한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 시대 거의 처음이었어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브뢰헐의 그림 거의 모두에는 〈숨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눈먼 사람들의 우화(1568)〉라는 그림에서, 한 명의 눈먼 사람이 다른 한 명의 눈먼 사람을 따라 같이 구덩이에 떨어지고 있어요. 그 한 그림이 그 시대의 종교 분쟁(가톨릭 vs 프로테스탄트)의 〈우화〉이기도 했습니다. 〈농민의 결혼식〉도 단순한 결혼식 풍경이 아니라, 한 사회의 신분 구조와 부의 분배에 관한 한 가지 미묘한 비평이에요. 그가 1569년 약 44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그림은 약 200년 동안 거의 잊혀졌습니다. 19세기 후반에 그가 〈재발견〉되었고, 그 후 〈농민 미술의 시조〉, 〈일상 미술의 시조〉, 〈풍경화의 시조〉 — 한 사람이 그렇게 여러 시조가 된 사례가 미술사에 거의 없어요.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이 황금기 르네상스의 끝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은 말해요. 그러나 왜 그렇게 완벽한 양식이 갑자기 깨져야 했을까요.
다섯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 사건〉이에요. 1527년 〈로마 약탈(Sacco di Roma)〉이 일어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해 약 8개월 동안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약 1만 명의 시민을 학살했어요. 그 한 사건이 〈로마는 영원하다〉는 황금기의 자존심을 한 번에 깨뜨렸습니다.
둘째 〈종교 분열〉이에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조항을 발표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약 50년 동안 유럽이 가톨릭 vs 프로테스탄트로 분열되고, 종교 전쟁이 거듭됩니다. 그 분열이 그 시대 모든 미술의 〈확신〉을 흔들었어요.
셋째 〈완벽함의 한계〉입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만들어 낸 황금기의 완벽한 양식 — 〈이상적인 비례〉, 〈자연스러운 자세〉, 〈고전적 균형〉 — 은 사실 그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 한 가지 큰 위협이었어요. 〈우리는 이미 완벽함에 도달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 시대 모든 젊은 화가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이 〈완벽함을 일부러 깨뜨리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매너리즘의 출발입니다.
넷째 〈새 후원자〉예요. 황금기의 후원이 〈교황 + 메디치 + 카를 5세〉라는 약 3~4명의 큰 후원자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1530년대 이후로는 후원이 훨씬 더 분산됩니다.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들, 프랑스 궁정, 스페인 궁정, 작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군주들 — 더 작고 더 다양한 후원자들이 더 작고 더 다양한 그림을 의뢰했어요. 다섯째 〈상업의 변화〉입니다. 1500년대 후반 신대륙의 은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그 시대 부의 구조가 매우 바뀌었습니다. 한 그림의 가격, 한 화가의 수입, 한 작품의 시장 — 모든 것이 변했어요. 한 시대가 한 시대로 옮겨가는 모든 조건이 1520~1530년대에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 — 그것이 매너리즘이라는 한 시대의 가장 큰 답입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1594),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 브뢰헐 〈농민의 결혼〉(1567),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1563). 매너리즘과 베네치아 80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이 한 점이 그 후 약 400년 동안 〈누드 회화〉의 표준이 됩니다. 그 시대까지의 누드와는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달랐어요.
이 그림은 1538년 우르비노 공작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Guidobaldo della Rovere)가 새 신부를 위한 결혼 선물로 티치아노에게 의뢰한 그림이었습니다.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일부 학자는 우르비노 공작의 실제 새 신부 줄리아 다 바라노(Giulia Varano)였을 가능성을 제시해요.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그 시대까지의 모든 누드와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어요. 그 전 누드들 —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 모두에서 누드의 여인은 〈먼 신화의 인물〉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옷의 일부로 가려져 있거나 — 모두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자세였어요. 그러나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직접 관객을 보고 있어요. 그녀는 신화의 인물이 아니라 〈한 시대 한 도시의 한 여자〉예요. 침대, 침대 끝의 작은 강아지, 뒷쪽에서 옷을 정리하는 두 하녀 — 모든 것이 그 시대 베네치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변화 — 〈누드가 일상이 된 것〉 — 가 그 후 약 400년의 누드 회화의 표준이 됩니다. 1863년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가 이 그림과 거의 같은 자세로 그려진 한 점이고, 마네 자신이 이 그림을 직접 보고 〈올랭피아〉를 만들었다고 인정했어요. 우리가 다음 호 11호에서 만날 마네의 〈올랭피아〉가 — 1538년 티치아노의 한 그림이 1863년에 다시 살아난 것이지요. 한 그림 한 점이 그 후 325년 후의 다른 한 그림으로 다시 흐르는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한 그림 안의 같은 주제가 한 시대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그려지는가. 1498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1594년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우리가 6호 C1에서 본 한 점)에서 식탁은 화면과 평행하게 놓여 있고, 그리스도가 한가운데에 있고, 모든 사도가 식탁의 한쪽에 한 줄로 앉아 있어요. 그 〈평형 구도〉가 황금기 르네상스의 가장 또렷한 표시였습니다.
약 100년 후 1594년 틴토레토가 같은 주제를 그렸을 때, 그 모든 것을 바꿨어요. 식탁이 화면과 평행하지 않고, 대각선으로 깊이 들어가게 그려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한가운데에 있지 않고, 그림의 약 1/3 자리에 작게 그려져 있어요. 그 대신 그림 한가운데의 가장 큰 자리는 — 한 명의 종이 그릇을 옮기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 시대까지의 〈최후의 만찬〉이 〈성스러운 한 의식〉이었다면,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한 식당의 매우 시끄러운 한 시간〉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빛〉입니다. 그림 한가운데의 천장에 한 개의 거대한 등불이 매달려 있고, 그 등불에서 흩어지는 빛이 그림의 모든 인물 위에 다른 강도로 떨어집니다. 그리스도 머리에서 빛이 나고, 사도들의 머리에서도 작은 빛이 나오는데, 그 빛들이 모두 〈천장의 등불의 빛〉과 〈초자연적인 빛〉이 함께 섞여 있어요. 그 한 가지 효과 — 〈자연광 + 초자연적인 빛이 한 그림 안에 같이 흐르는 것〉 — 이 그 후 17세기 카라바조와 렘브란트의 모든 〈빛 그림〉의 시조가 됩니다. 우리가 다음 호 8호에서 만날 카라바조의 그림이 — 1594년 틴토레토의 한 등불에서 시작된 한 줄기예요.

엘 그레코의 가장 큰 작업이 이 한 점입니다. 그림 한 채가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로 위·아래로 나뉘어 있어요. 두 세계가 한 그림 안에 동시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1586년 톨레도의 산토 토메(Santo Tomé) 성당이 엘 그레코에게 의뢰한 작품입니다. 의뢰의 주제는 1323년 — 약 260년 전 — 의 한 전설이었어요. 톨레도의 한 부유한 백작 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곧 〈오르가스 백작〉)가 죽었을 때, 성 스테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천국에서 직접 내려와 그의 시신을 자기 손으로 매장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엘 그레코가 그 한 이야기를 한 그림 안에 그렸어요. 그림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래쪽 절반은 〈땅의 세계〉 — 1323년 톨레도의 실제 매장 장면을 그렸어요. 두 성인이 백작의 시신을 안고 있고, 그 주위로 한 시대 톨레도의 모든 귀족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습니다. 그 인물들의 거의 모두가 1586년 톨레도의 실제 인물 — 엘 그레코의 친구들과 후원자들 — 의 얼굴로 그려졌어요. 위쪽 절반은 〈하늘의 세계〉 — 그리스도, 마리아,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들이 백작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에요. 그 영혼은 작은 〈아기 모양〉으로 그려져, 한 천사가 그것을 들고 그리스도에게 올려보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그 위쪽 절반의 인물들이 모두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자세로 그려졌어요. 그리스도, 마리아, 천사들의 몸이 약 12등신이고, 옷이 흐르듯이 길게 흘러요. 그 길게 늘어진 인체가 〈땅의 세계〉의 자연스러운 인체와 한 그림 안에서 직접 충돌합니다. 그 충돌이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만들어 내요. 한 그림 한 점이 한 인간이 죽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영적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시각적 답을 — 한 면 위에 함께 그린 사례. 그것이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입니다.

한 그림 한 점에 약 35명의 농민이 있고, 한 사람씩의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다 다르게 그려져 있어요. 그 시대 어떤 큰 그림에서도 농민이 그렇게 가까이 그려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약 1567년 브뢰헐이 약 42세였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의뢰 기록은 없어요. 그림은 한 헛간 안에서 일어나는 한 농민의 결혼식을 보여 줍니다. 신부는 그림 한가운데 — 검은 머리 위에 작은 종이 왕관을 쓰고 —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미소 짓고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신랑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플랑드르 농민의 결혼 풍습에서 〈신랑은 자기 결혼식에서 한 발짝 뒤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사람씩의 표정〉입니다. 약 35명의 농민이 모두 다른 자세로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두 사람이 큰 나무판 위에 음식을 담아 식탁으로 옮기고 있고, 한 어린 아이가 그릇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핥고 있고, 한 농민이 자기 술잔을 들고 자기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고, 한 명의 음악가가 백파이프를 불고 있어요. 그 모든 자세가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일상적입니다. 한 그림 한 점이 한 시대 한 농촌 한 결혼식의 하루 전체를 담은 그 사례 — 미술사에 그 전 거의 없었어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이 그림에는 〈숨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신부의 머리 위쪽 벽에 걸린 한 푸른 천이 신부의 〈처녀성〉을 상징하고, 그 천 앞쪽에 매달린 한 작은 농기구가 〈노동의 결혼〉을 상징해요. 그리고 그림 가장 왼쪽 한구석에 흰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보이는데, 그 사람이 그림에서 거의 유일하게 검은 옷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다른데, 일부는 그것이 〈브뢰헐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봐요. 한 화가가 자기 자신을 한 농민의 결혼식의 한 손님으로 그려 넣은 것이지요. 한 시대의 화가가 한 시대의 농민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그림 안에 만든 그 사례 — 그것이 1567년 브뢰헐의 결혼식이었습니다.

한 그림 한 점이 67㎡(약 6.77×9.94m)의 거대한 면적이고, 그 안에 약 13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어요. 베로네세의 한 평생 가장 큰 작업입니다.
이 그림은 1562년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 수도원이 베로네세에게 의뢰한 작품이에요. 수도원의 식당 한 벽 전체를 채우는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베로네세는 약 15개월에 걸쳐 그 한 점을 완성했어요. 1563년 9월에 완공된 후, 그 그림은 그곳 식당에 약 235년 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하면서 그 그림을 떼어 파리로 가져갔고, 그 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지금까지 그곳에 있어요.
주제는 〈가나의 결혼식〉입니다. 신약 성서 요한복음의 한 장면 — 예수가 자기 첫 기적,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일으킨 결혼식이에요. 그러나 베로네세는 그 한 성서 장면을 1500년대 베네치아의 거대한 결혼 잔치로 바꿨습니다. 그 그림 안의 약 130명 중 거의 모두가 1500년대 베네치아의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어요. 그리스도와 사도들만 옛 옷을 입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베네치아 귀족들의 모습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그림 한가운데 식탁 앞쪽에 4명의 음악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 4명이 그 시대 베네치아의 4명의 큰 화가의 자화상입니다. 가장 왼쪽이 베로네세 자기 자신, 그 옆이 야코포 바사노, 그 옆이 틴토레토, 그리고 가장 오른쪽이 티치아노예요. 한 시대의 4명의 가장 큰 화가가 같은 그림 안에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그 한 가지 자기-기록은 — 그 시대 베네치아 화가들의 친밀한 관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1797년 이 그림을 파리로 옮길 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림이 너무 커서 그대로 옮길 수 없었고, 결국 가운데를 가로질러 두 조각으로 잘라야 했습니다. 그 후 다시 합쳐진 자국이 지금도 그림 한가운데에 가는 한 줄로 보여요. 한 그림이 한 시대의 정복과 한 시대의 약탈을 함께 살아남은 그 사례 — 그것이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입니다.
베네치아 식탁, 매너리즘 패션, 베네치아 안료, 산 마르코의 음악, 그리고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인쇄소.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500년대 베네치아의 식탁은 그 시대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식탁이었어요. 모든 부유한 가문이 베네치아의 식탁을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자랑이 〈무라노 크리스털 잔〉이었어요. 우리가 A5에서 본 그 발명이 1500년대 후반 모든 유럽 부유 가정의 식탁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 잔의 가격이 그 시대 평민 한 사람의 약 1년 소득에 해당했고, 한 가족의 식탁에 약 30~50개의 잔이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두 번째 자랑이 〈은 식기〉였습니다. 신대륙의 페루·멕시코의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면서 1500년대 후반 유럽에 들어오는 은이 그 전 시대의 약 10배가 되었어요. 그 결과 모든 부유한 식탁의 거의 모든 식기 — 칼, 숟가락, 포크, 그리고 새로 등장한 〈샐러드 포크〉, 〈수프 숟가락〉 — 가 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 번째 변화가 〈새 음식〉이에요. 1500년대 중엽부터 신대륙에서 들어온 새 식재료가 베네치아 식탁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옥수수(폴렌타 polenta)〉, 〈콩(파지올리 fagioli)〉, 그리고 1530년대에 들어온 〈토마토〉. 단 토마토는 그 시대 약 200년 동안 〈독초〉로 여겨져 거의 먹지 않았어요. 가장 큰 변화 한 가지가 〈커피와 초콜릿〉이었습니다. 커피는 1570년경 베네치아 무역상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처음 가져왔고, 1640년대부터 유럽 전역에 퍼져요. 초콜릿은 1528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처음 가져왔지만, 1500년대까지는 거의 약으로만 사용되었어요. 한 끼의 식사가 한 시대의 항해와 한 시대의 무역과 한 시대의 미감을 동시에 담는 자리 — 그것이 1500년대 베네치아의 식탁이었어요.

매너리즘이 미술에서 일어난 한 시기, 패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한 옷이 한 사람의 몸을 자연스럽지 않게 가리고 변형시키는 한 가지 흐름이 시작됩니다.
1500년대 중엽부터 후반까지의 유럽 패션의 가장 큰 특징이 〈검정색〉이에요. 그 전 1500년대 초의 화려한 비단·황금 옷차림이 거의 사라지고, 부유한 사람들의 옷이 거의 모두 〈검은색〉이 됩니다. 그 흐름의 출처가 한 가지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였어요. 펠리페 2세의 궁정 의상이 모두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졌고, 그 형식이 16세기 후반 유럽 모든 부유한 가문에 퍼졌습니다.
두 번째 가장 큰 특징이 〈러프(ruff)〉라 부른 흰 칼라예요. 목 주위를 거대한 흰 종이접기 같은 칼라가 둘러싸는 형식으로, 그 칼라의 직경이 약 30~50cm까지 커졌어요. 그 칼라를 만들기 위해 한 명의 매우 정교한 〈러프 만드는 사람(starcher)〉이 필요했고, 매일 아침 약 2시간 동안 그 칼라를 풀어 다시 깐 다음 한 사람이 입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머리가 마치 한 접시 위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그 한 가지 형식이 매너리즘 패션의 가장 또렷한 표시예요.
세 번째 변화가 〈코르셋(corset)〉의 등장입니다. 그 전까지 여성의 옷은 자연스러운 몸의 선을 따라가는 형식이었어요. 그러나 1500년대 후반부터 〈고래 뼈(whalebone)〉를 안에 넣은 코르셋이 등장하면서, 여성의 허리를 비정상적으로 가늘게 조이는 한 가지 형식이 시작됩니다. 그 코르셋이 그 후 약 350년 동안 여성 패션의 표준이 됩니다. 매너리즘 미술의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인체〉가 — 매너리즘 패션의 〈비정상적으로 변형된 인체〉와 같은 한 시대의 두 표시였어요. 한 시대의 미술과 한 시대의 패션이 같은 한 가지 미감 위에 만들어진 그 사례 — 그것이 매너리즘이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안료 시장이 1500년대 동안 더 정교해지면서, 그 시대 화가들이 자기만의 〈서명색〉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 가장 또렷한 사례가 〈티치아노 빨강〉이었어요.
티치아노 빨강(rosso Tiziano)은 한 가지 안료의 이름이 아니라, 티치아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든 〈빨간색의 한 가지 깊이〉예요. 그가 어떻게 그 색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대에 직접 적힌 비밀 노트가 거의 없어, 학자들이 약 400년 동안 추측해 왔습니다. 가장 유력한 답은 한 가지 — 베르밀리온(천연 주사)을 바닥에 칠하고, 그 위에 〈매더 레이크(madder lake, 식물 빨간색)〉의 약간 투명한 광택층을 약 5~10번 차례로 입히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색이 매우 깊이 있게 빛나면서, 가까이 보면 거의 〈물 속의 빨간 보석〉처럼 보였어요.
또 한 가지 새로운 변화 — 1500년대 후반 베네치아의 색깔 시장에 새로운 합성 안료들이 들어왔어요. 〈납주(red lead)〉라 부른 합성 빨강, 〈수은 빨강(mercury red)〉, 그리고 〈인디언 옐로우(Indian yellow)〉라 부른 인도에서 들어온 새 노란색. 이 모든 새 색이 베네치아의 리알토(Rialto) 시장에서 매일 거래되었습니다. 그 시대 베네치아 화가들은 그 시장에서 매일 새 색을 시도해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의 그림이 다른 도시 화가들의 그림보다 색이 더 풍부했어요.
가장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 베네치아의 새 합성 안료들이 그 시대 다른 도시 화가들에게 의도적으로 〈비밀〉로 유지되었어요. 베네치아 안료 길드는 한 가지 룰이 있었습니다 — 〈베네치아의 안료 비법은 외부로 절대 나가지 못한다.〉 그 룰을 깬 사람은 추방되었거나, 일부의 경우에는 익사형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해져요. 한 도시가 자기의 〈색의 비법〉을 한 시대 가장 큰 무역 비밀로 지킨 그 사례 — 그것이 1500년대 베네치아의 안료 시장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에는 두 개의 큰 발코니가 마주 보고 있어요. 그 두 발코니 위에 두 합창단이 동시에 다른 멜로디를 부르는 한 가지 음악 형식이 1500년대 후반에 만들어집니다.
그 음악 형식이 〈코리 스페차티(cori spezzati, 분리된 합창단)〉예요. 산 마르코 대성당의 건축 자체가 그 음악 형식을 가능하게 만든 자리였습니다. 양쪽 발코니에 각각 한 합창단과 한 작은 오케스트라가 있고, 두 그룹이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음악을 흐르게 했어요. 한 사람이 한 그룹의 멜로디를 들으면, 약 1초 후 같은 멜로디가 다른 그룹에서 메아리처럼 다시 들립니다. 그 효과가 한 시대 누구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음향이었어요.
이 형식의 가장 큰 작곡가가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약 1533-1585)와 그의 조카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약 1554-1612)였습니다. 두 사람이 산 마르코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평생 활동하면서, 그곳의 건축적 특수성을 활용한 새 음악을 만들었어요. 조반니가 1597년에 발표한 〈교회 음악의 향연(Sacrae Symphoniae)〉이 그 형식의 가장 또렷한 결정체이고, 그 모음집 안에 16개 합창단이 동시에 노래하는 한 곡까지 들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 변화가 〈악기 음악(strumentale)〉의 등장이에요. 그 전까지의 모든 음악은 〈성악 + 악기〉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리 시대부터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음악〉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어요. 〈소나타(sonata)〉, 〈칸초나(canzona)〉 같은 새 형식이 그 시대에 만들어집니다. 그 형식이 그 후 17세기 〈콘체르토(concerto)〉, 18세기 〈교향곡(symphony)〉의 시조가 돼요. 한 도시의 한 성당의 건축이 한 시대의 음악 형식을 결정한 그 사례 — 그것이 1500년대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이었습니다.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 1449-1515)는 그 시대 가장 큰 인쇄업자였어요. 그가 한 가지 결정으로 책의 형식을 영원히 바꿉니다 — 책을 작게 만든 것이지요.
1450년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후, 약 50년 동안 모든 인쇄 책은 매우 컸어요. 두꺼운 양피지 책처럼 무겁고, 거대했고, 한 권이 보통 한 개의 책상 위에 놓이는 크기였습니다. 그런 책은 〈집에 두는 책〉이었지, 〈휴대하는 책〉이 아니었어요. 1495년 베네치아의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한 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책을 손에 들 수 있게 작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그가 만든 새 책의 크기가 〈팔자형(octavo)〉이라 부른 한 가지 표준이었습니다. 약 15×9cm의 작은 책으로, 한 사람이 외투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였어요. 그 한 가지 변화가 한 시대의 〈독서〉를 완전히 바꿉니다. 책이 한 자리에 묶여 있던 것에서, 사람들이 어디든 가져갈 수 있는 한 가지 동반자가 된 것이지요. 1501년 그가 처음 출간한 작은 책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단테의 〈신곡〉이었어요. 옛 라틴 고전과 이탈리아 고전이 처음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가 한 가지 더 큰 발명을 합니다 — 〈이탤릭 글씨체(italic)〉예요. 작은 책에 더 많은 글자를 넣기 위해, 그가 약간 기울어진 새 글씨체를 디자인했습니다. 그 글씨체가 그 후 약 500년 동안 모든 인쇄물의 〈이탤릭〉의 시조가 됩니다. 또 한 가지 — 〈세미콜론(;)〉의 발명이에요. 그 시대까지의 책에는 거의 모든 문장이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알두스의 인쇄소에서 처음으로 〈쉼표보다 길고 마침표보다 짧은 한 가지 멈춤〉을 표현하는 새 부호 〈세미콜론〉이 만들어졌어요. 한 인쇄업자의 한 평생이 책의 크기, 글씨체, 그리고 문장 부호까지 —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거의 모든 책의 형식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미술사보다도 더 깊은 한 시대의 한 가지 변화입니다.

약 1488 티치아노 출생
1495~1515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베네치아 인쇄소
1517 마르틴 루터, 95조항 발표 — 종교 개혁 시작
1518 틴토레토 출생 (베네치아)
1520.04.06 라파엘로 사망 — 황금기의 끝
1525 피터르 브뢰헐 출생 (플랑드르)
1527 〈로마 약탈(Sacco di Roma)〉
1528 베로네세 출생
1533 카를 5세, 티치아노에게 백작 작위 수여
1538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41 엘 그레코 출생 (크레타)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45~1563 트리엔트 공의회 — 가톨릭 개혁
1563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
1564 미켈란젤로 사망 (89세) / 셰익스피어 출생 / 갈릴레이 출생
1564~1587 틴토레토, 산 로코 신도회 작업
1567 브뢰헐 〈농민의 결혼식〉
1569 브뢰헐 사망 (44세)
1570 엘 그레코,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1576 티치아노 사망 (88세, 페스트) / 엘 그레코, 톨레도로 떠남
1586~1588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8 베로네세 사망
1592~1594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4 틴토레토 사망
1597 조반니 가브리엘리 〈Sacrae Symphoniae〉
1600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 — 바로크의 시작
1614 엘 그레코 사망 (73세)

1.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 누드가 신화에서 일상이 된 한 점.
2.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 1563 — 67㎡, 130명의 인물.
3. 브뢰헐 〈농민의 결혼식〉 1567 — 농민이 큰 그림의 주인공이 된 첫 사례.
4.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 — 한 그림이 〈땅〉과 〈하늘〉의 두 세계를 동시에.
5. 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 약 1600 — 옆 그림. 폭풍 풍경의 시조.
6.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4 — 대각선 식탁. 한 등불의 빛이 17세기 모든 빛 그림의 시조.
7. 가브리엘리 〈Sacrae Symphoniae〉 1597 — 두 합창단이 마주 보는 음악. 17세기 콘체르토의 시조.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11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완성을 깨뜨린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황금기의 〈완성〉을 깨뜨린 한 시대.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바사리 〈예술가 열전〉 1550~1568 · 데이비드 로젠드 〈Painting in Renaissance Venice〉 · 페르낭 브로델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 · 우피치·루브르·산 로코·산토 토메·산 조르조 마조레·빈 미술사박물관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1600년 카라바조의 한 그림에서 시작되어 1700년까지 약 100년. 카라바조의 칼날 빛과 렘브란트의 황금 빛이 한 시대를 만든 1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