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미술사Luna Art History · 2026
Vol
08
No.8 · 20부작
카라바조의 어두운 작업실
SPECIAL ISSUE · 어둠 안의 빛이 한 시대를 만들다

바로크의

1600년 카라바조의 한 그림에서 시작되어 1700년까지 약 100년 — 카라바조의 칼날 빛과 렘브란트의 황금 빛이 어둠 한가운데에서 한 시대를 만든 100년.

LUNA WHALE · ART HISTORY54 PAGES · 4 PARTS
EDITOR'S LETTER · 여는 글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여덟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600년 로마의 한 작은 성당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San Luigi dei Francesi)에서 한 그림이 공개됩니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그린 〈성 마태의 부르심(Vocazione di San Matteo)〉이었어요. 그 그림 안에서 한 어두운 방의 한가운데에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한 사람의 손이 그 빛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그 한 그림을 본 그 시대 모든 화가가 한 가지를 깨달아요. 〈완벽한 비례〉도, 〈색의 그라데이션〉도 아닌, 〈어둠 안의 한 줄기 빛〉이 한 그림 한 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요.

그 한 가지 발견이 그 후 약 100년의 미술의 가장 큰 줄기를 만듭니다. 우리가 〈바로크(Baroque)〉라 부르는 시대예요. 〈바로크〉라는 단어 자체는 18세기에 처음 나왔는데, 〈비뚤어진 진주(barroco)〉라는 포르투갈어에서 온 말입니다. 처음에는 〈규칙에서 벗어난 이상한 양식〉이라는 부정적 의미였지만, 19세기부터 그 시대 미술 전체를 가리키는 한 가지 단어로 자리 잡았어요.

이 호의 가장 큰 주인공이 한 단어 — 〈빛(luce, light)〉 — 입니다. 르네상스가 〈선〉, 〈비례〉, 〈색〉의 시대였다면, 바로크는 〈빛과 어둠〉의 시대였어요. 그 모든 큰 화가들이 자기만의 빛을 다루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칼날처럼 강한 빛(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렘브란트의 〈따뜻한 황금 빛〉, 베르메르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벨라스케스의 〈투명한 공기 빛〉 — 그 모든 빛이 한 시대 안에 같이 살았어요.

이 호의 두 번째 큰 흐름이 한 가지 — 〈바로크가 두 도시에서 동시에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 로마와 프로테스탄트 암스테르담이에요. 1545~1563년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 〈종교 미술이 평민의 마음을 직접 움직이게 만들겠다.〉 그 결정이 카라바조의 〈극적인 빛〉으로 이어졌어요. 동시에 알프스 북쪽의 네덜란드는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약 100년 동안 〈네덜란드 황금기(Dutch Golden Age)〉를 만듭니다. 그곳의 부유한 상인들이 〈교회 그림〉이 아닌 〈자기 집에 거는 작은 그림〉을 의뢰했고, 그 결과 정물화·풍경화·풍속화·자화상 같은 새 장르가 모두 그 100년 사이에 만들어졌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 — 새벽의 암스테르담, 17세기 운하 풍경, 카라바조의 어두운 로마 작업실,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작업실,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업실. 제2부는 다섯 사람 — 카라바조,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베르메르, 그리고 한 가지 의문(왜 두 도시에서 동시에). 제3부는 다섯 점 — 〈성 마태의 부르심〉, 베르니니 〈다비드〉, 벨라스케스 〈시녀들〉, 렘브란트 〈야경〉,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2026년 12월 · 루나웨일 미술사 편집실
EDITOR — Luna Whale
02
CONTENTS · 목차

한 호의 네 부

A

시대의 풍경

로마의 어둠에서 암스테르담의 황금 빛까지, 100년의 다섯 풍경.

P.04 – P.15
B

빛을 다룬 다섯 사람

카라바조,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베르메르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P.16 – P.27
C

남긴 다섯 점

성 마태의 부르심, 베르니니 다비드, 시녀들, 야경,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P.28 – P.39
D

그들의 한 끼, 한 곡, 한 벌

네덜란드 정물 식탁, 바로크 안료, 17세기 패션, 챔버 음악, 튤립 광풍.

P.40 – P.51
03
A
PART A · 5 STORIES · 시대의 풍경

바로크의 다섯 풍경

1605년 카라바조의 어두운 로마 작업실에서, 1665년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업실까지. 한 시대의 무게가 〈로마〉와 〈암스테르담〉이라는 두 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난 10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의 빛이 두 도시에서 동시에 태어났습니다.

04 · CHAPTER OPENER
04
PART A · 다섯 풍경

바로크의 다섯 풍경

한 시대의 빛이 어떻게 두 도시에서 동시에 태어났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A1

새벽의 암스테르담 운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한 도시 · P.06
A2

17세기 암스테르담 운하 풍경

한 도시가 무역으로 부유해진 한 시간 · P.08
A3

카라바조의 로마 작업실

1605년 어두운 방의 한 줄기 빛 · P.10
A4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작업실

1660년 황금 빛 안의 한 거장 · P.12
A5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업실

1665년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 P.14

05
A · 01 · 새벽 암스테르담
새벽의 암스테르담 운하
17세기 새벽의 암스테르담 운하 — 거꾸로 비치는 좁은 4층 벽돌집들, 큰 무역선,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르는 새벽 안개.
06
A · 01 · 17세기 암스테르담 · 황금기

한 도시가 독립

17세기 암스테르담은 그 시대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였어요. 그 100년 동안 미술이 〈교회의 것〉에서 〈상인의 것〉으로 옮겨 갑니다.

1581년 네덜란드 7개 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어요. 그 후 약 80년의 〈80년 전쟁〉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정식 독립이 인정됩니다. 그 사이에 한 가지 결정적 변화가 있었어요. 네덜란드 7개 주가 〈프로테스탄트(칼뱅주의)〉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교회 안에 큰 그림〉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시대까지 모든 큰 미술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교회〉가 네덜란드에서는 한 가지 자리를 잃은 거예요.

그 빈자리를 누가 채웠을까요. 한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이었습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동인도회사(VOC, 1602년 설립)의 본부였고, 그 시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어요. 그 도시의 약 5,000명의 상인들이 자기 집에 걸 작은 그림을 매년 약 70,000~100,000점씩 사들였다고 합니다. 한 도시의 한 시대 동안 약 500만~1,000만 점의 그림이 만들어진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그 거대한 시장이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 초상화〉라는 새 장르를 만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그 시대 한 사람의 평균 가정에 약 3~7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평민도 자기 집에 작은 풍경화 한 점을 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 점의 작은 풍경화가 그 시대 평균 한 달치 빵값 정도였기 때문에, 가격이 평민도 살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거예요. 그 결과 17세기 네덜란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한 시대〉가 됩니다.

시기1581 ~ 1700
독립 선언1581
정식 독립1648 베스트팔렌
연간 생산약 7~10만 점
한 도시의 한 시대 동안 약 1,000만 점의 그림이 만들어진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07
A · 02 · 운하 풍경
17세기 암스테르담 운하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운하 풍경 — 좁은 벽돌집들, 도르래로 짐을 올리는 상인, 검은 외투를 입은 시민, 큰 무역선의 닻과 돛.
08
A · 02 · 운하 풍경 · 무역의 도시

한 도시가 지구 절반

17세기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가 그 시대 처음으로 〈주식회사〉라는 형식을 만들었어요. 그 한 가지 발명이 그 후 모든 자본주의의 시조가 됩니다.

1602년 네덜란드 정부가 한 가지 새 제도를 만들어요.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입니다. 이 회사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주식회사(joint-stock company)〉였어요. 한 사람이 자기 자본을 모두 한 무역에 거는 대신, 여러 사람이 작은 자본을 합쳐 〈주식〉을 사는 형식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위험이 분산되고, 동시에 거대한 무역도 가능해진 그 한 가지 발명이 그 후 약 400년의 모든 〈자본주의〉의 시조가 됩니다.

VOC는 1602년부터 1799년 약 200년 동안 동남아시아·일본·중국·인도와 무역을 독점했어요. 그 시대 동방에서 들어온 거의 모든 향신료, 비단, 도자기, 차가 암스테르담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도시의 가구 한 채에 그 시대 〈일본 도자기〉, 〈인도 면직물〉, 〈중국 차〉가 다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한 사람의 일상이 한 도시의 무역 망에 그렇게 직접 연결된 사례 — 그 시대 그 도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는 그 모든 무역 물품이 그대로 들어갑니다. 〈일본 도자기 위의 레몬〉, 〈중국 청화 백자 위의 굴〉, 〈튀르키예 카펫이 깔린 식탁〉 — 그런 그림 안의 모든 물건이 그 시대 암스테르담의 한 부엌에 실제로 있었어요. 한 그림 한 점이 그 시대 한 도시의 무역의 풍경을 그대로 기록한 사례. 우리가 다음 부에서 만날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그 〈일상의 무역〉이 가장 또렷하게 보입니다.

VOC 설립1602년
시기1602 ~ 1799
발명주식회사
독점동남아·일본·중국
한 도시의 무역 망이 한 도시의 그림 안에 그대로 들어간 그 사례 — 17세기 암스테르담입니다.

09
A · 03 · 카라바조 작업실
1605년 카라바조의 어두운 로마 작업실
1605년 카라바조의 로마 작업실 — 거의 전체가 어두운 한 방에서 한 줄기 강한 빛만이 위쪽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한 시간. 그 한 줄기 빛 위에서 한 시대 전체의 미술이 만들어졌어요.
10
A · 03 · 카라바조 작업실 · 칼날 빛

어둠 안의 한 줄기 빛

카라바조는 자기 작업실의 거의 모든 빛을 차단했어요. 단 한 개의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만으로 모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한 가지 결정이 한 시대의 미술을 만들었어요.

카라바조는 그 시대 다른 화가들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가장 큰 차이가 한 가지 —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모든 화가가 한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작은 종이에 미리 스케치를 그렸지만, 카라바조는 그 단계를 거의 거치지 않았어요. 캔버스 위에 직접 모델을 보며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고 동시에 〈즉흥적〉이었어요.

두 번째 큰 차이가 〈빛〉입니다. 그가 자기 작업실의 거의 모든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렸어요. 한 개의 작은 창문만 남기고, 그 창문에서 들어오는 강한 한 줄기 빛으로 자기 모델을 비추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그림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나 손에는 매우 강한 빛이 떨어지지만, 그 주변은 거의 완전한 어둠이 됩니다. 그 효과를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라 부르는데, 그 단어 자체는 르네상스에도 있었지만, 카라바조가 그것을 한 가지 극단까지 밀어붙였어요. 그가 만든 〈어둠 안의 강한 빛〉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바로크 회화의 기본 형식이 됩니다.

또 한 가지 — 카라바조의 모델은 거의 모두 그 시대 로마의 길거리에서 직접 데려온 평민들이었어요. 거리의 매춘부, 도박꾼, 부랑자가 그의 그림 안에서 〈성모 마리아〉, 〈사도들〉이 됩니다. 그것이 그 시대 가톨릭 교회의 한 가지 큰 논쟁이었어요. 그러나 카라바조의 후원자 추기경이 그 형식을 변호했습니다. "신은 평민과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평민의 얼굴이 신성한 인물의 얼굴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시대 가톨릭 개혁의 한 가지 핵심 주장이었어요.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 한 가지 주장의 시각적 결정체였습니다.

방법스케치 없이 직접
한 창에서 한 줄기
기법키아로스쿠로
모델로마 평민
평민의 얼굴이 신성한 인물의 얼굴로 그려질 수 있다는 주장 — 그 한 마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었어요.

11
A · 04 · 렘브란트 작업실
1660년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작업실
1660년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작업실 — 약 54세의 거장이 자기 마지막 시기 거의 평민의 자리에서 〈자화상〉을 그리고 있던 한 시간. 그의 황금 빛 작업실.
12
A · 04 · 렘브란트 작업실 · 황금 빛

한 사람이 40번

렘브란트는 평생 약 40~80점의 자기 자화상을 그렸어요. 미술사에서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린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평생 관찰한 자료가 됩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1606년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한 방앗간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631년 25세에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그 후 1669년 약 63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8년 동안 그곳에서 작업했습니다. 그가 평생 그린 그림이 약 600점, 에칭 판화가 약 300점, 드로잉이 약 2,000점이에요. 그 모든 작품 안에 〈자화상〉이 약 40~80점이 들어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지만, 〈렘브란트가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관찰한 화가〉라는 점은 모두 동의해요.

그의 자화상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그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대로 기록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22세의 젊은 자화상부터 63세의 마지막 자화상까지 — 그 약 40년의 한 사람의 변화가 한 묶음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어요. 어린 시절의 자기 확신, 30대의 부유함, 40대의 가족 비극, 50대의 파산, 60대의 침묵 — 그 모든 인간의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 위에 차례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 〈빛〉이에요. 카라바조의 빛이 〈칼날처럼 강한 한 줄기〉였다면, 렘브란트의 빛은 〈따뜻한 황금색이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한 가지 빛〉입니다. 그가 그 효과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한 가지 기법이 〈임파스토(impasto)〉였어요. 안료를 매우 두껍게 쌓아 올려 — 약 1cm 이상의 두께로 — 그 두께 자체가 빛을 받는 형식이었습니다. 그의 후기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거의 부조에 가까워요. 그 두꺼운 안료가 자기 작업실의 자연광을 받아 〈안쪽에서 빛이 나오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빛 안쪽에서 직접 빛나는 듯한 그 효과 — 그것이 렘브란트의 황금 빛이에요.

생몰1606 ~ 1669
자화상약 40~80점
기법임파스토 (두꺼운 층)
총 작품약 2,900점
한 사람이 평생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관찰한 자료 — 렘브란트의 약 40~80점의 자화상이에요.

13
A · 05 · 베르메르 작업실
1665년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업실
1665년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업실 —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안에서 한 여자 모델이 한 자세로 서 있고, 한 화가가 그 빛을 천천히 그리고 있는 한 시간.
14
A · 05 · 베르메르 작업실 · 창문 빛

한 창문이 한 시대

베르메르의 그림 거의 모두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그림 안의 빛이 모두 〈왼쪽 창문에서〉 들어옵니다. 그 한 가지 빛이 그의 평생 가장 큰 주제였어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는 네덜란드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거의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평생 그린 그림이 약 35점밖에 되지 않아요. 그 시대 다른 화가들이 보통 평생 약 1,000~3,000점을 그렸던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 결과 그가 한 점 한 점에 매우 긴 시간을 들였고, 그 한 점씩이 매우 정교한 작품이 됩니다.

그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 〈창문 빛〉이에요. 그의 거의 모든 그림에서 한 여인이 창문 옆에 서 있거나 앉아 있고, 그 창문에서 부드러운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녀의 얼굴이나 옷이나 손 위에 떨어집니다. 그 한 가지 구도가 그의 평생의 거의 모든 그림에서 반복돼요. 그러나 그 반복 안에서 그가 그린 〈빛〉의 미세한 차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정교한 〈빛의 연구〉가 됩니다.

그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베르메르가 사용한 한 가지 비밀 도구가 있었다고 학자들이 추측해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 부른 어두운 상자 안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상자 안의 한 종이 위에 풍경의 작은 모습을 비추는 한 가지 광학 장치였습니다. 그 시대 이미 발명되어 있던 그 장치를, 베르메르가 자기 작업실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래서 그의 그림 안의 〈빛의 정확한 분포〉가 그 시대 다른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정확합니다. 한 도구가 한 화가의 한 평생의 가장 깊은 관찰을 가능하게 한 그 사례 — 그것이 1660년대 베르메르의 작업실이었어요.

생몰1632 ~ 1675
완성 그림약 35점
도구카메라 옵스큐라
도시델프트
한 도구가 한 화가의 평생의 가장 깊은 관찰을 가능하게 한 그 사례 — 베르메르의 작업실이었어요.

15
B
PART B · 5 PEOPLE · 빛을 다룬 다섯 사람

빛을 다룬

카라바조(1571-1610), 렘브란트(1606-1669), 벨라스케스(1599-1660), 베르메르(1632-1675). 한 시대 안에서 매우 다른 네 가지 빛을 만든 네 사람.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빛이 그렇게 한 시대의 주제가 되었을까.

한 시대 안에 네 가지 다른 빛이 동시에 살았습니다.

16 · CHAPTER OPENER
16
PART B · 다섯 사람

바로크의 다섯 이름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B1

카라바조 — 칼날 빛

1571 ~ 1610 · 화가 · P.18
B2

렘브란트 — 황금 빛

1606 ~ 1669 · 화가·판화가 · P.20
B3

벨라스케스 — 공기의 빛

1599 ~ 1660 · 스페인 궁정 화가 · P.22
B4

베르메르 — 창문 빛

1632 ~ 1675 · 델프트 화가 · P.24
B5

한 가지 의문 — 왜 빛인가

한 시대가 빛을 주제로 만든 다섯 가지 이유 · P.26

17
B · 01 · 카라바조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 39세의 짧은 생애 동안 약 80점의 그림으로 한 시대의 빛을 만든 한 사람.
18
B · 01 · 카라바조 · 1571 ~ 1610

39년의 한 짧은 생애

카라바조의 생애는 그의 그림만큼이나 극적이었어요. 살인, 도주, 추방, 그리고 한 척의 작은 배 위에서의 마지막 — 그 39년이 그의 평생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1571년 밀라노 근교 카라바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였고, 〈카라바조〉는 자기 고향 이름이었습니다. 13세에 한 화가의 견습으로 들어갔고, 약 21세에 로마로 옮겼어요. 그곳에서 한 추기경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의 후원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가 1599~1600년 약 28~29세에 그린 첫 큰 작업이 우리가 C1에서 만날 〈성 마태의 부르심〉을 비롯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세 그림이었어요. 그 한 작업이 그를 한 시대의 가장 큰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약 6년 동안 그는 로마에서 거의 모든 큰 의뢰를 독점했어요. 그러나 그의 인생에는 한 가지 다른 줄기가 늘 있었습니다 — 폭력이었어요. 그는 그 시대 로마의 거리를 자주 다녔고, 칼을 차고 다녔으며, 여러 차례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1606년 5월 28일에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요. 한 게임에 관한 다툼 끝에 그가 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즉시 로마에서 도주했어요. 그 후 4년 동안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떠돌면서 그림을 계속 그렸습니다. 1610년 7월 18일, 그가 38세에 한 작은 배 위에서 〈고열〉로 사망해요. 그 시점 그가 다시 로마로 돌아갈 한 가지 사면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약 100년 동안 그의 이름이 거의 잊혀졌고, 19세기 후반에 다시 〈재발견〉되어 미술사의 가장 큰 한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한 사람의 39년의 짧은 폭력적인 생애가 한 시대 전체의 빛을 만든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생몰1571 ~ 1610 (39세)
살인1606.05.28 로마
도주나폴리·몰타·시칠리아
사망1610.07.18 (고열)
한 사람의 39년의 짧은 폭력적인 생애가 한 시대 전체의 빛을 만든 그 사례 — 카라바조였어요.

19
B · 02 · 렘브란트
렘브란트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 — 라이덴의 한 방앗간 아들로 태어나, 약 38년의 암스테르담 활동 후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난 한 사람.
20
B · 02 · 렘브란트 · 1606 ~ 1669

한 사람이 모든 것

렘브란트는 약 30대 중반에 자기 시대의 가장 부유한 화가 중 한 명이었어요. 그러나 그가 1669년 약 63세에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거의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그의 평생 이야기예요.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라이덴(Leiden)에서 태어났어요. 14세에 라틴 학교에서 라이덴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그만두고 한 화가의 견습이 됩니다. 1631년 약 25세에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그곳에서 한 부유한 미술상의 사촌 사스키아 판 윌렌부르흐(Saskia van Uylenburgh)와 1634년에 결혼해요. 그 결혼이 그의 인생의 첫 번째 큰 변화였습니다.

1632년부터 1640년대 초까지 약 10년이 그의 가장 부유했던 시기예요. 〈튤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야경(1642)〉 같은 큰 의뢰를 받았고, 암스테르담의 큰 집을 사고, 약 5,000권의 책과 도자기, 갑옷을 수집했습니다. 그러나 1642년에 두 가지 큰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요. 첫째 〈야경〉이 발표되었지만, 그 그림이 의뢰인들에게 일부 비판을 받았어요. 둘째 같은 해에 그의 아내 사스키아가 30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인생을 천천히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 후 약 20년 동안 그는 점점 의뢰가 줄어들고, 부채가 쌓였습니다. 1656년 약 50세에 그는 파산을 신고하고 자기 모든 소유물 — 큰 집, 책, 도자기, 그리고 자기 그림 컬렉션까지 — 을 경매에 넘겨야 했어요. 그러나 그가 그 가난 안에서 평생 가장 깊은 자화상들을 그립니다. 1669년 10월 4일, 약 63세에 그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마지막에 그리고 있던 그림이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었습니다. 한 아버지가 자기 잃은 아들을 다시 안는 그 한 장면이 — 그가 평생 잃은 모든 것에 대한 한 가지 마지막 답이기도 했어요.

생몰1606 ~ 1669
결혼1634 사스키아
파산1656 (50세)
마지막 그림〈탕자의 귀환〉
한 아버지가 자기 잃은 아들을 다시 안는 한 장면이 — 평생 잃은 모든 것에 대한 한 답이었어요.

21
B · 03 ·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 세비야에서 태어나, 24세부터 평생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한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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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3 · 벨라스케스 · 1599 ~ 1660

한 궁정의 모든 얼굴

벨라스케스가 평생 스페인 합스부르크 궁정의 거의 모든 얼굴을 그렸어요. 그가 그 한 평생의 마지막 자리에서 한 점의 거대한 그림을 만듭니다 — 〈시녀들〉입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났어요. 11세에 한 세비야 화가의 견습이 되었고, 18세에 자기 작업실을 차렸습니다. 1623년 약 24세에 마드리드로 와서, 그해에 스페인 왕 펠리페 4세를 초상으로 그렸어요. 그 한 그림이 매우 마음에 들어, 펠리페 4세가 그를 〈궁정 화가〉로 임명합니다. 그 후 1660년 약 6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7년 동안 그는 펠리페 4세의 거의 유일한 초상 화가였어요.

그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을 했습니다. 1629년과 1649년에 두 번 이탈리아를 방문해, 그곳에서 베네치아 화가들과 카라바조의 그림을 직접 봤어요. 두 번째 방문 때 약 50세였는데, 그 방문이 그의 그림을 결정적으로 바꿉니다. 그 전까지 그가 그렸던 〈선이 또렷한 인물〉이, 그 후로는 〈붓터치가 보이는 자유로운 인물〉로 바뀌었어요.

그의 가장 큰 작업이 1656년 그가 약 57세에 그린 〈시녀들(Las Meninas)〉입니다. 우리가 C3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그림이 그가 평생 자기 작업실에서 만든 모든 자리 — 자기 자신, 왕, 왕비, 어린 공주, 시녀, 난쟁이, 개 — 를 한 그림 한 채에 다 담은 한 점입니다. 한 사람의 평생이 한 그림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1660년 8월 6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자리는 그 후로 1700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끝날 때까지 약 4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화가에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생몰1599 ~ 1660
궁정 화가1623 (24세부터)
펠리페 4세
대표작시녀들 1656
한 사람의 평생이 한 그림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사례 — 〈시녀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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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베르메르
요하네스 베르메르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 — 델프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한 사람. 평생 약 35점의 그림만 남겼지만, 그 한 점씩이 가장 정교한 빛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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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베르메르 · 1632 ~ 1675

한 평생에 35점

베르메르는 그 시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작은 도시의 화가였어요. 그가 약 200년 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 후반에 〈재발견〉되어 미술사의 가장 큰 한 사람이 됩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1632년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한 여관 주인이자 미술상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가 어디에서 화가 훈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습니다. 약 21세에 카타리나 볼네스(Catharina Bolnes)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약 11명의 자녀를 두었어요. 1675년 약 43세에 그가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빚이 그의 모든 재산을 거의 다 갚아야 했습니다.

그가 평생에 약 35점의 그림만 그린 까닭이 한 가지 — 그 한 점에 그가 들인 시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입니다. 한 점의 작은 그림에 그가 약 6개월~1년을 들였다고 추정돼요. 그 시대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이 한 달에 약 5~10점을 그렸던 것에 비하면 매우 다른 속도입니다. 그 결과 그의 한 점씩이 매우 정교했고, 동시에 그의 평생 수입이 그 시대 다른 화가의 약 1/10에 불과했어요.

그가 약 1675년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그림은 약 20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더 인기 있던 화가들 — 가브리엘 메추,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 — 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었어요. 1866년 프랑스 평론가 테오필 토레-뷔르거(Théophile Thoré-Bürger)가 베르메르를 〈재발견〉하면서, 그가 천천히 미술사의 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후 약 100년 동안 그의 약 35점의 그림이 모두 한 점씩 정확히 정리되었고, 지금은 그 한 점씩이 인류의 가장 정교한 빛 그림으로 평가됩니다. 한 사람의 한 평생의 한 점 한 점이 — 200년의 망각을 넘어 다시 한 시대의 가장 큰 사람의 작품이 된 사례.

생몰1632 ~ 1675
한 점 시간약 6개월~1년
평생 그림약 35점
재발견1866 토레-뷔르거
한 사람의 한 평생이 200년의 망각을 넘어 다시 가장 큰 사람의 작품이 된 사례 — 베르메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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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한 가지 의문
암스테르담 풍경
17세기 두 도시의 새벽 — 가톨릭 로마와 프로테스탄트 암스테르담. 한 시대의 빛이 두 도시에서 동시에 태어난 그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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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한 가지 의문

바로크의 가장 큰 한 가지 주제가 〈빛〉이었어요. 왜 그 시대에 빛이 그렇게 한 가지 주제가 되었을까요. 다섯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가톨릭 개혁(Catholic Reformation)〉이에요. 1545~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어요. 〈종교 미술이 평민의 마음을 직접 움직이게 만든다.〉 그 결정 후 카라바조 같은 화가들이 평민의 얼굴을 신성한 인물로 그리고, 강한 빛으로 그 한 순간을 강조하는 한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 가톨릭 교회의 새 전략이 〈빛으로 신앙을 일깨운다〉는 것이었어요.

둘째 〈광학의 발전〉입니다. 1608년경 한스 리퍼셰가 망원경을 발명하고, 1609년 갈릴레이가 그것을 하늘에 향하면서 새로운 우주가 발견됩니다. 같은 시기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을 발명해, 작은 세계를 처음 보기 시작했어요. 그 시대 〈빛이 어떻게 흐르는지〉가 과학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1672년 뉴턴이 프리즘 실험을 통해 흰 빛이 7가지 색의 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 모든 빛에 관한 과학적 발견이 그 시대 화가들의 빛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셋째 〈무역과 부〉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들이 자기 집에 걸 〈작은 그림〉을 의뢰하기 시작했어요. 그 작은 그림에는 큰 종교화처럼 〈전체 우주〉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식탁 위의 빛,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한 거리의 노을 빛 — 그 작은 빛 하나하나가 한 점의 그림이 될 수 있게 되었어요.

넷째 〈종교 분열〉입니다. 가톨릭 vs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이 그 시대 미술의 가장 큰 한 가지 다른 줄기를 만들었어요. 가톨릭 지역(이탈리아·스페인·플랑드르)에서는 〈극적인 빛〉을, 프로테스탄트 지역(네덜란드·영국)에서는 〈일상의 빛〉을 그렸습니다. 다섯째 〈인쇄와 책〉입니다. 17세기 인쇄술이 더 발달하면서, 한 시대의 화가들이 다른 도시 화가들의 그림을 인쇄된 판화로 빠르게 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결과 카라바조의 빛이 약 30년 만에 유럽 전역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한 시대가 한 시대의 빛을 한 가지로 모은 그 사례 — 그것이 바로크였어요.

조건 1가톨릭 개혁
조건 2광학의 발전
조건 3무역과 부
조건 4종교 분열
한 시대가 한 시대의 빛을 한 가지로 모은 그 사례 — 그것이 바로크였어요.

27
C
PART C · 5 WORKS · 남긴 다섯 점

한 점씩 가까이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1600), 베르니니 〈다비드〉(1623),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 렘브란트 〈야경〉(1642),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 바로크 100년의 다섯 점.

한 점을 천천히, 가까이.

28 · CHAPTER OPENER
28
PART C · 다섯 점

남긴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C1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

1599~1600 ·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 P.30
C2

베르니니 〈다비드〉

1623~1624 · 보르게세 갤러리 · P.32
C3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 프라도 미술관 · P.34
C4

렘브란트 〈야경〉

1642 · 라익스 미술관 · P.36
C5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약 1665 · 마우리츠하위스 · P.38

29
C · 01 · 성 마태의 부르심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Vocazione di San Matteo)〉, 1599-1600년. 캔버스에 유화, 322×340cm.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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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1 · 성 마태의 부르심 · 1600

한 줄기

1600년 카라바조가 그린 이 한 점이 바로크의 시작입니다. 그림 안의 한 줄기 빛이 — 그 후 100년의 모든 빛 그림을 결정했어요.

이 그림은 1599~1600년 카라바조가 약 28~29세 때에 그린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세 그림 연작 중 하나예요. 의뢰한 사람이 추기경 마테오 콘타렐리(Matteo Contarelli)의 후계자였고, 주제는 그의 수호 성인 마태의 일생이었습니다. 〈성 마태의 부르심〉, 〈성 마태의 영감〉, 〈성 마태의 순교〉의 세 그림이 한 예배당 안에 차례로 걸려 있어요.

그림 안의 장면은 신약 성서 마태복음 9장 9절의 한 구절이에요 —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림 한가운데에 한 어두운 방이 있고, 한 식탁 주위에 다섯 사람의 세관원이 앉아 돈을 세고 있습니다. 그 방의 오른쪽에서 두 인물 — 그리스도와 베드로 — 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가 마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어요.

이 그림이 한 시대를 시작한 까닭이 한 가지 — 한 줄기 빛입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히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 빛이 마태의 얼굴 위에 정확히 떨어집니다. 그 빛은 자연광이 아니에요. 〈초자연적 빛(divine light)〉입니다. 그 한 줄기 빛이 그림 안의 어둠을 가르고, 한 사람의 얼굴 위에 〈선택받은 한 순간〉을 비춰요.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그 빛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뻗어, 빛이 마치 그리스도의 손가락에서 나와 마태의 얼굴로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한 가지 효과 — 〈빛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것〉 — 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바로크 종교화의 시조가 됩니다.

시기1599 ~ 1600
크기322 × 340 cm
장소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기법키아로스쿠로
빛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한 순간을 시각적으로 그린 첫 그림 — 1600년 카라바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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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베르니니 다비드
베르니니 〈다비드〉
잔로렌초 베르니니 〈다비드(David)〉, 1623-1624년. 대리석, 170cm. 보르게세 갤러리,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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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베르니니 다비드 · 1623~1624

한 자세가 한 순간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같은 주제를 그렸지만,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 〈순간〉을 그렸어요.

잔로렌초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 1598-1680)는 17세기 로마의 가장 큰 조각가이자 건축가였어요. 그가 약 25세인 1623~1624년에 한 점의 대리석 다비드를 깎습니다. 의뢰한 사람이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Scipione Borghese)였고, 그래서 지금도 보르게세 갤러리(Galleria Borghese)에 있어요.

이 다비드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1504년)와 다른 한 가지가 매우 결정적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싸우기 직전의 한 사람〉이었어요. 평온하고, 균형 잡힌 자세로, 자기 다음 행동을 결정하고 있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싸움의 한가운데〉예요. 그는 자기 슬링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 슬링을 뒤로 당기면서, 자기 몸을 거의 비틀어 골리앗을 향해 던지려는 그 한 순간에 있어요. 그의 얼굴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한 행동의 가장 강한 한 순간이 — 한 점의 대리석 안에 그대로 멈추어 있어요.

베르니니가 한 가지 더 결정적으로 만든 것이 있어요. 관객의 자리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보는 관객은 한 자리에 서서 다비드를 〈정면으로〉 본다고 가정되었어요. 그러나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그 다음에 자기 슬링을 던질 〈가상의 골리앗〉이 관객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려졌습니다. 관객이 그 작품 앞에 서면, 자기가 그 다비드의 표적인 〈골리앗〉이 되는 거예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 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바로크 조각의 가장 큰 발명이 됩니다. 한 조각이 더 이상 한 자리에 서 있는 한 〈물건〉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만드는 한 〈장면〉이 되었어요.

시기1623 ~ 1624
크기170 cm
의뢰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차이순간 (vs 미켈란젤로)
관객이 그 작품 앞에 서면 자기가 골리앗이 됩니다 — 한 조각이 한 〈장면〉이 되는 그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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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시녀들
벨라스케스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Las Meninas)〉, 1656년. 캔버스에 유화, 318×276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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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시녀들 · 1656

한 그림이 그림 자체

〈시녀들〉은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한 점입니다. 그림 안에 화가 자기 자신, 한 캔버스의 뒷면, 거울 안의 두 인물, 그리고 한 어린 공주가 모두 있어요. 그 그림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걸까요.

이 그림은 1656년 벨라스케스가 약 57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그림 한가운데에 5세의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ita Teresa)가 서 있고, 그녀 양쪽에 두 명의 시녀(meninas)가 있습니다. 그 옆에 두 명의 난쟁이, 한 마리의 큰 개, 그리고 약간 뒤쪽에 화가 자기 자신 — 벨라스케스 — 이 한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그림 한가운데에 〈거울〉이 한 개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울 안에 두 사람 — 펠리페 4세 왕과 그의 아내 마리아나 왕비 — 이 비치고 있어요. 그 두 사람은 그림 안에 직접 그려져 있지 않지만, 거울에 비친 그 모습으로 그림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답은 한 가지 — 〈관객의 자리〉예요. 우리가 이 그림 앞에 서서 그것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사실 〈펠리페 4세 왕과 마리아나 왕비의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 우리가 보고 있는 〈시녀들〉이 아니라 — 그가 자기 캔버스에 그리고 있는 〈왕과 왕비의 초상〉입니다.

그 한 가지 구도 — 〈그림이 그림 자체를 그리는 것〉 — 이 미술사에서 가장 깊은 한 가지 명상이 됩니다. 1957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그의 책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의 첫 장 전체를 이 그림 한 점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했어요. 그가 그 그림 안에서 〈서구 근대 사상의 기원〉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한 그림 한 점이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철학적 명상의 자료가 된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시기1656년
크기318 × 276 cm
중심마르가리타 공주 (5세)
관객 자리왕과 왕비
한 그림이 그림 자체를 그리는 그 한 가지 구도 — 미술사에서 가장 깊은 명상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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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4 · 야경
렘브란트 〈야경〉
렘브란트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시민 군인 부대(De Nachtwacht, 일명 야경)〉, 1642년. 캔버스에 유화, 363×437cm. 라익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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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4 · 야경 · 1642

한 단체 초상이 한 장면

〈야경〉은 사실 야경이 아닙니다. 그림이 약 200년 동안 어두워져, 〈야경〉이라 잘못 불리게 된 그림이에요. 원래 한 낮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1642년 렘브란트가 약 36세에 그린 그림이에요. 의뢰한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의 시민 군인 부대(schutterij)의 18명의 단원이었고, 각자 자기 초상화 한 부분에 약 100길더씩 — 그 시대 한 평민의 약 6개월 소득 — 을 지불했습니다. 그 시대 네덜란드의 〈단체 초상화〉라는 한 가지 형식이 매우 일반적이었어요. 한 시민 단체의 단원들이 함께 한 그림에 자기 얼굴을 그려 두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그 형식을 결정적으로 바꿨어요. 그 시대까지의 모든 단체 초상화는 〈모든 단원이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같이 앉아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결과 매우 정적이고, 거의 〈명단〉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 18명을 한 〈장면〉 안에 배치했어요.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가 한가운데에서 부대원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고 있고, 다른 단원들이 자기 무기를 점검하고, 깃발을 들고, 북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시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한 〈움직이는 한 순간〉이에요.

그러나 그 〈움직이는 단체 초상〉이라는 새 형식이 그 시대 의뢰인들에게 약간의 불만을 만들었습니다. 한 단원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거나, 다른 한 단원의 얼굴이 한가운데의 빛 안에 있는 등, 〈18명이 모두 평등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어요. 그 비판이 렘브란트의 그 후 약 30년의 의뢰 감소의 한 가지 시작점이었다고 학자들이 추측합니다. 한 그림 한 점이 한 화가의 평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그 사례 — 한 가지로는 미술사의 한 시대를 시작했지만, 다른 한 가지로는 한 화가의 평생을 어렵게 만든 〈야경〉이었어요.

시기1642년
크기363 × 437 cm
의뢰시민 군인 부대 18명
잘못된 이름200년 후 어두워짐
18명이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한 움직이는 순간 — 단체 초상이 한 장면이 된 첫 사례.

37
C · 05 · 진주 귀걸이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요하네스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Meisje met de parel)〉, 약 1665년. 캔버스에 유화, 44×39cm. 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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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5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약 1665

한 진주 위의 두 점의 빛

이 그림은 약 44×39cm의 매우 작은 그림이에요. 그러나 그 작은 그림 안에서 한 진주 위에 떨어지는 두 점의 빛이 — 인류가 본 가장 정교한 빛의 표현이 됩니다.

이 그림은 약 1665년 베르메르가 약 33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 약 350년 동안 학자들의 의견이 다릅니다. 일부 학자는 베르메르의 큰 딸 마리아 베르메르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다른 학자들은 〈실제 인물이 아닌 한 가지 시각적 환상〉이라고 봅니다. 어떤 답이 맞든, 그 그림 안의 한 소녀의 자세 — 한 어둡고 부드러운 자세에서 한 푸른 터번을 두르고, 한 진주 귀걸이를 한 채로, 약간 입을 벌리고 우리를 돌아보고 있는 그 모습 — 이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한 자세가 됩니다.

이 그림이 결정적으로 가장 큰 한 가지 — 한 진주 귀걸이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그 진주는 사실 매우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요. 두 점의 흰 빛 — 한 점의 큰 흰 점, 그리고 그 옆의 한 점의 작은 흰 점 — 이 한 회색 둥근 모양 위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두 점이 매우 정확한 자리에 있고, 매우 정확한 크기와 강도로 칠해져 있어, 그 결과 그 한 진주가 〈빛 안에서 살아 있는 진짜 진주〉처럼 보여요. 한 화가가 한 진주 한 개를 그리는 데 약 30분이 걸린다면, 베르메르는 그 30분에 자기 평생의 빛 연구를 다 담은 셈입니다.

이 그림은 1881년 헤이그의 한 경매에서 단 2.30 길더 — 그 시대 한 끼 식사값보다 적은 돈 — 으로 팔렸어요. 그 시대 베르메르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 1902년 마우리츠하위스 박물관에 들어간 후, 약 100년에 걸쳐 인류의 가장 유명한 한 점의 그림 중 하나가 됩니다. 한 점의 작은 그림이 〈북유럽의 모나리자〉라 불릴 만큼 신비로워진 그 사례 — 그것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입니다.

시기약 1665년
크기44 × 39 cm
소장마우리츠하위스 (헤이그)
1881년 경매가2.30 길더
한 진주 한 개에 한 화가의 평생의 빛 연구가 다 들어가 있어요 — 그것이 베르메르의 두 점의 흰 빛입니다.

39
D
PART D · 5 STORIES · 그들의 한 끼, 한 곡, 한 벌

바로크 사람의 일상

17세기 네덜란드 정물 식탁, 바로크 안료, 17세기 패션, 챔버 음악, 그리고 1637년 튤립 광풍.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시대의 일상 안에 미술의 또 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40 · CHAPTER OPENER
40
PART D · 다섯 가지 잡학

바로크 사람의 일상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D1

17세기 네덜란드 정물 식탁

VOC 도자기·레몬·굴 · P.42
D2

바로크의 안료

납백·울트라마린·신대륙 코치닐 · P.44
D3

17세기 네덜란드 패션

검은 모자·흰 칼라·자수 컵피스 · P.46
D4

바로크 챔버 음악

바흐 이전·푸르셀·콜레리 · P.48
D5

1637년 튤립 광풍

한 알의 구근이 한 채의 집값 · P.50

41
D · 01 · 정물 식탁
17세기 네덜란드 정물 식탁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 식탁 — 일본 도자기, 베네치아 유리잔, 레몬, 굴, 빵, 검은 호두와 흰 빵.
42
D · 01 · 17세기 네덜란드 식탁

한 식탁이 곧 한 그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식탁 자체가 한 가지 큰 미술 장르가 되었어요. 〈정물화(stilleven, still life)〉입니다. 한 식탁 위의 물건들이 한 점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 〈아침 식사 정물(ontbijtjes)〉이에요. 식탁 위에 한 잔의 백포도주, 두꺼운 빵 한 조각, 약간의 햄, 그리고 한 개의 굴이 놓여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매우 정확하게 그려져 있고, 그 시대 부유한 가정의 식탁이 그 자체로 미감의 한 가지 표현이 되었어요.

그 정물 안에는 거의 항상 한 가지 〈숨은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니타스(vanitas, 허무)〉라 부른 형식이에요. 식탁 위에 거의 항상 〈반쯤 먹은 음식〉, 〈깎인 레몬 껍질〉, 〈쓰러진 술잔〉이 함께 그려져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 결국 사라진다〉는 한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한 식탁의 한 끼가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철학을 동시에 담은 그 사례 —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였어요.

가장 흥미로운 한 가지 —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 〈레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레몬은 그 시대 지중해 유역에서만 자랐고, 네덜란드까지 가져오는 비용이 매우 컸어요. 한 개의 레몬이 그 시대 한 평민의 한 주 식비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한 식탁 그림 안에 한 개의 레몬이 있다는 것은 — 그 식탁의 주인이 매우 부유하다는 표시였어요. 화가들은 그 한 가지 사실을 알고, 거의 모든 정물화 안에 한 개의 레몬을 한 위치에 정확히 놓았습니다. 한 시대의 〈무역〉, 〈부〉, 〈철학〉이 한 작은 식탁 한 그림 안에 모두 들어간 그 사례 —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이었어요.

형식아침 식사 정물
의미바니타스 (허무)
가장 비싼레몬
유래지중해 무역
한 식탁의 한 끼가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철학을 담은 사례 —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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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안료
17세기 바로크 안료
17세기 바로크 화가의 안료 — 납백, 울트라마린, 베르밀리온, 검은 코치닐 빨강, 그리고 인디언 옐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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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17세기 안료

신대륙에서 온 한 가지 빨강

17세기 바로크 안료의 가장 큰 새로운 추가가 한 가지 — 신대륙에서 들어온 〈코치닐(cochineal)〉이에요. 한 마리의 작은 곤충에서 나온 한 색이었습니다.

코치닐(carmine cochineal)은 멕시코의 한 선인장(노팔)에 사는 작은 곤충 〈코키네야 카르미니스(Dactylopius coccus)〉의 암컷 몸에서 추출한 빨간색이에요. 1525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처음 가져왔지만, 1600년대까지 그 출처는 〈비밀〉로 유지되었습니다. 스페인이 그 식민지에서 코치닐을 독점하고, 매년 약 80,000파운드의 마른 곤충을 유럽으로 가져갔어요. 그것이 그 시대 가장 깊고 가장 안정적인 빨간색이 됩니다.

그 빨간색이 그 시대 모든 큰 화가의 그림에 들어가요. 렘브란트의 따뜻한 빨강, 베르메르의 푸르고 깊은 빨강,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4세의 망토 빨강 — 모두 코치닐이었습니다. 한 마리의 곤충이 한 시대의 거의 모든 빨강을 만든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1849년에 합성 〈알리자린(alizarin)〉이 발명되어 코치닐의 자리를 일부 대체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그 한 곤충이 유럽 미술의 빨강을 거의 독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새 안료가 〈인디언 옐로우(Indian yellow)〉예요. 인도에서 들어온 한 가지 노란색인데, 그 출처가 매우 이상했습니다. 인도 비하르 지방에서 망고만을 먹은 소의 오줌에서 추출한 노란색이었어요. 그 시대까지 누구도 알지 못한 그 출처가 1883년에 한 영국 화학자에 의해 처음 밝혀집니다. 한 가지 색이 한 시대의 무역과 한 시대의 동물의 한 가지 비밀까지 담고 있는 그 사례 — 17세기 안료의 한 가지 깊이입니다.

새 빨강코치닐 (멕시코 곤충)
출처1525 코르테스 → 스페인 독점
새 노랑인디언 옐로우 (망고 소 오줌)
합성 빨강 등장1849 알리자린
한 마리의 곤충이 한 시대의 거의 모든 빨강을 만든 그 사례 — 17세기 코치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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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17세기 패션
17세기 네덜란드 상인 패션
17세기 네덜란드 상인의 패션 — 검은 양털 외투, 흰 리넨 칼라(falling band), 가죽 벨트, 검은 가죽 신발, 그리고 검은 챙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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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17세기 네덜란드 패션

검은 색이 부의 표시

17세기 네덜란드 상인의 옷차림은 거의 모두 검은색이었어요. 그 검은색이 그 시대 가장 화려한 색이 된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칼뱅주의 사회의 옷차림은 한 가지 〈검소함〉을 강조했어요. 화려한 색이 아닌 〈검은색, 회색, 흰색〉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검소함이 곧 한 가지 〈역설적인 사치〉를 만들었어요. 그 시대 가장 비싼 색이 〈진짜 검은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검은색은 만들기 매우 어려웠어요. 천연 염료에서 진짜 검은색을 만들려면 여러 단계의 염색을 거쳐야 했고, 그 과정에 사용되는 〈오크 갈매기(oak gall)〉라는 한 가지 식물 추출물이 매우 비쌌습니다. 가장 좋은 검은색은 약 20번의 염색을 거쳐야 만들어졌고, 그 결과 한 옷의 가격이 그 시대 평민의 약 2~3년 소득에 해당했어요. 〈검은 외투 한 벌〉이 그 시대 부유한 상인의 가장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 〈흰 리넨 칼라(falling band)〉예요. 검은 외투의 위쪽에 흰 리넨으로 만든 거대한 칼라가 가슴 아래까지 떨어지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흰 리넨도 매우 비쌌고, 매일 빨아 다림질해서 다시 입어야 했어요. 한 가정에 약 5~10명의 하녀가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만 그런 흰 칼라를 매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옷의 검소함이 한 시대의 가장 큰 사치였던 그 역설 — 그것이 17세기 네덜란드 패션이었어요.

검은색·회색·흰색
진짜 검정20번 염색 (2~3년 소득)
흰 칼라매일 빨래 필요
미감검소한 사치
한 옷의 검소함이 한 시대의 가장 큰 사치였던 그 역설 — 17세기 네덜란드 패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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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챔버 음악
17세기 바로크 챔버 음악
17세기 바로크 챔버 음악 — 작은 살롱 안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하프시코드가 함께 연주되는 한 시간. 〈콘체르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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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17세기 바로크 음악

한 작은 살롱의 한 곡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가장 큰 발명이 한 가지 — 〈콘체르토(concerto)〉예요. 한 명의 솔리스트와 한 작은 오케스트라가 〈대화〉하는 음악 형식입니다.

17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가 한 가지 새 음악 형식을 만들었어요.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 대 협주곡)〉입니다. 한 작은 그룹의 솔리스트들(콘체르티노 concertino)과 한 큰 오케스트라(리피에노 ripieno)가 차례로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고, 그 두 그룹이 〈대화〉하는 형식이었어요. 그 형식이 그 후 약 200년의 클래식 음악의 기본 한 가지 구조가 됩니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헨리 푸르셀(Henry Purcell, 1659-1695)이 활동했어요. 그가 1689년에 작곡한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Dido and Aeneas)〉가 영어로 된 첫 번째 큰 오페라였습니다. 〈디도의 마지막 노래(When I am laid in earth)〉는 그 후 약 300년 동안 가장 많이 연주된 한 가지 아리아가 됩니다.

또 한 가지 큰 변화가 〈악기〉예요. 17세기 후반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의 한 가족이 한 가지 새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스트라디바리(Stradivari)〉입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가 평생 약 1,000개의 바이올린을 만들었고, 그 중 약 650개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한 평생이 만든 바이올린이 그 후 약 300년 동안 인류가 들은 가장 좋은 바이올린이 되었다는 사실 — 미술사보다도 더 깊은 한 시대의 한 가지 사례입니다. 그 시대 한 작은 살롱에서 한 작곡가의 한 새 곡을 한 스트라디바리가 연주하는 그 한 시간이 — 17세기 바로크의 가장 깊은 한 자리였어요.

새 형식콘체르토 그로소
대표 작곡가코렐리·푸르셀
새 악기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현존약 650개
한 사람의 한 평생이 만든 바이올린이 300년 동안 가장 좋은 바이올린이었어요 — 스트라디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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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튤립 광풍
1637년 튤립 광풍
1637년 네덜란드 튤립 광풍(tulpenmanie) — 한 알의 튤립 구근이 한 채의 암스테르담 집값과 같았던 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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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1637년 튤립 광풍

한 알의 구근이 한 채의 집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 광풍(tulpenmanie)〉은 인류 역사상 첫 번째 〈투기 거품〉으로 알려져 있어요. 한 알의 튤립 구근이 한 채의 집값까지 올라간 그 한 시기.

튤립은 사실 네덜란드 자생 식물이 아니에요. 16세기에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에서 처음 들어온 외래 식물이었습니다. 1593년 식물학자 카롤루스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가 라이덴 대학 식물원에 처음 심으면서, 네덜란드에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그 후 약 30~40년 동안 튤립이 네덜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원 꽃이 됩니다.

1620년대부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튤립 구근(bulb)이 〈투기 자산〉이 된 것입니다. 한 가지 희귀한 색깔의 튤립 — 특히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라는 흰 바탕에 빨간 줄이 있는 튤립 — 의 가격이 매년 약 2~3배씩 올랐어요. 1636~1637년 겨울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 알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이 약 10,000 길더 — 그 시대 암스테르담 운하변 한 채의 큰 집값과 같은 가격 — 까지 올랐어요.

그러나 1637년 2월 어느 날, 한 경매에서 갑자기 입찰자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 한 사건이 시장 전체의 폭락을 일으켰습니다. 약 1주일 안에 모든 튤립 가격이 약 99% 떨어졌고, 많은 상인이 파산했어요. 〈튤립 광풍〉이 그렇게 갑자기 끝났습니다. 그 사건이 인류 역사상 첫 번째로 정확하게 기록된 〈투기 거품과 폭락(speculative bubble)〉이 되었어요. 그 후 모든 경제학 교과서가 그 사례를 〈인간이 자기 비합리적인 욕망에 어떻게 빠지는가〉의 첫 번째 사례로 가르칩니다. 한 시대의 미술과 한 시대의 부와 한 시대의 비합리성이 같은 한 식물 안에 들어 있던 그 사례 —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이었어요.

유래16세기 튀르키예
절정1636~1637 겨울
최고가한 알 = 한 채 집값
폭락1637.02 (99% 하락)
한 시대의 미술과 부와 비합리성이 같은 한 식물 안에 들어 있던 그 사례 —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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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시대 연표

바로크 100년
암스테르담 풍경

1571 카라바조 출생 (밀라노 근교)

1581 네덜란드 7개 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

1598 잔로렌초 베르니니 출생

1599 디에고 벨라스케스 출생 (세비야)

1599~1600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 — 바로크의 시작

1602 동인도회사(VOC) 설립 — 첫 주식회사

1606 렘브란트 출생 (라이덴) / 카라바조, 살인 후 도주

1610 카라바조 사망 (39세)

1623~1624 베르니니 〈다비드〉

1623 벨라스케스, 펠리페 4세 궁정 화가

1632 베르메르 출생 (델프트) / 렘브란트 〈튤프 박사의 해부학〉

1637 튤립 광풍 폭락

1642 렘브란트 〈야경〉 / 사스키아 사망

1648 베스트팔렌 조약 — 네덜란드 정식 독립

1656 벨라스케스 〈시녀들〉 / 렘브란트 파산

1660 벨라스케스 사망 (61세)

1665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9 렘브란트 사망 (63세)

1672 뉴턴, 프리즘 실험 — 빛의 분광

1675 베르메르 사망 (43세)

1680 베르니니 사망 (81세)

1685 바흐·헨델 출생

1689 푸르셀 〈디도와 아이네이아스〉

1700 바로크의 끝 / 18세기 로코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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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핵심 일곱 점

이 호의 일곱 점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를 베는 유디트〉

1. 카라바조 〈성 마태의 부르심〉 1600 — 바로크의 시작. 한 줄기 빛이 한 시대를 시작.

2.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를 베는 유디트〉 1612~1620 — 옆 그림. 카라바조 양식을 자기 양식으로 만든 첫 여성 거장.

3. 베르니니 〈다비드〉 1623~1624 — 한 자세가 한 순간을 멈춘 첫 조각.

4. 렘브란트 〈야경〉 1642 — 단체 초상이 한 장면이 된 첫 사례.

5.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 그림이 그림 자체를 그리는 한 가지 명상.

6.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 — 한 진주 위 두 점의 빛.

7.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약 1668 — 한 화가의 평생 마지막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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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PHON · 닫는 글

여덟 번째 호를 다 따라간 후

EDITORIAL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12월 1쇄

이 호의 4부

A 시대 풍경 5장면 · B 빛을 다룬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어둠 안의 빛이 한 시대를 만든 100년.

주요 참고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사이먼 샤마 〈Rembrandt's Eyes〉 · 하워드 히바드 〈Caravaggio〉 · 사이먼 샤마 〈Power of Art〉 · 라익스 미술관·프라도·마우리츠하위스·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보르게세 갤러리 디지털 컬렉션

이미지 출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NEXT ISSUE · Vol.09 예고
18세기의 우아함

1700년부터 1789년까지 약 90년. 와토의 부드러운 살롱, 호가스의 영국 풍속, 그리고 프랑스 혁명 직전의 한 시대.

LUNA WHALE · ART HISTORY VOL.08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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