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850년까지 약 60년 —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고야의 어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터너의 빛, 그리고 산업 혁명이 만든 한 시대.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졌어요. 그날 한 세기의 우아함이 끝나고 한 시대의 혁명이 시작됩니다. 그 후 60년 동안 — 우리가 이번 호에서 다루는 1789년에서 1850년까지 — 유럽 미술의 모든 줄기가 〈혁명〉이라는 한 단어 위에서 다시 만들어졌어요.
이 호의 가장 큰 한 가지 변화가 〈예술가의 자리〉입니다. 18세기까지 화가는 〈한 후원자의 의뢰〉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나 19세기부터 화가가 〈한 사람의 영혼〉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한 가지 사상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줄기였어요. 한 사람의 감정, 한 사람의 상상, 한 사람의 두려움 — 그 모든 것이 한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 호의 네 거장이 매우 다른 네 가지 방향으로 그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다비드(David, 1748-1825)는 신고전주의로 혁명의 도덕을 그렸고, 고야(Goya, 1746-1828)는 스페인 궁정에서 시작해 〈검은 그림〉의 어둠으로 끝났어요. 들라크루아(Delacroix, 1798-1863)는 1830년 7월 혁명의 자유를 직접 그렸고, 터너(Turner, 1775-1851)는 영국에서 빛과 안개의 거의 추상에 가까운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산업 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이 시대의 또 다른 한 줄기예요. 1769년 와트의 증기 엔진, 1825년 영국의 첫 철도, 1839년 다게르의 사진 — 그 모든 새 기술이 그 시대 미술의 주제와 형식을 한 가지씩 바꿉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되면서 화가의 〈사실 묘사의 의무〉가 한 번에 사라졌어요. 그 결과 그 후 약 100년 동안 미술이 점점 〈사실〉에서 멀어져 한 사람의 〈인상, 감정, 추상〉으로 가는 한 가지 큰 흐름이 시작됩니다.
제1부는 다섯 풍경 — 다비드의 파리 작업실, 고야의 마드리드 〈귀머거리의 집〉,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1830년대 영국 철도. 제2부는 다섯 사람 — 다비드, 고야, 들라크루아, 터너, 그리고 한 가지 의문(왜 사진이 미술을 바꿨나). 제3부는 다섯 점 — 다비드 〈마라의 죽음〉, 고야 〈1808년 5월 3일〉,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터너 〈전함 테메레르〉. 제4부는 그 시대의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다비드의 파리에서 영국의 첫 철도까지, 60년의 다섯 풍경.
다비드, 고야, 들라크루아, 터너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마라의 죽음, 1808년 5월 3일, 메두사의 뗏목, 자유의 여신, 전함 테메레르.
파리 카페, 낭만 안료, 19세기 패션, 베토벤 음악, 산업 혁명.
1793년 다비드의 파리 작업실에서 1830년대 영국의 첫 철도까지. 한 시대의 무게가 〈파리·마드리드·런던〉으로 흩어져 만든 6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의 무게가 어떻게 한 도시에서 다른 여러 도시로 흩어져 갔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시각적 선전가였어요. 그가 1793년에 그린 한 점이 혁명의 한 신앙고백이 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가장 큰 화가였어요. 그가 1785년에 그린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혁명 4년 전에 이미 〈공화국의 도덕〉을 시각적으로 선언한 그림이었습니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 혁명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었어요.
그가 1792년 약 44세에 〈국민 공회〉의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그 후 약 2년 동안 그가 자코뱅(Jacobin) 혁명 정부의 〈공식 화가〉로 활동했어요.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에 그는 〈찬성〉표를 던졌고, 1793년 7월 13일 자코뱅의 한 지도자 장-폴 마라(Jean-Paul Marat)가 욕조에서 살해되었을 때 그가 즉시 그 시신을 보러 갔습니다. 그가 본 마라의 모습이 약 6개월 후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이라는 한 점의 그림이 됩니다.
그러나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 정부가 무너지면서 다비드도 체포되었어요. 그가 약 1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그 후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권력 잡기와 함께 다비드가 〈제1제정의 공식 화가〉로 다시 돌아옵니다. 1804년 그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약 6m × 10m의 거대한 그림으로, 그 한 점이 18세기 후반의 거의 모든 큰 시각적 선전을 한 채에 모은 사례예요. 한 화가의 한 평생이 한 시대 정치의 가장 큰 화가였던 그 사례 — 19세기 다비드였습니다.

고야는 평생 두 가지 인생을 살았어요. 처음 약 50년은 스페인 궁정 화가의 평탄한 삶, 그 후 약 30년은 점점 어두운 〈검은 그림〉의 시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1746년 스페인 사라고사 근교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약 14세에 사라고사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763년 약 17세에 마드리드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786년 약 40세에 카를로스 3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1799년 약 53세에 〈수석 궁정 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1808년 한 사건으로 결정적으로 바뀌어요. 1808년 5월 2일과 3일, 마드리드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점령에 대한 시민 봉기가 일어났고, 다음 날 프랑스 군대가 약 400명의 마드리드 시민을 처형했습니다. 그 사건을 고야가 직접 목격하거나 들었어요. 약 6년 후 1814년에 그가 그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그립니다 —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우리가 C2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1819년 약 73세의 고야가 마드리드 시골에 한 작은 집을 샀어요. 그 집의 이름이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었습니다. 고야 자신이 1792년 약 46세에 한 가지 큰 병으로 청각을 거의 잃었기 때문에, 그 별명이 그 집의 이름이 되었어요. 1819년부터 1823년까지 약 4년 동안 고야가 자기 집의 벽 위에 직접 14점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 14점이 〈검은 그림(Pinturas Negras)〉이라 불려요. 그 시대 다른 어떤 화가도 그리지 않은 매우 어둡고 매우 폭력적인 그림들 — 자기 아들을 먹는 사투르누스, 마녀들의 모임, 어둠 속의 두 노인. 그 14점이 그 후 약 100년 동안 모든 〈근대 어둠 그림〉의 시조가 됩니다. 한 사람의 한 집의 한 벽이 미술사의 가장 깊은 한 자리가 된 그 사례 — 고야의 〈검은 그림〉이었어요.

1830년 7월 28일, 파리에서 〈영광스러운 3일(Trois Glorieuses)〉이라 불린 시민 봉기가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다시 무너졌어요. 그 사건을 한 화가가 한 그림으로 만듭니다.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가장 큰 화가예요.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32세였습니다. 그가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친구들에게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어요.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 그림으로 그것을 그리고 싶다."
그가 1830년 9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한 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입니다. 우리가 C4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그림이 1831년 살롱(Salon, 파리 미술 전시)에 출품되었고, 즉시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새 왕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가 그 그림을 사서 박물관에 전시하라고 명령했지만, 그 후 한 가지 정치적 변화로 그 그림이 약 25년 동안 〈숨겨진 채〉 보관됩니다. 1855년에야 그 그림이 다시 공개되었고, 1874년에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어요.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이 한 가지 〈상징적 이미지〉가 된 첫 사례입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큰 정치 그림은 사건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렸어요.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한 〈가공의 인물〉 — 가슴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 마리안(Marianne) — 을 그림 한가운데에 두고, 그녀가 죽은 시민들 위에서 깃발과 총을 들고 행진하게 했습니다. 한 사건의 〈사실〉이 아니라 그 사건의 〈정신〉을 그린 것이지요. 그 한 가지 결정이 그 후 약 200년의 모든 〈정치 상징 이미지〉의 시조가 됩니다. 한 그림 한 점이 한 시대의 정치적 〈상징〉이 된 그 사례 — 1830년 들라크루아였어요.

1838년 9월 6일, 한 노쇠한 영국 전함이 작은 증기선에 끌려 자기 마지막 자리로 가고 있었어요. 그 풍경을 본 한 화가가 한 점의 그림을 그립니다.
HMS 〈테메레르(Temeraire)〉는 1798년에 영국에서 진수된 한 큰 전함이에요. 그 배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지휘 아래 큰 전공을 세웠고, 그 후 약 30년 동안 영국 해군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1838년 그 배가 노쇠해 폐선이 결정되었어요. 같은 해 9월 6일, 한 작은 〈증기 예인선(steam tug)〉이 그 거대한 목조 전함을 끌고 템스 강을 따라 그 마지막 자리 — 폐선 작업장 — 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풍경을 본 한 화가가 J.M.W.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였어요. 그가 즉시 그 풍경을 자기 노트에 스케치했고, 1839년 그것을 한 점의 그림으로 완성합니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The Fighting Temeraire)〉입니다. 우리가 C5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그림이 1839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 출품되어 즉시 큰 인기를 얻었어요. 19세기 영국 사람들이 1842년에 한 신문 투표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그 한 점을 골랐고, 약 180년이 지난 2005년에 BBC가 한 한 영국 여론 조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그 한 점이 다시 1위가 됩니다.
이 그림이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그림 안에 〈두 시대〉가 동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안의 거대한 흰 목조 전함은 〈범선 시대〉의 마지막 상징이고, 그 배를 끌고 가는 작은 검은 증기선은 〈산업 혁명 시대〉의 시작이에요. 그 두 시대가 한 노을 아래에서 함께 있는 그 한 순간이 — 19세기 중엽 인류 역사 전체의 한 가지 시각적 비유가 됩니다. 한 시대가 다른 한 시대로 끌려가는 풍경을 한 점의 그림으로 만든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1769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 엔진, 1825년 스톡턴 철도, 1839년 다게르의 사진. 그 세 가지 기술이 19세기 미술의 거의 모든 줄기를 결정했어요.
1769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기술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새 증기 엔진을 발명했어요. 그 전 1712년 토머스 뉴커먼이 만든 한 가지 단순한 증기 엔진이 있었지만, 와트가 그것을 약 4배 효율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새 엔진이 1780년대부터 영국 면직물 공장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1820년대부터 운송 — 증기선과 철도 — 에 적용되었어요.
1825년 9월 27일, 영국 북동부 스톡턴-달링턴(Stockton-Darlington)에서 인류 역사상 첫 〈공공 철도(public railway)〉가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그 철도의 첫 기관차 〈로코모션 1호(Locomotion No. 1)〉가 약 60톤의 화물과 약 600명의 승객을 시속 약 24km로 운반했어요. 그 한 가지 사건이 그 후 약 50년 동안 유럽 전체의 풍경과 일상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미술에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 발명이 1839년에 일어났어요. 〈사진(daguerreotype)〉입니다.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가 한 가지 새 도구를 발표했어요. 한 은판 위에 빛이 직접 한 풍경을 〈영구히 기록〉하는 한 가지 화학적 방법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발명이 그 후 약 100년의 미술의 가장 큰 한 가지 변화를 일으켰어요. 〈한 풍경의 사실 묘사〉라는 한 가지 일이 화가의 손에서 카메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 결과 그 후의 화가들 — 인상파, 후기 인상파, 입체파, 추상화 — 이 〈사실 묘사〉가 아닌 다른 한 가지 길을 찾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다음 호 11호에서 만날 마네와 모네의 인상주의가 — 1839년 사진의 발명에서 시작된 한 가지 줄기입니다.
다비드(1748-1825), 고야(1746-1828), 들라크루아(1798-1863), 터너(1775-1851). 한 시대의 혁명을 매우 다른 네 가지 방향으로 그린 네 사람.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사진이 미술을 바꿨나.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다비드는 평생 세 가지 다른 정치 체제 — 절대왕정, 자코뱅 공화국, 나폴레옹 제정 — 의 〈공식 화가〉가 되었어요. 한 사람의 한 평생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유연했던 사례는 미술사에 거의 없습니다.
다비드는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부셰의 작업실에서 견습으로 시작했어요. 1774년 약 26세에 〈로마 상〉을 받아 5년 동안 로마에서 유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영향받은 것이 〈고대 로마 조각〉이었어요. 그 영향이 그의 평생 그림 양식 〈신고전주의〉를 만들었습니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된 후 그가 자코뱅의 공식 화가가 되었어요. 1793년 약 45세의 다비드가 자코뱅 정부의 〈국민 공회〉 의원이었고, 그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1794년 7월 자코뱅 정부가 무너지자 그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갔어요. 1799년 나폴레옹의 권력 잡기와 함께 그가 풀려나, 약 5년 후 1804년에 〈제1제정의 공식 화가〉가 됩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7)〉,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이 그 시대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어요.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후 다비드가 다시 정치적으로 곤란해졌습니다. 그가 자기의 〈루이 16세 처형 찬성표〉 때문에 부르봉 왕가의 새 정부에서 추방되었고, 1816년 약 68세에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어요. 그가 그곳에서 1825년 약 7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이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이 약 200년 동안 거부되었어요. 한 화가의 한 평생이 한 시대 정치의 가장 큰 변화를 그대로 따라간 그 사례 — 19세기 다비드였어요.

고야는 평생 세 가지 매우 다른 인생을 살았어요. 첫째 스페인 궁정 화가의 평탄한 삶, 둘째 청각을 잃은 후의 어두운 시기, 셋째 검은 그림과 망명의 마지막.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사라고사 근교 푸엔데토도스(Fuendetodos)에서 태어났어요. 약 14세에 사라고사의 한 화가의 견습이 되었고, 1763년 약 17세에 마드리드로 옮겼습니다. 1771년 약 25세에 이탈리아로 약 1년 유학을 다녀왔고, 그 후 마드리드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1786년 약 40세에 카를로스 3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 1799년 약 53세에 〈수석 궁정 화가〉가 됩니다.
그의 첫 번째 인생이 약 1746~1792년의 약 46년이에요. 평탄한 궁정 화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1792년 약 46세에 그가 한 가지 큰 병 — 학자들이 정확한 진단을 모르지만, 납중독 또는 매독으로 추정 — 으로 청각을 거의 잃었어요. 그 병 후 그의 그림이 결정적으로 바뀝니다. 두 번째 인생이 1792~1819년의 약 27년이었어요. 그 시기에 그가 〈변덕(Los Caprichos, 1799)〉이라는 80점의 동판화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리즈가 그 시대 스페인 사회의 부패, 미신, 잔혹을 매우 어둡게 풍자한 한 가지 작품이에요.
세 번째 인생이 1819~1828년의 마지막 약 9년입니다. 1819년 그가 마드리드 시골에 〈귀머거리의 집〉을 사고, 그곳의 벽에 14점의 〈검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 14점이 그 시대 다른 어떤 화가도 그리지 않은 매우 어둡고 폭력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먹는 사투르누스〉, 〈마녀들의 모임〉, 〈운명의 세 여신〉 — 그 모든 그림이 한 화가의 한 평생의 가장 깊은 어둠을 담고 있어요. 1824년 약 78세의 고야가 스페인의 정치적 압박을 피해 프랑스 보르도(Bordeaux)로 망명했고, 1828년 4월 16일 약 82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에 그렇게 다른 세 인생을 산 그 사례 — 고야였어요.

들라크루아의 평생 주장이 한 가지 있었어요. 〈색이 선보다 위에 있다.〉 그 한 가지 주장이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가장 큰 두 흐름을 만듭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1822년 약 24세에 〈단테의 배(Dante and Virgil in Hell)〉라는 한 점으로 살롱에 데뷔했고, 그 후 약 40년 동안 약 850점의 그림과 약 1,500점의 드로잉을 남겼습니다.
그의 평생의 가장 큰 미학적 주장이 한 가지 — 〈색(couleur)〉이 〈선(ligne)〉보다 미술의 더 깊은 본질이다 — 였어요. 그 시대 신고전주의의 거장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와 들라크루아가 평생 동안 〈선 vs 색〉의 논쟁을 벌였습니다. 앵그르가 〈선이 그림의 절대 본질〉이라 주장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색의 자유로운 흐름〉이 그림의 본질이라 주장했어요. 그 논쟁이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가장 큰 두 흐름 — 신고전주의 vs 낭만주의 — 의 시각적 정의가 됩니다.
그가 1832년에 한 가지 큰 여행을 떠났어요. 모로코였습니다. 그 약 6개월의 여행에서 그가 본 강한 햇빛, 강한 색, 화려한 카펫, 거리의 사자 — 그 모든 것이 그의 평생 그림에 들어가요. 〈모로코 여행〉이 그 후 약 30년 동안 그의 그림의 가장 큰 자료가 됩니다. 그가 1863년 8월 13일 약 65세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영향이 이미 다음 세대로 흐르고 있었어요. 1865년 약 25세의 한 청년이 그의 작업실에 와서 그의 작업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 청년이 클로드 모네였습니다. 한 화가의 〈색 우선〉이라는 한 가지 주장이 그 후 인상주의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19세기 들라크루아였어요.

터너는 평생 약 30,000점의 작품을 남긴 매우 다작의 화가였어요. 그의 후기 작품에 가까이 가면,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빛 자체〉가 보입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1775년 런던 코벤트 가든의 한 이발사 아들로 태어났어요. 약 10세에 첫 그림을 팔았고, 14세에 영국 왕립 아카데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24세에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고, 그 후 1851년 약 7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영국 미술의 중심이었어요.
그의 평생 주제가 한 가지 — 〈빛〉이었어요. 1797년 약 22세부터 그가 매년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의 풍경을 직접 여행하면서 약 30,000점의 스케치, 수채화, 유화를 남겼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자리가 〈해변과 강과 산의 풍경〉이었고, 그 풍경 안에서 그가 그리려 한 것은 〈한 시간의 빛이 한 풍경 위에 어떻게 떨어지는가〉라는 한 가지 주제였어요.
그의 후기 작품 — 1830~1851년의 약 20년 — 이 미술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입니다. 그 시기에 그의 그림이 점점 〈사실적 풍경〉에서 〈빛과 안개의 추상에 가까운 표현〉으로 바뀌었어요. 1844년 그가 약 69세에 그린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가 그 후기 양식의 대표작이에요. 그 그림 안에 한 영국 철도의 증기 기관차가 한 다리 위로 달리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비와 증기와 속도의 흐름 안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어요. 그 한 가지 효과가 그 후 약 50년 후 인상주의의 모네, 그리고 100년 후 추상화의 마크 로스코까지 직접 영향을 줍니다. 한 화가의 〈빛 자체를 그리는 것〉이라는 한 가지 시도가 — 그 후 200년의 미술의 한 줄기를 만든 그 사례 — 19세기 터너였어요.

1839년 사진이 발명된 후 약 50년 안에 미술의 거의 모든 큰 줄기가 바뀌었어요. 어떤 사진이 어떤 미술을 어떻게 바꿨을까요. 다섯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사실 묘사의 의무〉가 사라졌어요. 그 시대까지 화가의 가장 큰 임무가 〈한 사람의 얼굴, 한 풍경, 한 사건을 정확히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그 일을 더 빨리, 더 정확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결과 1850년대부터 화가들이 〈사실〉이 아닌 다른 한 가지 — 〈인상, 감정, 추상〉 — 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한 순간의 포착〉이 가능해졌어요. 사진은 한 시간의 한 순간을 〈영구히〉 잡을 수 있는 첫 도구였습니다. 그 가능성이 화가들에게 〈한 순간의 빛, 한 순간의 색, 한 순간의 분위기〉를 그리려는 새 의지를 주었어요. 그것이 1860년대부터 시작되는 〈인상주의〉의 가장 큰 시조가 됩니다.
셋째 〈주제의 자유〉가 생겼어요.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큰 그림은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초상〉 같은 큰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그 모든 큰 주제를 자기 도구로 잡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은 〈작은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카페, 댄스파티, 빨래터, 들판 — 그 모든 작은 자리가 새 그림의 주제가 됩니다.
넷째 〈색의 자유〉입니다. 19세기 초 사진은 흑백이었어요. 그래서 화가들이 〈우리만이 색을 그릴 수 있다〉는 새 자존심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1860년대부터 화가들이 매우 강하고 자유로운 색을 사용하기 시작해요. 다섯째 〈공간의 추상화〉예요. 사진의 가장 정확한 〈선 원근법〉이 그 시대 미술의 〈한 가지 진리〉가 아니게 만들었습니다. 화가들이 점점 사진과 다른 〈납작한 공간, 비대칭 구도, 표면적 구성〉을 시도해요. 그 모든 변화가 — 5가지 답이 — 1839년 사진의 한 가지 발명에서 시작된 한 가지 큰 흐름이었습니다. 한 가지 새 기술이 한 시대의 가장 큰 미감을 결정적으로 바꾼 그 사례 — 19세기 후반의 미술이었어요.
다비드 〈마라의 죽음〉(1793),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1819),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터너 〈전함 테메레르〉(1839). 혁명의 60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의 한 지도자 장-폴 마라가 자기 욕조에서 살해되었어요. 그 사건을 한 화가가 한 점의 〈혁명 성화〉로 만듭니다.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는 자코뱅의 가장 강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어요. 그가 한 가지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매일 약 2~3시간씩 욕조 안에서 식초 물에 몸을 담그고 일했습니다. 1793년 7월 13일, 한 젊은 여자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 1768-1793)가 그를 만나러 왔어요. 그녀는 〈자코뱅의 정치를 비판하는 한 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마라가 그녀를 자기 욕조 옆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자기 옷에 숨긴 칼로 마라를 찔러 살해했어요. 그날 저녁 코르데가 체포되었고, 4일 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다비드는 마라의 친구였어요. 그가 사건 직후 즉시 마라의 시신을 보러 갔고, 약 6개월 후 1793년 11월 〈마라의 죽음〉이라는 한 점의 그림을 자코뱅 정부에 봉헌했습니다. 그림 안에서 마라는 자기 욕조 안에서 죽어 있고, 한 손에 마지막 편지를 들고 있어요. 그 편지에 〈저는 매우 가난합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한 줄이 적혀 있고, 그 위에 마라의 피가 한 점 떨어져 있습니다. 그 한 점이 — 한 가난한 시민을 위해 일하다 죽은 한 〈혁명의 성인〉 — 이라는 한 가지 시각적 신앙고백을 만들었어요.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정치적 사건이 한 〈종교적 성화〉의 형식으로 그려진 첫 사례입니다. 그림의 구도가 그 시대까지의 〈피에타(죽은 그리스도)〉의 구도와 거의 같아요. 마라의 한 손이 욕조 밖으로 떨어진 자세, 평온한 얼굴, 어두운 배경의 한 줄기 빛 — 모든 것이 옛 종교화의 시각적 코드입니다. 한 정치적 시민이 〈혁명의 성인〉으로 그려진 그 한 가지 형식이 — 그 후 약 200년의 모든 〈정치 이미지〉의 시조가 됩니다. 1815년 다비드의 망명 후 그 그림은 약 70년 동안 잊혀졌고, 1885년에 다시 〈재발견〉되어 19세기 후반 사회주의 미술의 가장 큰 시조가 됩니다.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약 400명의 시민이 프랑스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어요. 그 사건을 약 6년 후 한 화가가 한 점으로 그립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나폴레옹 군대의 점령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켰어요. 다음 날 5월 3일 새벽, 프랑스 군대의 대장 무라(Murat) 원수가 약 400명의 마드리드 시민을 4개의 자리에서 처형했습니다. 가장 큰 처형이 도시 외곽의 〈프린시페 피오 언덕(Príncipe Pío)〉에서 일어났어요. 그 사건이 그 후 6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페르디난드 7세가 스페인 왕으로 돌아온 후, 새 정부가 고야에게 그 사건을 그려 달라고 의뢰했어요.
그가 약 두 달에 걸쳐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1808년 5월 2일〉(시민 봉기)과 〈1808년 5월 3일〉(시민 처형). 두 점이 모두 1814년에 완성되었어요. 그 중 〈5월 3일〉이 미술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한 점입니다.
그림 안에서 한 흰 셔츠를 입은 시민이 두 손을 하늘 위로 들고 있어요. 그의 얼굴이 처형의 강한 빛 안에 정면으로 비치고 있고, 그 자세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두 손을 펼치고 있는 자세와 거의 같습니다. 그의 양손에 〈성흔(stigmata)〉처럼 작은 검은 점이 있어요. 그러나 그 그림의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다른 것이에요 — 처형하는 프랑스 군인들의 얼굴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두 등을 우리에게 돌리고 있고, 단지 〈무차별적인 한 가지 폭력의 기계〉처럼 보입니다. 한 그림 한 점이 〈전쟁의 폭력〉을 〈익명의 기계〉로 그린 첫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그 후 약 200년의 모든 〈전쟁 항의 그림〉의 시조가 됩니다. 1937년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직접 이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고,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8)〉도 같은 구도예요. 한 그림이 한 시대의 폭력의 시각적 정의가 된 그 사례 — 1814년 고야였습니다.

1816년 7월 프랑스 해군 호위함 메두사호가 침몰했고, 약 150명이 한 임시 뗏목 위에서 13일 동안 표류했어요. 약 15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건이 한 정치적 스캔들이 되었어요.
1816년 7월 2일, 프랑스 해군 호위함 〈메두사호(Méduse)〉가 서아프리카의 한 해안에서 좌초되었어요. 약 400명의 승객 중 250명이 7개의 작은 구조선에 옮겨 탔고, 나머지 약 150명이 한 임시 뗏목 위에 남아야 했습니다. 그 뗏목을 구조선들이 끌고 가기로 했지만, 줄이 곧 끊어졌어요. 그 후 약 13일 동안 그 뗏목이 대서양 위에서 표류했습니다. 그 13일 동안 약 135명이 굶주림, 갈증, 살인, 식인으로 죽었어요. 1816년 7월 17일에 한 영국 배가 그 뗏목을 발견했을 때, 약 15명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그 후 한 정치적 스캔들이 됩니다. 메두사호의 선장 위그 뒤로아 드 쇼마레(Hugues Duroy de Chaumareys)가 약 25년 동안 배를 운전한 적이 없었고, 부르봉 왕가가 단지 〈정치적 충성〉으로 그를 임명한 것이었어요. 한 정부의 〈정실 인사〉가 약 135명의 죽음으로 이어진 그 사실이 1817년에 한 책으로 출간되어, 프랑스 전체에 큰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그 책을 읽은 한 청년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그 사건을 한 그림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약 27세의 그가 약 18개월에 걸쳐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전 작업을 했어요. 그가 약 2개월 동안 자기 작업실 안에 시신과 잘린 신체 부위를 가져와서 그것들의 부패를 직접 관찰했습니다. 그가 또 살아남은 두 명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증언을 들었어요. 1819년 8월 살롱에 그 한 점이 출품되었습니다. 약 5×7m의 거대한 그림이었고, 그것이 그 시대 프랑스의 가장 큰 정치적 충격이 됩니다. 그가 1824년 약 32세에 한 말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 한 점이 1824년 루브르에 들어가 지금까지 그곳에 있어요. 한 정치적 스캔들이 한 점의 그림으로 영원히 기록된 그 사례 — 1819년 제리코였어요.

1830년 7월 28일 파리에서 〈영광스러운 3일〉이라 불린 시민 봉기가 일어났어요. 그 사건을 한 화가가 한 점의 가공의 그림으로 만듭니다.
1830년 7월 27, 28, 29일 — 〈영광스러운 3일(Trois Glorieuses)〉이라 불린 그 사흘 동안, 파리 시민들이 부르봉 왕가의 새 왕 샤를 10세에 대한 봉기를 일으켰어요. 약 1,800명의 시민이 죽었고, 샤를 10세가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새 왕으로 〈시민 왕(Roi citoyen)〉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가 즉위했어요.
들라크루아는 그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가 그 사건을 자기 그림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1830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그가 한 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 한가운데에 한 가공의 인물 — 가슴을 드러낸 한 여인 〈자유의 여신(Liberté)〉 — 이 한 손에 프랑스 삼색기를, 다른 한 손에 총을 들고, 죽은 시민들 위에서 행진하고 있어요. 그녀의 옆에는 한 어린 소년이 두 권총을 들고 외치고 있고, 한 부르주아 신사(검은 외투에 모자)가 총을 들고 따르고 있고, 한 노동자(흰 셔츠에 칼)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가공의 인물 〈자유의 여신〉이 한 정치적 사건의 가장 큰 시각적 상징이 된 첫 사례입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큰 정치 그림은 사건 자체의 사실을 그렸어요.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사실〉이 아니라 〈정신〉을 그렸습니다. 그 한 가지 결정이 그 후 약 200년의 모든 〈정치 상징 이미지〉의 시조가 됩니다. 1886년 미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 직접 이 그림의 영향을 받았고, 그 후 모든 혁명의 상징 — 베트남 전쟁의 〈우리는 모두 베트콩〉 포스터, 1968년 5월 파리 봉기의 포스터 — 이 모두 1830년 들라크루아의 한 가공의 인물에서 시작된 한 가지 줄기예요. 한 가공의 여인이 한 시대 전체의 상징이 된 그 사례 — 1830년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이었어요.

1838년 9월 6일의 한 노을 풍경을 본 한 화가가 그것을 자기 평생 가장 유명한 한 점으로 만들었어요. 19세기 영국 회화의 가장 큰 한 점입니다.
이 그림은 1839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 출품된 한 점이에요. 약 1m × 1.2m의 비교적 작은 크기이지만, 그 안에 한 시대 전체의 거대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림 한가운데에 거대한 흰 목조 전함 〈테메레르〉가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어요. 그 배는 1798년 진수되어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가장 큰 영광을 만든 한 척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흰 배를 끌고 가는 것이 그림의 왼쪽에 있는 한 작은 검은 〈증기 예인선〉이에요. 그 작은 증기선이 하늘로 검은 연기를 한 줄기 뿜어 올리고 있고, 그 연기가 노을의 황금빛 하늘을 가르고 있어요. 한 그림 안에 〈두 시대〉가 동시에 있어요. 거대한 흰 목조 범선 = 〈범선의 시대〉의 마지막 상징, 작은 검은 증기선 = 〈산업 혁명의 시대〉의 시작.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끌려가는〉 그 한 순간이 한 그림 한 점에 정확히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 이 그림은 사실이 아닙니다. 1838년 9월 6일의 실제 풍경에는 노을이 없었어요. 그날의 일기 기록을 보면 흐린 회색 하늘이었습니다. 또한 실제로 〈테메레르〉는 그날 아직 자기 돛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폐선이 결정된 후 모든 돛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터너는 그 모든 사실을 〈한 시대의 시각적 비유〉를 위해 의도적으로 바꿨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한 사건의 사실〉이 아니라 〈한 사건의 의미〉였어요. 1839년 살롱에서 이 그림이 큰 인기를 얻었지만, 터너는 그 그림을 어떤 가격에도 팔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은 내 마지막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어요. 1851년 그가 약 76세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서에 따라 그 그림이 영국 정부에 기증되었고, 지금까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습니다. 한 노을이 두 시대를 비춘 그 사례 — 1839년 터너였어요.
파리 카페, 19세기 낭만 안료, 빅토리아 패션, 베토벤의 음악, 그리고 산업 혁명의 철도.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9세기 파리에서 카페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그곳이 한 시대 정치, 문학, 미술의 가장 큰 사상의 모임 자리였습니다.
가장 오래된 파리 카페가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입니다. 1686년에 처음 열려서 약 34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어요. 18세기에는 그 카페에 볼테르, 루소, 디드로가 매일 모였고, 19세기에는 발자크, 위고, 베를렌이 모였습니다. 그 카페의 한 식탁이 — 한 시대의 사상가들이 〈백과사전〉을 편집하던 자리이자, 〈혁명〉을 토론하던 자리이자, 〈낭만주의〉를 선언하던 자리예요.
19세기 초부터 파리에 새 카페들이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1789년에 약 600개였던 파리 카페가 1830년경 약 3,000개로 늘어났어요. 그 카페들이 그 시대 정치적 토론의 가장 큰 자리가 되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 그 모든 봉기의 가장 큰 모의가 카페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서 그 시대 정부가 카페를 자주 단속했고, 〈정치적 토론 금지〉 같은 표지를 카페 벽에 붙였습니다.
또 한 가지 — 카페가 19세기 미술의 가장 큰 자리가 됩니다. 1860년대부터 인상주의 화가들이 〈게르부아 카페(Café Guerbois)〉, 〈누벨 아테네 카페(Café Nouvelle Athènes)〉에서 매주 모임을 가졌어요.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리 — 그 시대 인상주의의 거의 모든 화가가 그 카페의 한 식탁에서 매주 만났습니다. 한 카페의 한 식탁이 한 시대 미술의 〈편집실〉이었던 그 사례 — 19세기 파리였어요.

19세기 초중반에 안료에 두 가지 큰 혁명이 일어났어요. 첫째 〈합성 안료의 등장〉, 둘째 〈튜브 안료의 발명〉. 그 두 가지가 인상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합성 안료(synthetic pigments)〉입니다. 1828년 프랑스 화학자 장-바티스트 기메(Jean-Baptiste Guimet)가 〈합성 울트라마린(synthetic ultramarine)〉을 발명했어요. 그 전까지 천연 청금석에서 추출한 울트라마린이 황금만큼 비쌌지만, 기메의 합성 안료는 그 가격을 약 1/100로 떨어뜨렸습니다. 같은 시기 다른 합성 색들도 차례로 발명되었어요. 〈카드뮴 옐로우(cadmium yellow)〉 1817, 〈코발트 블루(cobalt blue)〉 1802, 〈비리디안 그린(viridian green)〉 1838, 〈크롬 옐로우(chrome yellow)〉 1809.
둘째 〈튜브 안료〉입니다. 1841년 미국 화가 존 G. 랜드(John G. Rand)가 한 가지 새 발명을 했어요. 안료를 작은 〈주석 튜브(tin tube)〉에 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안료는 작은 동물의 방광에 담겨 있었어요. 그 방광은 한 번 열면 다시 닫을 수 없어, 안료가 빠르게 마르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주석 튜브는 한 끝에 작은 나사가 있어, 한 번 열고 다시 닫을 수 있었어요. 그 결과 한 안료를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발명이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 〈야외 그림(plein air painting, 플레네르 회화)〉입니다. 그 전까지 화가는 자기 작업실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새 합성 안료의 가격 하락과 새 튜브 안료의 휴대성이 합쳐져, 화가들이 자기 안료를 가지고 야외에 나가 직접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1860년대부터 시작되는 〈인상주의〉의 가장 큰 시조가 되었어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 그 시대 모든 인상주의 화가가 매일 야외에 나가 직접 자연을 보고 그렸습니다. 한 가지 작은 도구 — 한 튜브 — 가 한 시대의 가장 큰 미술 운동을 만든 그 사례 — 1841년 랜드의 튜브 안료였어요.

19세기 초반 낭만주의의 한 가지 미감이 한 옷차림으로 만들어졌어요. 〈우울하고, 검고, 약간 무질서한〉 낭만의 신사(dandy)입니다.
19세기 초반 가장 큰 패션 변화가 한 가지 — 여성의 〈엠파이어 드레스(Empire dress)〉의 등장이었어요. 그 전 18세기 후반의 거대한 파니에 드레스(2미터 너비)가 1789년 혁명 후 한 번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가슴 바로 아래에 띠를 두른 매우 가볍고 흰 리넨 또는 모슬린 드레스〉가 나옵니다. 그 형식이 옛 그리스 로마 의상에서 영향을 받아, 〈고전적 단순함〉을 미감으로 했어요. 1804년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Joséphine)이 그 형식을 표준화했고, 그 후 약 20년 동안 유럽 모든 부유한 여성의 드레스가 그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1820년대부터 여성 패션이 다시 한 번 바뀌어요. 〈로맨틱 시기(Romantic Era, 1820~1850)〉의 형식이 시작됩니다. 가슴이 다시 잡히고, 어깨가 부풀고, 치마가 다시 약간 부풀어 올랐어요. 그 시기에 〈코르셋〉이 다시 부활했고, 1840년대부터는 〈크리놀린(crinoline, 거대한 페티코트 틀)〉이 등장해 다시 1850~1860년대에 절정을 이룹니다.
남성 패션의 가장 큰 변화가 〈검은 외투(redingote)〉예요. 18세기까지 남성의 옷은 매우 화려했어요. 비단, 자수, 금실, 다양한 색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남성 옷이 거의 모두 〈검은색〉이 됩니다. 그 변화의 시조가 한 영국 신사 〈조지 브룸멜(Beau Brummell, 1778-1840)〉이었어요. 그가 1810년경 〈완벽하게 깔끔한 검은 외투, 흰 셔츠, 신중한 넥타이〉를 자기 표준으로 삼았고, 그 형식이 그 후 약 200년 동안 모든 남성 정장의 시조가 됩니다. 한 사상이 한 옷차림이 된 그 사례 — 19세기 초의 낭만 패션이었어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끝낸 자리에서 음악을 다시 시작한 한 사람이에요. 그가 9개의 교향곡으로 〈고전주의 음악〉을 끝내고 〈낭만주의 음악〉을 시작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1770년 독일 본(Bonn)에서 한 궁정 가수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가 1792년 약 22세에 빈으로 옮겨, 그 후 1827년 약 5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5년 동안 그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그가 평생 작곡한 곡이 9개의 교향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16개의 현악 4중주, 5개의 피아노 협주곡, 1개의 오페라(피델리오)를 포함해 약 700곡이에요.
그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음악을 바꿨습니다. 1800~18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Sinfonia Eroica)〉이 그 변화의 시작이었어요. 그 시대까지의 모든 교향곡이 약 25~30분의 길이였지만, 베토벤의 〈영웅〉은 약 50분의 길이였습니다. 또한 그 곡은 그 시대까지의 모든 교향곡과 매우 다른 〈극적이고, 폭발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감정〉을 담고 있어요. 베토벤이 처음에 그 곡을 〈나폴레옹에게 헌정〉으로 작곡했지만,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그가 분노해서 헌정을 취소했습니다.
그의 가장 깊은 비극이 한 가지 있었어요. 약 28세부터 그가 청각을 잃기 시작했고, 약 47세에 거의 완전히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마지막 교향곡 — 〈교향곡 9번 합창(1824)〉 — 을 완전히 청각이 사라진 상태에서 작곡했어요. 그 곡의 마지막 4악장에서 한 합창단이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부릅니다. 그 한 곡이 그 후 약 200년 동안 인류 가장 큰 음악으로 평가받아요. 1985년에 그 〈환희의 송가〉가 유럽연합의 공식 〈국가〉가 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곡이 베를린에서 연주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한 평생의 끝의 한 곡이 한 시대 전체의 자유와 형제애의 노래가 된 그 사례 — 19세기 베토벤이었어요.

19세기 영국에서 약 80년 동안 일어난 산업 혁명이 인류의 삶을 거의 모든 면에서 바꿨어요. 그 변화가 미술의 모든 줄기에도 직접 영향을 주었습니다.
산업 혁명의 가장 큰 한 가지 변화가 〈속도〉였어요. 1825년 첫 공공 철도가 시속 약 24km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 속도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속도였습니다. 한 시간에 약 24km를 가는 것은 — 그 시대까지 가장 빠른 운송 수단(말 마차)의 약 2배 속도였어요. 그 결과 한 평생 자기 동네를 거의 떠나지 않았던 평민들이 처음으로 다른 도시를 방문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큰 변화가 〈대량 생산〉이에요. 그 전까지 모든 물건은 한 명의 장인이 한 점씩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 〈공장〉이라는 새 형식이 등장해, 한 공장에서 한 사람이 약 10명 또는 100명 분의 일을 기계로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결과 옷, 도자기, 가구, 책 — 모든 일상품의 가격이 빠르게 떨어졌고, 평민도 그 시대까지 부유한 사람만 살 수 있던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큰 변화가 미술과 가장 직접 연결됩니다. 〈사진〉이에요. 1839년 다게르의 사진 발명이 그 후 100년 미술의 가장 큰 흐름을 결정했어요. 카메라가 한 풍경, 한 얼굴을 사실적으로 잡을 수 있게 되면서, 화가들이 〈다른 한 가지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60년대 인상주의, 1900년대 입체주의, 1910년대 추상화 — 그 모든 새 흐름이 1839년 사진의 한 가지 발명에 대한 미술의 답이었어요. 한 시대의 새 기술이 한 시대의 미술을 결정한 그 사례 — 19세기 산업 혁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음 호 11호에서 만날 마네와 모네가 — 1839년 사진의 발명 후 약 25년 만에 시작된 한 가지 새 답이었어요.

1746 고야 출생 / 1748 다비드 출생
1769 와트의 증기 엔진
1770 베토벤 출생 / 1775 터너 출생
1789.07.14 바스티유 함락 — 프랑스 혁명 시작
1791 제리코 출생
1793.01.21 루이 16세 처형 / 1793.07.13 마라 살해 →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8 들라크루아 출생
1799 나폴레옹 권력 / 고야 〈변덕〉 80점
1804 나폴레옹 황제 / 다비드 〈대관식〉
1808.05.03 마드리드 시민 처형 →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1815 워털루 — 나폴레옹 패배
1816 메두사호 침몰 / 다비드 망명
1819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 고야 〈검은 그림〉 시작
1824 베토벤 〈교향곡 9번〉 / 제리코 사망 (32세)
1825 다비드 사망 (77세) / 영국 첫 철도
1827 베토벤 사망 (56세)
1828 고야 사망 (82세, 보르도 망명)
1830.07.28 7월 혁명 → 들라크루아 〈자유의 여신〉
1839.08.19 다게르의 사진 발명 / 터너 〈전함 테메레르〉
1841 튜브 안료 발명
1848 2월 혁명 (파리)
1851 터너 사망 (76세)

1.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 정치적 사건이 종교적 성화로.
2.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 전쟁 폭력의 시각적 정의.
3. 프리드리히 〈안개 위의 방랑자〉 약 1818 — 옆 그림. 낭만주의 풍경의 정점.
4.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9 — 정치 스캔들이 그림이 된 첫 사례.
5. 들라크루아 〈자유의 여신〉 1830 — 정치 상징 이미지의 시조.
6. 터너 〈전함 테메레르〉 1839 — 두 시대를 비춘 한 노을.
7. 다게르의 사진 1839 — 미술의 100년 흐름을 결정한 한 발명.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2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혁명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혁명이 한 시대의 미술이 된 60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사이먼 샤마 〈Power of Art〉 · T. J. 클라크 〈Farewell to an Idea〉 · 루브르·프라도·내셔널 갤러리 런던·브뤼셀 왕립 미술관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1850년부터 1880년까지 약 30년. 마네의 〈올랭피아〉, 모네의 〈인상, 해돋이〉, 그리고 인상주의가 시작된 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