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0년부터 1880년까지 약 30년 — 쿠르베의 사실주의에서 마네의 모더니즘, 그리고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한 시대를 시작한 3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한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849년 한 프랑스 화가가 한 점의 매우 이상한 그림을 그렸어요.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이었습니다. 약 7×3미터의 거대한 캔버스 안에 한 시골 마을의 평민 약 50명이 한 평민의 매장에 모여 있어요. 그 시대까지 그렇게 거대한 그림은 〈역사화·신화화〉만의 자리였는데, 한 평민의 매장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그 한 그림이 1850년 살롱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사실주의(Realism)〉의 첫 선언이었어요.
그 화가의 이름이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입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유명한 한 줄을 남겼어요. "천사를 그리려면 먼저 천사를 보여 달라." 신화의 인물, 종교의 인물, 영웅의 인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직접 본 한 시간〉을 그리는 것이 미술의 진짜 임무라는 한 가지 선언이었어요.
그 선언 후 약 13년이 지난 1863년, 한 다른 프랑스 화가가 한 점의 그림을 살롱에 출품했어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올랭피아(Olympia)〉였습니다. 그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그 시대 거의 모든 비평가가 그 그림을 비판했어요. 그러나 그 한 그림이 — 한 누드 매춘부의 정면 응시가 — 미술사의 한 가지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모더니즘(modernism)〉의 첫 선언이었어요.
그리고 1872년에 한 더 결정적인 한 점이 만들어집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그린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예요. 그 한 점이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에 출품되었을 때, 한 비평가가 비웃듯이 〈이건 그림이 아니라 인상(impression)일 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비웃음에서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어요. 한 비웃음이 한 시대 미술의 이름이 된 그 사례 — 1874년이었습니다.
이 호의 가장 큰 한 가지가 —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결정이 살롱(Salon)에서 살롱 너머의 새 자리로 옮겨 갔다는 것〉이에요. 그 시대까지 모든 큰 그림은 파리 살롱에 출품되어 그곳에서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 살롱이 새 그림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 거부가 새 화가들을 〈독립 전시〉, 〈갤러리〉, 〈딜러〉, 〈컬렉터〉라는 새 시스템으로 옮기게 만들었어요. 미술의 〈공식 권위〉가 처음으로 〈자유 시장〉으로 옮겨 간 그 한 가지 변화가 — 그 후 약 150년의 모든 현대 미술의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제1부는 다섯 풍경 — 1860년대 오스만의 파리, 전쟁 전 파리 카페, 마네의 카페, 모네의 지베르니, 드가의 발레 리허설. 제2부는 다섯 사람 — 쿠르베, 마네, 모네, 드가,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제3부는 다섯 점 —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마네 〈올랭피아〉, 모네 〈인상, 해돋이〉, 드가 〈발레 수업〉,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제4부는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1860년대 오스만의 파리에서 모네의 지베르니까지, 30년의 다섯 풍경.
쿠르베, 마네, 모네, 드가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돌 깨는 사람들, 올랭피아, 인상 해돋이, 발레 수업,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파리 카페·압생트, 인상주의 안료, 벨 에포크 패션, 19세기 음악, 오스만의 파리.
1860년대 오스만이 새로 지은 파리 거리에서 1880년대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까지. 한 시대 미술의 무게가 〈살롱〉에서 〈카페〉와 〈정원〉으로 옮겨 간 3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가 어떻게 살롱에서 카페와 정원으로 옮겨 갔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약 17년에 걸쳐 파리가 거의 완전히 새로 지어졌어요. 그 결과 한 도시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바뀌었고, 그 새 도시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자리가 됩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가 파리 지사 조르주-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에게 한 가지 큰 일을 맡겼어요. 〈파리를 다시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파리는 매우 좁고 어두운 중세 도시였어요. 좁은 골목, 약 10만 명의 빈민이 사는 슬럼, 자주 일어나는 콜레라 전염병. 오스만이 그 도시를 약 17년에 걸쳐 거의 완전히 다시 지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 한 가지 — 새 〈불르바르(boulevard, 대로)〉를 만든 것이에요. 그가 약 100km의 거대한 새 대로를 파리 한가운데에 뚫었습니다. 〈불르바르 드 세바스토폴〉, 〈불르바르 데 카퓌신〉, 〈불르바르 오스만〉 — 모두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거예요. 그 새 대로의 양옆에는 일관된 6~7층의 새 아파트가 늘어섰고, 가스등이 매일 저녁 켜졌습니다.
이 새 파리가 그 후 약 50년의 미술의 가장 큰 무대가 되었어요.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카유보트 — 그 시대 모든 인상주의 화가가 새 오스만 파리의 한 거리, 한 카페, 한 공원, 한 발레극장을 그렸습니다. 한 도시의 한 새 인프라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자료가 된 그 사례 — 1860년대 파리였어요.

1860년대부터 파리 카페가 인상주의 화가들의 공식 모임 자리가 되었어요. 그 카페에서 한 시대 미술의 거의 모든 큰 결정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유명한 두 카페가 〈게르부아 카페(Café Guerbois)〉와 〈누벨 아테네 카페(Café Nouvelle Athènes)〉예요. 게르부아는 1860년대부터 1870년대 초까지 인상주의의 첫 본거지였고, 누벨 아테네는 1870년대 후반부터 인상주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 두 카페가 모두 파리 9구의 〈피갈(Pigalle)〉 지역에 있었어요.
이 카페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약 7시부터 자정까지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였습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리, 바지유, 세잔, 졸라(작가) — 그 모든 사람이 같은 작은 식탁 주위에서 토론했어요. 그 토론의 가장 큰 주제가 한 가지 — 〈우리는 살롱에 의존하지 않는 새 전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 토론의 결과가 1874년 4월 15일에 첫 〈독립 전시〉의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다음 부에서 만날 한 사건이지요. 한 카페의 매주 토론이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사건을 만든 그 사례 — 19세기 후반 파리 카페였어요.

1865년 살롱에서 마네의 〈올랭피아〉가 큰 비판을 받았어요. 그 비판이 마네를 한 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1863년에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가 그 해 살롱에서 거부되었어요. 같은 해에 거부된 그림이 약 4,000점이었고, 그 거부에 대한 항의로 나폴레옹 3세가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을 열었습니다. 그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가장 큰 충격을 일으켰어요. 약 50,000명의 관람객이 그 그림을 비웃었습니다.
2년 후 1865년 살롱에 마네가 〈올랭피아〉를 출품했고, 그 그림이 더 큰 비판을 받았어요. 그 시대 한 비평가가 〈한 매춘부의 정면 응시가 미술이 될 수 없다〉고 적었고, 한 신문은 〈경찰을 불러 그 그림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농담했습니다. 그 비판이 마네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그 비판이 동시에 그를 그 시대 〈가장 새로운 화가〉로 만들었어요.
1866년경부터 마네가 게르부아 카페에서 매주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약 10~15명의 젊은 화가들 —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리, 드가, 피사로, 졸라 — 이 매주 모였어요. 마네는 그 모임의 〈리더〉가 되었고, 그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한 일이 — 〈자유롭고 즉흥적인 붓터치〉, 〈일상의 주제〉, 〈공기 안의 빛〉이라는 세 가지 새 미감을 그 모임에 가르친 것이었어요. 그 세 가지가 약 6년 후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의 표준이 됩니다.

1883년 약 43세의 모네가 파리 근교 지베르니로 옮겼어요. 그 후 약 43년 동안 그가 자기 정원만을 거의 평생 그렸습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에요. 모네가 1883년에 그곳에 한 작은 집을 빌렸고, 1890년 약 50세에 그 집을 샀습니다. 그 후 약 36년 동안 그가 그곳에서 살면서, 자기 정원을 직접 디자인하고 평생 그렸어요.
그의 정원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첫째 〈집 앞의 꽃 정원(Clos Normand)〉 — 색이 강한 다양한 꽃이 가득한 자리. 둘째 〈물 정원(Jardin d'eau)〉 — 일본식 다리, 수련, 등나무가 있는 한 인공 연못. 그 두 정원이 모네의 평생 그림의 거의 모든 주제가 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수련(Nymphéas)〉 연작이에요. 1899년부터 1926년까지 약 27년에 걸쳐 그가 약 250점의 〈수련〉을 그렸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작품이 1914~1926년의 〈대형 수련(Grandes décorations)〉이에요. 약 2미터 × 13미터의 거대한 패널 8점으로 구성된 이 작품이 그가 죽은 후 1927년 파리 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의 두 타원형 방에 영구 설치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정원을 평생 그린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에드가 드가는 평생 약 1,500점의 발레 그림을 그렸어요. 그가 발레 무대 위가 아닌, 〈리허설장과 백스테이지〉를 그렸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1870년대부터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비공식 후원자〉 같은 자리였어요. 그가 매주 발레 리허설장에 들어가 직접 관찰할 수 있었고, 약 30년에 걸쳐 약 1,500점의 발레 관련 그림 — 유화, 파스텔, 드로잉, 조각 — 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발레는 〈무대 위의 화려한 공연〉이 아니었어요. 그가 그린 것은 한 가지 — 〈리허설장의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한 발레리나가 자기 토 슈즈의 끈을 묶고 있는 자리, 한 어린 발레리나가 자기 등을 긁고 있는 자리, 한 발레리나가 의자에 앉아 자기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는 자리. 그 모든 그림이 〈무대 위의 환상〉이 아닌 〈무대 뒤의 노동〉을 그렸어요.
그 한 가지 결정 — 〈한 직업의 일상 노동을 그리는 것〉 — 이 그 후 모든 인상주의의 가장 큰 줄기가 됩니다. 카페의 웨이트리스, 빨래터의 여인, 거리의 청소부 — 모두 그 시대의 〈평범한 노동자〉가 처음으로 큰 그림의 주인공이 된 사례예요. 한 화가가 한 직업을 가까이 본 그 결정이 — 19세기 후반 미술의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쿠르베(1819-1877), 마네(1832-1883), 모네(1840-1926), 드가(1834-1917). 한 시대 새 미술을 시작한 네 사람과,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살롱이 거부했나.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쿠르베가 한 가지 결정적으로 미술을 바꿨어요. 〈평민의 일상이 큰 그림이 될 수 있다〉는 한 가지 선언이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동부 작은 시골 마을 오르낭(Ornans)에서 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약 20세에 파리로 와서 화가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49년 약 30세에 그가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이라는 약 7×3미터의 거대한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대까지 그렇게 거대한 캔버스는 〈역사화·신화화〉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쿠르베는 그 거대한 캔버스 위에 한 시골 평민의 매장을 그렸어요. 약 50명의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 한 무덤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그림이 1850년 살롱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어요. 비평가들이 〈평민의 매장이 신의 자리에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쿠르베가 즉시 답했어요. "천사를 그리려면 먼저 천사를 보여 달라." 한 가지 매우 강한 한 줄로, 그가 〈사실주의(realism)〉라는 새 양식을 선언했습니다.
1871년 약 52세의 쿠르베가 파리 코뮌(Paris Commune)에 참여해, 한 가지 큰 정치적 결정을 했어요. 〈방돔 광장 기둥(Colonne Vendôme)〉의 철거를 주도한 거예요. 그 기둥은 나폴레옹의 전쟁 승리를 기념한 것이었고, 코뮌이 그것을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철거했습니다. 코뮌이 무너진 후 쿠르베가 체포되어 약 6개월 감옥에 갔고, 그 후 그 기둥의 재건 비용 약 32만 프랑을 그가 평생 갚도록 판결을 받았어요. 그 빚 때문에 쿠르베가 1873년 스위스로 망명했고, 1877년 약 58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화가가 자기 정치적 신념으로 평생을 잃은 그 사례 — 19세기 쿠르베였어요.

마네는 자기 자신을 〈인상파〉라 부르지 않았어요. 그는 평생 살롱에 인정받기를 갈망했지만, 그의 그림이 살롱을 깨뜨린 한 시대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파리의 한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가 법원 판사였고, 어머니가 외교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약 16세에 해군 학교에 들어가 약 2년 동안 항해를 다녔지만, 그 후 화가의 길로 결정했어요. 1850년 약 18세에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작업실에 견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점이 — 평생 〈살롱에 인정받기〉를 갈망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는 자기 친구들 — 모네, 르누아르, 드가 — 의 〈독립 인상파 전시〉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 그림을 살롱에 출품했어요. 그러나 살롱이 그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5년 〈올랭피아〉, 1882년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 모두 살롱에서 큰 비판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 비판이 곧 그를 〈가장 새로운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게르부아 카페에서 모네, 르누아르 같은 젊은 화가들이 그를 〈인상주의의 리더〉로 봤어요. 마네 자신은 그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 형식 — 평평한 색면, 자유로운 붓터치, 일상의 주제 — 이 그 시대 모든 인상주의 화가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883년 4월 30일, 그가 약 51세에 매독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마지막 그림 — 1882년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 이 우리가 C5에서 만날 한 점이고, 19세기 후반 미술의 가장 큰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모네는 1840년에 태어나 1926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 86년 동안 그가 인상주의의 시작에서 추상화의 시조까지 — 미술사의 약 60년을 직접 따라갔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약 5세에 가족이 노르망디 르 아브르로 옮겼어요. 그곳에서 약 19세까지 자랐고, 그곳의 한 풍경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을 만났습니다. 부댕이 그에게 한 가지를 가르쳤어요. "자연 안에서 직접 그려라." 그 한 가르침이 그의 평생 미술 양식을 결정합니다.
1859년 약 19세에 그가 파리로 와서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작업실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르누아르, 시슬리, 바지유와 친구가 됩니다. 1872년 약 32세에 그가 한 점의 작은 그림을 그렸어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입니다. 우리가 C3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그림이 1874년 첫 〈독립 전시〉에서 한 비평가의 비웃음을 받았고, 그 비웃음이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이름이 됩니다.
1883년 그가 지베르니로 옮겼고, 그 후 약 43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자기 정원을 평생 그렸어요. 가장 유명한 작품이 〈수련(Nymphéas)〉 연작입니다. 그가 약 73세부터 약 26세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기 시작했어요. 그 시력 손실이 그의 후기 그림을 점점 〈추상화에 가까운 색의 흐름〉으로 만들었습니다. 1926년 12월 5일, 그가 86세에 지베르니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죽은 다음 해 1927년에 그의 〈대형 수련〉이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영구 설치되어, 그 한 작품이 그 후 100년 동안 인류가 본 가장 큰 추상화의 시조가 됩니다.

드가는 인상파의 모든 8회 전시 중 7회에 참여했지만, 자기 자신을 〈인상파〉라 부르기를 평생 거부했어요. 그는 자기를 〈리얼리스트〉, 〈독립파〉라 불렀습니다.
에드가 드가는 1834년 파리의 한 부유한 은행가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은 일레르-제르맹-에드가 드 가스(Hilaire-Germain-Edgar de Gas)였고, 그가 약 30대에 자기 이름을 〈드가(Degas)〉로 단순화했습니다. 1853년 약 19세에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1855년 파리 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했어요. 그곳에서 그가 신고전주의 거장 앵그르의 영향을 직접 받았고, 그 영향이 그의 평생 〈선의 정확성〉을 만들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그가 마네와 친구가 되어 게르부아 카페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가 1874년 첫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지만, 그 전시의 정신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습니다. 인상파의 가장 큰 미감이 〈야외에서 자연광 안의 순간〉이었다면, 드가는 〈실내의 인공광 안의 일상〉을 그렸어요. 그래서 그가 항상 자기를 〈인상파〉가 아니라 〈리얼리스트〉라 불렀습니다.
그의 가장 큰 주제가 한 가지 — 〈여성의 노동〉이었어요. 발레리나, 빨래터의 여인, 가수, 모자 가게의 여공, 매춘부 — 그의 평생 그림이 약 80%가 여성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여성이 〈매혹적인 대상〉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이었어요. 한 발레리나가 자기 토 슈즈를 묶고 있는 모습, 한 여자가 자기 뒷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 한 여자가 욕조에서 몸을 닦고 있는 모습 — 그 모든 그림이 〈가장 평범한 한 시간〉의 한 사람의 노동을 그렸습니다. 1917년 9월 27일, 그가 약 83세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마지막 약 20년 동안 그가 거의 시력을 잃었지만, 그 약한 시력 안에서 그가 점점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만든 약 70점의 작은 청동 발레리나 조각이 — 그의 마지막 시기의 자료가 됩니다.

1874년 4월 15일, 파리에서 인류 역사상 첫 〈독립 전시〉가 열렸어요. 그 전시가 〈인상주의〉라는 한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왜 그 시점에 그것이 일어났을까요. 다섯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살롱의 거부〉예요. 1860년대부터 살롱이 새 화가들의 그림을 자주 거부했어요. 마네의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5년 〈올랭피아〉, 모네의 거의 모든 1860년대 그림이 거부되거나 비판받았습니다. 그 거부가 새 화가들에게 〈우리만의 전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한 가지 결정을 강요했어요.
둘째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입니다. 그 전쟁 후 파리 코뮌이 무너지면서, 약 30,000명의 파리 시민이 처형되었어요. 그 폭력적 사건 후 프랑스 미술계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새 시작이 그 불안정 안에서 가능했어요.
셋째 〈갤러리와 딜러의 등장〉이에요. 1860년대부터 파리에 처음으로 〈상업 갤러리〉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 가장 큰 인상파 후원자가 됩니다. 그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자기 갤러리에서 직접 팔아, 그들이 살롱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만들었어요.
넷째 〈사진과 일본 판화의 영향〉입니다. 1839년 사진의 발명, 그리고 1853년 일본 개항 후 들어온 일본 판화(우키요에)가 그 시대 화가들에게 새 시각을 주었어요. 다섯째 〈친구들의 모임〉이에요. 약 10년의 게르부아 카페 모임이 그 시대 화가들 사이에 매우 강한 친구 관계를 만들었어요. 그 친구 관계가 1874년 첫 독립 전시를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한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다섯 가지 조건이 1874년에 모인 그 사례 — 인상주의의 첫 시작이었어요.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1849), 마네 〈올랭피아〉(1863), 모네 〈인상, 해돋이〉(1872), 드가 〈발레 수업〉(1874),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 사실주의·인상주의 시작 30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쿠르베가 1849년에 그린 이 한 점이 〈사실주의(Realism)〉의 첫 선언이에요. 한 점의 이 그림이 그 후 약 50년의 미술의 흐름을 결정합니다.
1849년 가을 어느 날, 쿠르베가 자기 고향 오르낭의 한 시골길을 걷다가 두 명의 〈돌 깨는 노동자〉를 봤어요. 한 명은 약 70세의 늙은 남자, 다른 한 명은 약 15세의 소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큰 망치로 한 길의 돌을 깨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쿠르베에게 강한 인상을 줬고, 즉시 그가 두 사람을 자기 작업실로 초대해 직접 모델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이 약 1.65×2.57m의 거대한 캔버스에 두 노동자만을 그린 한 점이에요. 그 시대까지 그 정도로 큰 캔버스는 〈역사화·신화화·종교화〉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쿠르베가 그 자리에 두 평민의 노동을 그렸어요. 그 한 가지 결정이 그 시대 미술의 한 가지 큰 룰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 그림은 1850년 살롱에 출품되어 큰 충격을 일으켰어요. 그 시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이 그림을 〈노동자 계급의 첫 시각적 대표〉로 보았습니다. 1854년 한 부유한 컬렉터가 이 그림을 사서 독일 드레스덴(Dresden)으로 가져갔어요. 1945년 2월 13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드레스덴이 영국과 미국 폭격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폭격으로 〈돌 깨는 사람들〉이 소실되었어요. 지금 우리는 흑백 사진으로만 그 그림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그림이 그렇게 사라진 그 사례 — 미술사의 한 가지 깊은 비극이에요.

마네의 〈올랭피아〉는 미술사에서 가장 큰 〈응시의 그림〉이에요. 그 한 누드 여인의 정면 응시가 — 그 시대 미술과 사회의 가장 큰 한 가지 룰을 깨뜨렸습니다.
1863년 마네가 약 31세에 그린 이 한 점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어요. 그림 안의 한 누드 여인 — 〈올랭피아〉 — 이 침대 위에 누워서 정면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어요. 그녀의 옆에 한 흑인 하녀가 그녀에게 한 다발의 꽃을 보여 주고 있고, 침대 끝에는 한 검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이 누드가 〈신화의 비너스〉가 아니라 〈한 시대의 매춘부〉라는 것이에요. 그 시대까지 모든 누드 그림은 〈비너스〉, 〈비유의 인물〉, 〈먼 신화〉였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한 동시대 매춘부 — 그 모델의 이름이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 그녀가 그 시대 한 카페의 가수이자 가끔 매춘 — 를 그 자리에 놓았어요.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가 그 시대 파리의 매춘부들이 자주 사용한 가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한 가지가 — 그녀의 〈응시〉예요. 그 시대까지 모든 누드 여인은 〈우리를 보지 않거나, 부드럽게 옆을 보거나, 잠들어 있는〉 자세였습니다. 우리가 6호 C3에서 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 정면을 보지만, 그 응시가 부드러웠어요. 그러나 〈올랭피아〉는 매우 직접적이고 도전적인 정면 응시예요. 그녀가 자기 한 손으로 자기 음부를 가리고 있는 동작이 — 〈숨김〉이 아니라 〈자기 거래의 가격을 결정하는 사람의 자세〉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한 시대의 〈매혹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노동의 주인〉이에요. 그 한 가지 응시가 그 시대 모든 비평가의 분노를 일으켰고, 동시에 그 응시가 그 후 약 150년의 모든 〈여성 누드〉의 시각적 코드를 영원히 바꿨습니다. 한 응시가 한 시대를 바꾼 그 사례 — 1863년 마네의 〈올랭피아〉였어요.

1872년 모네가 르 아브르 항구의 한 새벽 풍경을 약 50×60cm의 작은 캔버스에 그렸어요. 약 2년 후 한 비평가의 비웃음이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됩니다.
이 그림은 1872년 11월 모네가 자기 고향 르 아브르의 한 호텔 창문에서 본 새벽 풍경이에요. 약 7시 35분의 한 노을 빛 안에 부두의 작은 배들과 멀리 보이는 굴뚝의 검은 연기가 있었어요. 모네가 자기 호텔 방에서 약 1시간 반에 걸쳐 그 풍경을 작은 캔버스에 빠르게 그렸습니다. 매우 자유로운 붓터치, 흐릿한 색, 거의 〈스케치〉에 가까운 그림이었어요.
이 그림이 1874년 4월 15일 첫 〈독립 전시〉에 출품되었습니다. 약 30명의 화가 —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리, 세잔, 모리조 — 가 약 165점의 그림을 카퓌신 대로의 한 작은 갤러리에 전시했어요. 약 4주 동안 약 3,500명의 관람객이 들어왔습니다.
1874년 4월 25일,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가 〈샤리바리(Le Charivari)〉라는 풍자 신문에 한 비평을 적었어요. 그 글의 제목이 〈인상파의 전시(L'Exposition des impressionnistes)〉였습니다. 그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웃듯이 적었어요. "이건 그림이 아니라 인상(impression)일 뿐이다. 벽지가 더 완성된 것 같다." 그 비웃음에서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이름이 만들어집니다. 한 비웃음이 한 시대 미술의 이름이 된 그 사례 — 1874년이었어요. 이 그림은 1985년 10월 27일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도난당했고, 약 5년 후 1990년 12월 코르시카에서 다시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드가의 〈발레 수업〉은 그 시대까지 모든 발레 그림과 결정적으로 다른 한 점이에요. 그가 그린 것은 〈무대의 환상〉이 아니라 〈리허설장의 일상〉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약 1873~1876년 드가가 약 39~42세 때에 그린 한 점이에요. 그림 안의 자리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한 리허설장입니다. 약 24명의 어린 발레리나들이 한 큰 방에 모여 있고, 그들의 가운데에 한 늙은 발레 마스터가 자기 지팡이를 들고 서 있어요. 그 마스터가 약 1830~1850년대에 가장 큰 발레리나였던 쥘 페로(Jules Perrot)였습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이 그림 안의 발레리나들이 〈춤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그 시대까지 모든 발레 그림은 〈공연 중의 우아한 자세〉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드가는 그 모든 것을 깨뜨렸어요. 그림 안의 한 발레리나가 자기 등을 긁고 있고, 다른 한 명이 자기 토 슈즈의 끈을 묶고 있고,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자기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고, 한 명이 자기 머리를 빗고 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공연〉이 아니라 〈일〉이에요.
그 한 가지 결정 — 〈한 직업의 무대 뒤를 그리는 것〉 — 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일상 그림〉의 시조가 됩니다. 19세기 후반의 마네, 카유보트, 카사트의 그림, 20세기의 호퍼,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 모두 그 시대 〈무대 뒤의 일상〉이라는 한 주제의 후예예요. 한 그림이 한 시대 〈일〉의 시각적 정의가 된 그 사례 — 19세기 드가였습니다.

마네의 마지막 큰 그림이 1882년의 이 한 점이에요. 그 그림 안의 한 거울이 — 19세기 후반 가장 신비로운 한 미술적 비밀입니다.
1881~1882년 마네가 약 49~50세에 그린 이 한 점이 그의 마지막 큰 그림이에요. 1882년 살롱에 출품되었고, 1883년 4월 30일 그가 약 51세에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입니다. 그림 안의 자리는 파리 가장 유명한 카바레 〈폴리-베르제르(Folies Bergère)〉의 한 술집이에요. 그림 한가운데에 한 여종업원 〈쉬종(Suzon, 실제 모델 이름)〉이 자기 술집 카운터 뒤에 서 있고, 그녀의 뒤에는 한 거대한 거울이 있습니다.
그 거울이 미술사의 한 가지 큰 신비가 됩니다. 거울 안에 그 술집 전체의 풍경 — 약 100명의 손님, 무대 위의 곡예사, 가스등 — 이 비치고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 거울 안에 〈쉬종 자신의 뒷모습〉과 〈한 신사〉가 함께 비치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의 위치가 그림 한가운데의 쉬종의 정면과 일치하지 않아요. 거울에 비친 그녀는 약간 옆으로 기울어 있고,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한 신사가 우리의 시선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공간의 어긋남〉이 1882년부터 약 140년 동안 학자들의 큰 논쟁이 됩니다. 마네가 단순히 실수했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 어긋남을 그렸을까. 가장 깊은 해석이 한 가지 있어요. 마네가 그린 것은 〈한 사실〉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점에서 본 두 시간의 합성〉이라는 것이지요. 쉬종이 자기 카운터 뒤에서 약간 다른 두 시간의 두 자세로 동시에 있는 — 그 한 가지 이중 노출 같은 효과가 — 그 후 약 50년 후 입체주의(피카소)의 〈여러 시점의 결합〉의 시조가 됩니다. 한 화가의 마지막 그림이 그 후 50년의 미술의 한 줄기를 만든 그 사례 — 1882년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었어요.
19세기 파리 카페와 압생트, 인상주의 안료, 벨 에포크 패션, 19세기 음악, 그리고 오스만의 파리 인프라.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9세기 후반 파리 카페의 가장 큰 음료가 한 가지 — 〈압생트(absinthe)〉예요. 그 한 잔의 초록색 술이 그 시대 거의 모든 화가, 시인, 작곡가의 일상이었습니다.
압생트는 18세기 후반 스위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한 가지 약초 술이에요. 알코올 농도 약 60~75%의 매우 강한 술로, 〈쓴쑥(wormwood)〉, 〈아니스(anise)〉, 〈펜넬(fennel)〉을 비롯한 약 8가지의 약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진한 초록색을 띠어, 〈초록 요정(la fée verte)〉이라 불렸어요.
1870년대부터 압생트가 파리 카페의 표준 음료가 됩니다. 한 잔의 가격이 와인의 약 1/3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시인, 화가, 학생도 마실 수 있었어요. 그 시대 인상주의 화가들 — 마네, 드가, 르누아르, 베를렌, 랭보 — 거의 모두가 매일 카페에서 압생트를 마셨습니다. 드가의 1876년 그림 〈압생트(L'Absinthe)〉가 그 시대 카페 풍경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린 한 점이에요.
그러나 압생트가 그 시대 약 30년 후 큰 사회적 문제가 됩니다. 압생트의 한 성분 〈투욘(thujone)〉이 환각과 정신 이상을 일으킨다고 그 시대 의사들이 발표했어요. 1915년 프랑스 정부가 압생트를 〈불법화〉했고, 그 후 약 90년 동안 유럽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압생트가 금지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 다시 합법화되어 지금은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한 잔의 술이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자료이자 한 시대의 가장 큰 사회 문제가 된 그 사례 — 19세기 후반 압생트였습니다.

우리가 10호 D2에서 본 19세기의 두 가지 안료 혁명 — 합성 색의 등장과 튜브 안료의 발명 — 이 인상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1828년 합성 울트라마린, 1841년 튜브 안료, 1850년대 합성 비리디안 그린과 코발트 바이올렛 — 그 모든 새 색이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화가들의 손에 들어갔어요. 그 결과 그들이 그 전 시대의 어떤 화가도 사용할 수 없었던 강한 색의 팔레트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튜브 안료〉예요. 그 한 가지 도구가 화가들이 자기 작업실을 떠나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인상주의의 가장 큰 미감 〈자연광 안의 한 순간을 직접 그리기〉가 — 그 작은 튜브가 없으면 불가능했어요. 르누아르가 한 말이 남아 있어요. "튜브 안료가 없었다면, 인상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결정적인 한 가지가 〈색의 새 사용법〉이에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 시대까지의 모든 화가와 다른 한 가지 결정을 했어요. 그들이 자기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작은 한 점씩 직접 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 멀리서 보면 그 작은 점들이 〈눈 안에서 자동으로 섞여서〉 새 색이 보이는 효과가 만들어집니다. 〈광학적 색 혼합(optical mixing)〉이라 부른 그 효과가 — 그 후 약 1880년대 후반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점묘법(pointillism)〉으로 발전합니다. 한 작은 튜브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변화를 만든 사례 — 1841년 튜브 안료였어요.

19세기 후반 여성 패션의 가장 큰 특징이 한 가지 — 〈버슬(bustle)〉이에요. 그 시대까지 옆이나 아래로 부풀던 치마가 1870년대부터 〈뒤로〉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1860년대까지 여성 드레스의 가장 큰 형식이 〈크리놀린(crinoline)〉이었어요. 약 4~5미터의 둘레로 사방으로 부푼 거대한 페티코트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그 형식이 빠르게 사라지고, 〈버슬〉이 등장해요. 버슬은 치마의 뒤쪽만 부풀린 새 형식이었습니다. 작은 패드나 철사 틀을 치마의 뒤쪽 안에 넣어, 한 여인이 옆에서 보면 〈약간 새의 꼬리 같은〉 모양이 되었어요.
이 새 형식이 그 시대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라 불린 시기의 가장 큰 패션이 됩니다. 마네, 드가, 르누아르, 카유보트의 그림 안의 거의 모든 여인이 그 시대의 버슬 드레스를 입고 있어요. 또 한 가지 — 코르셋이 다시 매우 강하게 입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 평균 여성의 허리가 코르셋으로 약 18~20인치(약 46~51cm)까지 조여졌어요.
가장 큰 변화 한 가지가 〈백화점〉이었어요. 1852년 파리에 첫 번째 큰 백화점 〈봉 마르셰(Le Bon Marché)〉가 열렸고, 그 후 약 20년 동안 파리에 약 10개의 큰 백화점이 등장했습니다. 그 한 가지 변화가 〈패션의 민주화〉를 만들었어요. 그 전까지 모든 옷은 〈맞춤 제작(haute couture)〉이었고, 부유한 사람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화점이 〈기성복(prêt-à-porter)〉을 팔면서, 평민도 자기 옷을 더 빠르고 더 싸게 살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도시의 한 새 시스템이 한 시대의 패션을 결정한 사례 — 19세기 후반 파리였어요.

19세기 후반 유럽 음악의 가장 큰 두 사람이 —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프랑스의 클로드 드뷔시(1862-1918)였어요. 그 두 사람이 매우 다른 두 길을 갔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가 한 가지 새 개념을 만들었어요. 〈종합 예술 작품(Gesamtkunstwerk)〉입니다. 한 오페라 안에 음악, 연극, 시, 미술, 무대 디자인, 의상, 안무가 모두 한 가지 통합된 형식으로 함께 있어야 한다는 한 가지 비전이었어요. 그가 1876년 독일 바이로이트(Bayreuth)에 자기 전용 극장을 세우고, 그곳에서 자기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를 처음 공연했습니다. 그 4부작이 약 16시간 — 4일에 걸쳐 — 동안 연주되는 한 가지 거대한 작품이에요. 그 한 가지 비전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멀티미디어 예술〉의 시조가 됩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다른 한 흐름이 있었어요.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가 한 가지 새 음악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음악적 인상주의(impressionist music)〉라 불린 양식이에요. 그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 한 가지 — 〈명확한 멜로디나 화성 진행 대신 색깔과 분위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1894년 그가 약 32세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이 그 새 양식의 첫 결정체였어요. 그 곡이 시작된 후 모든 클래식 음악이 약간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 두 흐름의 차이가 한 가지 — 바그너는 〈웅장한 신화의 거대한 종합〉을, 드뷔시는 〈한 짧은 순간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그렸어요. 그 차이가 그 후 20세기 음악의 두 큰 줄기 — 거대한 후기 낭만주의 vs 작은 모더니즘 — 가 됩니다. 같은 시대의 두 가장 큰 음악가가 매우 다른 두 길을 간 그 사례 — 19세기 후반 음악이었어요.

우리가 A1에서 본 오스만의 파리 재건이 〈눈에 보이는 거리〉만이 아니었어요. 그 재건의 가장 큰 부분은 〈지하의 인프라〉였습니다.
오스만의 17년의 재건이 만든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한 가지 — 약 600km의 새 하수도(égout)예요. 그 시대까지 파리는 매우 더러운 도시였습니다. 거리에 모든 오물이 흘렀고,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자주 일어났어요. 1832년의 한 콜레라 전염병으로 약 19,000명의 파리 시민이 죽었고, 1849년의 또 다른 콜레라로 약 16,000명이 죽었습니다. 그 한 가지 문제가 오스만의 가장 큰 동기였어요.
그가 만든 새 하수도가 매우 큰 시스템이었습니다. 모든 거리 아래에 한 개의 큰 하수도가 있고, 그 모든 하수도가 한 가지 큰 메인 라인으로 연결되어 도시 밖의 한 정수장으로 흘러갔어요. 그 시스템이 그 후 약 150년 동안 파리의 표준 인프라가 됩니다. 지금도 파리의 약 80%의 하수도가 1860년대에 오스만이 만든 그 시스템이에요.
또 한 가지 — 〈가스등(éclairage au gaz)〉입니다. 1855년부터 오스만이 파리의 거의 모든 거리에 가스등을 설치하기 시작했어요. 1870년경 파리의 약 35,000개의 가스등이 매일 저녁 켜졌습니다. 그 결과 파리가 처음으로 〈밤에도 생활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어요. 그 한 가지 변화가 그 시대 카페 문화, 야간 산책, 카바레의 가장 큰 시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공원〉이에요. 오스만이 파리에 약 4개의 큰 공원 — 불로뉴 숲, 뱅센 숲, 부테-쇼몽 공원, 몽수리 공원 — 을 만들었습니다. 그 공원들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가장 큰 야외 그림 자리가 되었어요. 한 도시의 한 인프라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자료가 된 그 사례 — 19세기 후반 오스만의 파리였습니다.

1819 쿠르베 출생 / 1832 마네 출생 / 1834 드가 출생
1840 모네 출생
1841 튜브 안료 발명 (랜드)
1849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오르낭의 매장〉
1853 오스만의 파리 재건 시작 (~1870)
1862 드뷔시 출생
1863 〈낙선전〉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1865 〈올랭피아〉 살롱 출품 → 큰 비판
1870~187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 파리 코뮌
1872 모네 〈인상, 해돋이〉
1874.04.15 첫 〈인상파 전시〉 — 인상주의의 시작
1876 바그너 바이로이트 극장 개관 / 드가 〈압생트〉
1877 쿠르베 사망 (스위스 망명)
1882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3 마네 사망 (51세) / 모네 지베르니 정착
1894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1915 압생트 금지 (90년)
1917 드가 사망 (83세)
1926 모네 사망 (86세) / 1927 〈대형 수련〉 오랑주리 설치

1.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 — 사실주의의 첫 선언.
2. 마네 〈올랭피아〉 1863 — 한 응시가 한 시대를 바꾼 한 점.
3.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 한 비웃음이 한 시대 이름이 된 점.
4. 드가 〈발레 수업〉 약 1874 — 일상이 큰 그림이 된 사례.
5.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2 — 거울의 신비.
6. 모네 〈건초더미〉 1890 — 옆 그림. 같은 주제 25점 연작.
7. 모네 〈대형 수련〉 1914~1926 — 추상화의 시조.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3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시작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시대가 살롱을 떠나 카페와 정원으로 간 30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T. J. 클라크 〈The Painting of Modern Life〉 · 존 리월드 〈History of Impressionism〉 · 오르세·마르모탕-모네·코톨드 갤러리·내셔널 갤러리 런던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1880년부터 1900년까지 약 20년. 세잔의 형태, 고흐의 색, 고갱의 영혼. 인상주의를 깨뜨린 세 사람의 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