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부터 1920년까지 약 20년 — 마티스의 야수파, 피카소의 입체주의, 칸딘스키의 첫 추상화. 한 시대 미술이 〈사실의 세계〉를 영원히 떠난 2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세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905년 가을 파리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한 가지 매우 강한 색의 그림들이 전시되었어요. 그 그림 안의 색이 — 사실이 아닌 〈한 화가가 느낀 색〉이었습니다. 한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elles)이 그 전시실에서 한 작은 르네상스 조각을 보고 한 줄로 적었어요. "한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갇혀 있다(Donatello parmi les fauves)." 그 한 마디에서 〈야수파(Fauvism)〉라는 새 양식의 이름이 만들어집니다. 그 운동의 가장 큰 화가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어요.
그 후 약 2년이 지난 1907년 6월,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작은 작업실 〈바토 라부아르(Bateau-Lavoir)〉에서 약 25세의 한 스페인 화가가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어요. 그 그림이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입니다. 그 한 점이 입체주의(Cubism)의 시작이고, 동시에 20세기 미술의 가장 큰 한 시작이었어요. 그 화가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였습니다.
약 3년 후 1910년 12월, 독일 뮌헨에서 한 러시아 화가가 한 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 그림이 — 인류 역사상 〈첫 완전한 추상화〉라 알려진 한 점입니다. 〈무제(첫 추상 수채화)〉. 그 화가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였어요. 그가 자기 책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1911)〉에서 한 가지 결정적 선언을 했습니다. "그림은 〈한 외부 사실〉이 아니라 〈한 내적 필연〉의 표현이다."
이 호의 가장 큰 한 가지 — 〈약 20년 안에 미술이 한 가지 가장 큰 변화를 했다〉는 것이에요. 1900년의 미술은 거의 〈사실 묘사〉의 한 가지 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의 미술은 〈사실〉을 거의 완전히 떠나, 〈색〉, 〈형태〉, 〈정신〉으로 옮겨 갔어요. 그 약 20년이 인류 미술사 가장 큰 한 가지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제1부는 다섯 풍경 — 피카소의 바토 라부아르, 마티스의 〈춤〉, 칸딘스키의 뮌헨, 1900년 빈, 새 모더니스트 안료. 제2부는 다섯 사람 —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클림트,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제3부는 다섯 점 — 〈아비뇽의 처녀들〉, 마티스 〈춤〉, 칸딘스키 〈구성 7〉, 클림트 〈키스〉, 뭉크 〈절규〉. 제4부는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피카소의 바토 라부아르에서 칸딘스키의 뮌헨까지, 20년의 다섯 풍경.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클림트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아비뇽의 처녀들, 춤, 구성 7, 키스, 절규.
몽마르트르 카페, 모더니스트 안료, 1910년 패션, 스트라빈스키, 빈 분리파.
1907년 피카소의 바토 라부아르 작업실에서 1912년 칸딘스키의 뮌헨까지. 한 시대 미술이 〈사실〉에서 〈형태와 색과 정신〉으로 옮겨 간 20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가 어떻게 사실을 떠났는지를 다섯 자리로 보여 드립니다.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매우 가난한 작업실 〈바토 라부아르〉에서, 약 25세의 한 스페인 화가가 1907년 6월에 한 점의 그림을 완성했어요. 그 한 점이 — 20세기 미술의 시작이었습니다.
〈바토 라부아르(Bateau-Lavoir)〉는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매우 가난한 화가들의 작업실 건물이었어요. 그 건물의 모양이 한 〈빨래터 배(bateau-lavoir)〉를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1900년경부터 약 30명의 가난한 화가, 시인, 작가가 그 건물의 작은 방들에 모여 살았어요. 화장실은 없고, 매우 추웠고, 한 달 임대료가 약 15 프랑이었습니다.
1904년 약 23세의 파블로 피카소가 그 건물의 한 작은 방에 들어왔어요. 그가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인 그림 — 〈아비뇽의 처녀들〉 — 을 그렸습니다. 1907년 6월에 완성된 그 한 점이 약 2.4×2.3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다섯 명의 누드 여인이 그려져 있어요. 그러나 그 다섯 여인의 몸이 〈매우 이상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몇몇은 한 얼굴이 정면과 옆모습이 동시에 보이게 그려져 있고, 그들의 몸은 거의 〈기하학적 형태(원기둥, 사각형, 삼각형)〉로 환원되어 있어요.
그 한 그림이 — 세잔이 1906년에 죽기 전에 한 줄로 적은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로 다루어라〉를 직접 그림으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1907년 가을 피카소가 자기 친구 화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에게 그 그림을 보여 줬어요. 브라크가 처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그도 같은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908~1914년 약 6년 동안 두 사람이 함께 〈입체주의(Cubism)〉라는 새 양식을 만들었어요. 한 작은 작업실에서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된 그 사례 — 1907년 바토 라부아르였습니다.

1909년 한 러시아 부자 세르게이 슈추킨(Sergei Shchukin)이 마티스에게 한 점의 매우 큰 그림을 의뢰했어요. 그 한 점이 — 야수파의 가장 결정적 결정체가 됩니다.
세르게이 슈추킨(Sergei Shchukin, 1854-1936)은 그 시대 모스크바의 가장 부유한 직물 상인이자 미술 컬렉터였어요. 그가 1898년부터 약 20년 동안 약 280점의 모더니즘 그림을 사 모았습니다.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갱, 마티스, 피카소 — 그 시대 모든 큰 화가의 그림이 그의 집에 있었어요.
1909년 그가 마티스에게 한 가지 큰 의뢰를 했어요. 자기 모스크바 저택의 한 큰 계단 옆에 걸 두 점의 거대한 그림이었습니다. 두 점이 〈춤(La Danse)〉과 〈음악(La Musique)〉이었어요. 두 점 모두 약 2.6×3.9미터의 거대한 크기였습니다. 마티스가 약 6개월에 걸쳐 그 두 점을 완성했어요.
〈춤〉이 그 두 점 중 더 유명한 한 점이에요. 그 그림 안에 다섯 명의 누드 여인이 손을 잡고 한 빨간 평면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그들의 몸이 매우 강한 〈빨강〉,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매우 강한 〈초록 잔디〉, 그리고 그 위의 하늘이 매우 강한 〈푸른색〉이었습니다. 〈빨강 + 초록 + 푸른색〉의 세 가지 강한 색만으로 그려진 한 그림 — 그것이 야수파의 가장 결정적인 결정체예요. 1910년 그 그림이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슈추킨의 저택의 한 계단에 걸렸습니다. 1918년 러시아 혁명 후 슈추킨의 모든 컬렉션이 〈국유화〉되었고, 그 후 〈춤〉이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나뉘어 보관되었어요. 한 러시아 컬렉터의 한 의뢰가 야수파의 가장 결정적 결정체를 만든 그 사례 — 1910년 마티스의 〈춤〉이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0년 12월에 한 점의 작은 수채화를 그렸어요. 그 한 점이 — 미술사상 〈첫 완전한 추상화〉라 알려져 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30세까지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1896년 약 30세에 한 가지 결정적 사건을 경험했어요. 모스크바에서 모네의 한 점 〈건초더미(Haystacks)〉를 처음 봤는데, 그 그림에서 그가 〈건초더미〉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의 〈색이 강한 무엇〉이 그를 깊이 흔들었어요. "한 그림이 〈사물〉을 보여 주지 않아도 한 사람을 흔들 수 있다." 그 한 가지 깨달음이 그의 평생 미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가 1896년 약 30세에 모스크바 대학을 그만두고 독일 뮌헨으로 떠나, 그곳에서 약 18년 동안 살면서 화가가 되었어요. 1908년 그가 뮌헨 근처의 한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서 한 가지 결정적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점점 〈사물〉에서 멀어졌어요.
1910년 12월의 한 날, 그가 자기 작업실에 들어와서 한 점의 작은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무제(Untitled, 첫 추상 수채화)〉예요. 그 한 점에서 — 그가 평생 처음으로 어떤 〈사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색과 형태만이 캔버스 위에 있었어요. 그 한 점이 인류 미술사상 〈첫 완전한 추상화〉라 알려져 있습니다. 1911년 그가 자기 책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출간했어요. 그 책에 그가 한 줄로 적었습니다. "그림은 한 외부 사실이 아니라 한 내적 필연의 표현이다." 그 한 줄이 20세기 모든 추상 미술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그림으로 미술의 약 500년의 〈사실 묘사〉의 룰을 깨뜨린 그 사례 — 1910년 칸딘스키였어요.

1897년 빈에서 한 가지 새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그 운동의 가장 큰 거장이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였습니다.
1897년 4월 3일, 빈에서 약 20명의 화가들이 〈오스트리아 미술가 협회(Wiener Künstlerhaus)〉에서 분리(Secession)를 선언했어요. 그들이 그 협회의 보수적 미감을 거부하고 〈한 새 시대를 위한 새 미술〉을 만들기로 한 거예요. 그 운동의 첫 회장이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였습니다.
그들이 1898년 빈 시내에 한 새 전시 건물 〈제체시온(Secession)〉을 지었어요. 그 건물의 정면에 한 가지 슬로건이 새겨졌습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그 한 줄이 그 운동의 가장 깊은 미학이었어요.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시기가 〈황금 시대(Goldene Periode, 1899~1910)〉예요. 그 시기에 그가 매우 화려한 황금색을 사용해 거의 모든 그림을 그렸습니다. 〈키스(Der Kuss, 1907~1908)〉가 그 시기의 가장 결정체이고, 우리가 C4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외에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의 초상(1907)〉, 〈다나에(1907~1908)〉가 그 시기의 작품이에요.
또 한 가지 큰 화가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였습니다. 클림트의 약 28년 후배였고, 그가 매우 강한 신체 표현으로 〈빈 표현주의〉를 만들었어요. 1918년 두 사람 — 클림트와 실레 — 이 같은 해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도시의 한 운동이 약 20년 안에 시작되고 끝난 그 사례 — 1897~1918년의 빈 분리파였어요.

1900년대 새 합성 안료들이 그 시대 미술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어요.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주의 — 모든 새 양식이 그 새 색에서 시작됩니다.
1900년대 초의 가장 큰 변화가 한 가지 — 〈더 강한 색〉이에요.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카드뮴 옐로우, 코발트 블루, 비리디안 그린이 더 정교한 형태로 만들어졌고, 그 외에 새 합성 안료들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그 결과 1900년경 한 화가가 사용할 수 있는 색이 그 전 시대의 약 2배가 되었어요.
그 새 색의 가장 큰 사용자가 야수파(Fauvism) 화가들이었습니다.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가 1905년 살롱 도톤에서 매우 강한 색의 그림을 전시했어요. 그 전시에서 한 비평가가 〈한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갇혀 있다〉라고 적은 그 한 마디가 〈야수파(Fauvism)〉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 변화가 〈튜브 안료의 표준화〉예요. 그 시대까지 튜브 안료가 약 60년 동안 사용되었지만, 1900년대에 그 표준이 더 정교해졌습니다. 그 결과 화가들이 여행 중에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 한 가지 변화가 그 시대 화가들의 〈야외 작업〉, 〈여행 중의 그림〉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시대의 새 안료가 한 시대의 새 미술을 만든 그 사례 — 1900년대 모더니스트 안료였어요.
피카소(1881-1973), 마티스(1869-1954), 칸딘스키(1866-1944), 클림트(1862-1918). 한 시대 미술의 출발을 만든 네 사람과,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사실을 떠났나.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피카소가 평생 만든 작품이 약 50,000점이에요. 회화 약 1,800점, 드로잉 약 7,000점, 판화 약 12,000점, 도자기 약 11,000점, 그리고 약 18,000점의 그 외 작품. 인류 미술사 가장 다작의 화가입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남부 말라가(Málaga)에서 한 미술 교사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약 8세에 첫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약 14세에 자기 아버지가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게 없다〉며 자기 붓을 그에게 줬다고 합니다. 1900년 약 19세에 처음 파리로 와서, 그곳에서 약 73년 동안 평생을 살았어요.
그의 평생을 약 7~8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청색 시기(1901~1904), 분홍 시기(1904~1906), 입체주의(1907~1917), 신고전주의(1918~1925), 초현실주의 영향(1925~1932), 게르니카 시기(1937), 후기(1945~1973). 그 모든 시기 동안 그가 매우 다른 양식으로 그렸어요.
가장 결정적인 한 점이 1907년의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우리가 C1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한 점이 입체주의의 시작이었어요. 그 후 1908~1914년 약 6년 동안 피카소가 친구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분석적 입체주의(1908~1912)〉 그리고 〈종합적 입체주의(1912~1914)〉의 두 단계가 만들어졌어요.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 독일과 이탈리아 폭격기들이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Guernica)를 폭격해 약 1,654명을 죽였습니다. 그 사건을 듣자마자 피카소가 약 1개월에 걸쳐 한 점의 거대한 그림을 그렸어요. 〈게르니카(Guernica)〉입니다. 약 3.5×7.8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검은색·흰색·회색만으로 — 한 시대의 폭력을 그렸어요. 그 한 점이 20세기 가장 유명한 정치 그림이 됩니다. 1973년 4월 8일, 피카소가 약 91세에 프랑스 무쟁(Mougins)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한 사람의 91년이 그렇게 큰 작업을 남긴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마티스가 약 36세에 그린 한 점이 〈야수파(Fauvism)〉라는 이름이 되었어요. 그가 평생 추구한 한 가지가 — 〈색이 사실을 떠나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 르 카토-캉브레지(Le Cateau-Cambrésis)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그는 법학을 공부했고, 약 21세에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 22세에 한 가지 사고로 약 2개월 입원했고, 그 시기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한 통의 그림 도구 상자를 줬어요. 그 한 가지가 그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약 23세에 그가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어요.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그가 약 36세에 한 점의 그림 — 〈모자를 쓴 여인(La Femme au chapeau)〉 — 을 출품했어요. 그 그림 안의 한 여인의 얼굴이 〈빨강, 초록, 파랑〉의 매우 강한 색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큰 충격을 일으켰고, 한 비평가가 그 전시실에 있던 한 도나텔로식 르네상스 조각을 보고 한 줄로 적었어요. "한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갇혀 있다(Donatello parmi les fauves)." 그 한 마디에서 〈야수파(Fauvism)〉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가 1909~1910년에 슈추킨의 의뢰로 〈춤(La Danse)〉과 〈음악(La Musique)〉을 그렸고, 1916~1930년 약 14년 동안 프랑스 남부 니스(Nice)에서 살면서 그곳의 빛을 그렸어요. 1941년 약 72세에 그가 큰 수술을 받고 거의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13년 동안 그가 침대에서 한 가지 새 양식 — 〈종이 오려 붙이기(papiers découpés)〉 — 를 만들었어요. 그가 큰 색 종이를 가위로 직접 자른 후, 한 큰 흰 벽에 그것을 붙이는 형식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1953년 〈블루 누드(Blue Nudes)〉 시리즈예요. 한 사람이 평생 마지막 시기에 새 양식을 시작한 그 사례 — 마티스였습니다.

칸딘스키는 30세에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었어요. 그 후 약 14년 만인 44세에 인류 첫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한 사람의 한 평생의 한 가지 결정적 발명.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어요. 약 30세까지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가르쳤습니다. 1896년 그가 모네의 〈건초더미〉를 처음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정한 후,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 대학을 그만두고 독일 뮌헨으로 떠났어요. 1908년 약 42세에 그가 뮌헨 근교 무르나우(Murnau)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평생 가장 큰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1910년 12월에 그가 〈첫 완전한 추상 수채화〉를 그렸어요. 그 후 약 10년 동안 그가 〈구성(Composition)〉, 〈즉흥(Improvisation)〉, 〈인상(Impression)〉이라는 세 가지 시리즈로 약 100점의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구성 7(Composition VII, 1913)〉이에요. 약 2×3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한 가지 〈우주의 종말과 새 창조〉를 추상적으로 그린 한 점입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돌아갔어요. 그곳에서 약 7년 동안 살다가, 1921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고 바우하우스를 폐쇄한 후, 그가 프랑스 파리로 옮겨, 그곳에서 1944년 약 78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1911년 책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26년 책 〈점·선·면(Punkt und Linie zu Fläche)〉이 추상화 이론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새 양식 — 〈추상화〉 — 을 만들고, 동시에 그 양식의 이론을 책으로 쓴 그 사례 — 칸딘스키였어요.

구스타프 클림트가 약 11년 동안 거의 매일 황금 잎을 캔버스에 칠했어요. 그 시기를 우리가 〈황금 시대(Goldene Periode)〉라 부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한 황금 세공사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황금을 다루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약 14세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약 7년 동안 화가 훈련을 받았어요. 1883년 약 21세에 동생 에른스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한 작은 작업실을 차렸습니다. 그 시기에 그가 빈 시내의 거의 모든 큰 건물의 벽화를 그렸어요.
1897년 약 35세에 그가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의 첫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1899년부터 1910년경까지 약 11년 동안 그의 〈황금 시대(Goldene Periode)〉가 펼쳐져요. 그 시기 그가 거의 모든 그림에 진짜 황금 잎을 사용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키스(Der Kuss, 1907~1908)〉예요. 우리가 C4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1918년 2월 6일, 그가 약 55세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같은 해 3월 19일 사망했어요. 한 가지 비극적인 사실 — 같은 해 1918년에 〈스페인 독감〉이 유럽 전체를 덮쳤고, 그 독감으로 약 5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클림트의 가장 큰 후배 에곤 실레도 같은 해 10월 31일 약 28세에 그 독감으로 죽었고, 실레의 부인이 그 6일 후 같은 독감으로 죽었어요. 한 도시의 한 운동이 한 해의 한 전염병으로 거의 끝난 그 사례 — 1918년 빈이었습니다.

1900~1920년 약 20년 안에 미술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했어요. 〈사실 묘사〉의 약 500년의 룰이 한 시대 안에 거의 완전히 깨졌습니다. 다섯 가지 답이 있어요.
첫째 〈사진과 영화〉의 발달이에요. 1839년 발명된 사진이 1900년대에 이르러 점점 더 정밀해졌고, 1895년 영화가 발명되면서 〈사실 묘사〉의 자리가 거의 완전히 카메라로 옮겨 갔습니다. 화가들이 〈사실 묘사 외의 다른 한 가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비유럽 미술의 발견〉입니다. 1880년대부터 일본 우키요에가 유럽에 들어왔고, 1900년경부터 아프리카 가면, 폴리네시아 조각, 한국·중국 도자기가 유럽 박물관에 들어왔어요. 그 비유럽 미술이 〈사실 묘사가 아닌 강한 양식화〉의 한 가지 모범을 주었습니다.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 직접 본 것이 — 트로카데로 박물관의 아프리카 가면들이었어요.
셋째 〈과학의 변화〉예요. 1900년 막스 플랑크의 양자 이론, 1905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그 모든 발견이 〈사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흔들었습니다. 〈사실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시점의 합이다〉라는 한 가지 새 사상이 — 입체주의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되었어요.
넷째 〈산업화의 가속〉이에요. 1900년대 자동차, 비행기, 전화, 라디오, 영화 — 그 모든 새 기술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거의 한 해마다 바꾸었어요. 그 빠른 변화가 〈한 자리에 머무르는 미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섯째 〈1차 세계 대전〉이에요. 1914~1918년의 그 전쟁이 인류 역사상 첫 〈전체 전쟁(total war)〉이었습니다. 약 2,000만 명이 죽었고, 유럽 사회 전체가 흔들렸어요. 그 전쟁 후 모든 옛 권위 — 왕정, 교회, 〈사실 묘사 미술〉 — 가 거의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한 시대가 한 시대로 옮겨가는 다섯 가지 조건이 1900~1920년에 거의 동시에 모인 그 사례 — 20세기의 출발이었어요.
뭉크 〈절규〉(1893), 클림트 〈키스〉(1907),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마티스 〈춤〉(1910), 칸딘스키 〈구성 7〉(1913). 20세기 출발 20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차례로 만나 봅니다.

뭉크의 〈절규〉는 미술사에서 가장 강한 한 가지 감정의 시각적 표현이에요. 한 사람의 비명이 한 풍경 자체를 흔들고 있는 그 한 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1863년 노르웨이의 한 의사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5세에 어머니를, 14세에 누나를 결핵으로 잃었습니다. 그 두 가지 어린 시절의 비극이 그의 평생 그림의 가장 깊은 자료가 됩니다.
1892년 약 29세의 뭉크가 한 편지에 적었어요.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 빨강이 되었다. 나는 멈췄고, 매우 피곤해서 난간에 기댔다. 나는 한 가지 큰 무한한 비명이 자연을 가로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 한 가지 경험을 그가 1893년 한 점의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절규(Skrik)〉입니다.
그림 안의 한 사람이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잡고 입을 열어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그러나 그 비명이 〈한 사람의 비명〉이 아니라 〈자연 자체의 비명〉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이 빨강과 오렌지의 거대한 곡선으로 흔들리고 있고, 강의 검푸른 곡선이 그 사람의 머리 옆까지 닿아 있어요. 그 한 가지 형식 — 〈한 풍경 전체가 한 사람의 감정과 함께 흔들리는 것〉 — 이 그 후 약 50년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1893년 뭉크가 4점의 〈절규〉를 만들었어요. 그 4점이 모두 노르웨이의 박물관에 있고, 그 중 1점이 1994년에 도난당했다가 약 3개월 후 발견되어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의 한 비명이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시각적 표현이 된 그 사례 — 1893년 뭉크였어요.

피카소가 약 25세에 그린 이 한 점이 — 미술사상 가장 큰 한 변화의 시작이에요. 입체주의(Cubism)의 첫 그림.
1906년 가을, 피카소가 자기 친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와 함께 파리 트로카데로 박물관(Musée du Trocadéro)에 갔어요. 그곳에 한 가지 새 전시가 있었습니다 —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 가면들이었어요. 그 가면들의 〈비대칭, 매우 강한 형태, 신비로운 표현〉이 피카소에게 깊은 충격을 줬습니다. 같은 해 그가 세잔의 회고전을 보고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로〉라는 한 줄도 직접 봤어요. 그 두 가지 — 아프리카 가면과 세잔의 한 줄 — 이 그가 1907년 6월에 완성한 한 점의 시조가 됩니다.
그림 안에 다섯 명의 누드 여인이 있어요. 그러나 그들의 몸이 매우 이상해요. 가장 왼쪽 두 명은 약간 〈고대 이베리아(Iberia) 조각〉의 얼굴 형태이고, 가장 오른쪽 두 명은 〈아프리카 가면〉처럼 그려졌습니다. 그들의 몸이 매우 강한 〈기하학적 형태(원기둥, 사각형, 삼각형)〉로 환원되어 있고, 한 얼굴이 정면과 옆모습이 동시에 보이게 그려져 있어요. 그 한 가지 형식 — 〈한 사물의 여러 시점을 동시에 한 평면에 그리는 것〉 — 이 입체주의의 가장 큰 발명이 됩니다.
그 그림이 1907년 7월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처음 친구들에게 공개되었어요. 그러나 거의 모든 친구가 충격을 받고 비판했습니다. 마티스, 드랭, 브라크 모두 그 그림을 〈너무 거칠다〉고 비판했어요. 그 결과 피카소가 그 그림을 약 10년 동안 자기 작업실에 숨겨 두었습니다. 1916년에야 그가 그것을 처음 공식 전시했고, 1937년에 MoMA가 약 28,000 달러에 사서 지금까지 그곳에 있어요. 한 그림이 약 3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 후 〈20세기 미술의 가장 큰 한 시작점〉이 된 그 사례 — 1907년 피카소였습니다.

클림트가 약 1년에 걸쳐 한 정사각형 캔버스에 한 키스의 한 시간을 황금으로 그렸어요. 그 한 점이 그의 〈황금 시대〉의 결정체가 됩니다.
이 그림은 1907~1908년 클림트가 약 45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약 1.8×1.8미터의 거의 정사각형 캔버스에, 두 사람이 한 황금 망토 안에 감싸여 키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림의 거의 모든 면이 진짜 24K 황금 잎으로 덮여 있고, 두 인물의 얼굴과 손, 그리고 발 아래의 작은 꽃밭만이 색이 있어요.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그림 안에서 〈장식(decoration)〉과 〈인간의 감정〉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큰 그림은 〈장식〉과 〈주제〉가 분리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클림트는 그 두 가지를 한 평면에 합쳤습니다. 두 인물의 〈사랑〉과 그 주변의 황금 〈장식〉이 한 가지 같은 〈한 시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어요.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다릅니다. 가장 유력한 답은 클림트 자신과 그의 평생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였어요. 두 사람이 약 27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1908년 빈 미술 협회의 한 전시에서 그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고, 즉시 빈 정부가 그것을 사서 〈오스트리아 국가 미술 컬렉션〉의 한 점이 되었습니다. 1918년 클림트가 죽은 후, 그 그림이 빈의 〈벨베데레 궁전(Belvedere)〉에 영구 설치되어 지금까지 그곳에 있어요. 한 키스의 한 시간이 한 시대의 가장 화려한 장식으로 영원히 멈춘 그 사례 — 1908년 클림트의 〈키스〉였어요.

마티스가 1910년에 한 점의 거대한 그림을 단 세 가지 색 — 빨강, 초록, 파랑 — 으로만 그렸어요. 야수파의 가장 결정적 결정체.
이 그림은 1910년 마티스가 약 41세에 완성한 한 점이에요. 우리가 A2에서 본 슈추킨의 의뢰로 만들어진 두 점 — 〈춤〉과 〈음악〉 — 중 한 점입니다. 약 2.6×3.9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다섯 명의 누드 여인이 손을 잡고 한 빨간 평면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한 그림이 단 세 가지 색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에요. 인물의 몸 = 강한 빨강, 그들이 서 있는 잔디 = 강한 초록, 그 위의 하늘 = 강한 파랑. 그 세 색이 모두 매우 평면적으로 칠해져 있고, 〈빛과 그림자〉, 〈공간의 깊이〉가 거의 없어요. 한 그림이 〈사실〉이 아니라 〈한 가지 정서적 감각〉을 직접 그린 것이지요.
그 한 가지 형식 — 〈색 자체가 감정을 표현한다〉 — 이 그 후 약 50년의 모든 〈색의 그림〉의 시조가 됩니다. 1908년 마티스가 자기 책 〈한 화가의 노트(Notes d'un peintre)〉에 적었어요. "나는 한 마음의 평온, 한 마음의 균형 같은 것을 그리고 싶다. 모든 사람을 위해 — 한 사업가도 한 작가도 — 한 좋은 안락의자처럼." 그 한 가지 미학이 그 후 약 100년의 〈장식적 추상화〉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1918년 러시아 혁명 후 슈추킨의 모든 컬렉션이 국유화되었고, 〈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한 의뢰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결정체를 만든 그 사례 — 1910년 마티스였어요.

칸딘스키의 〈구성 7〉이 그의 평생 가장 야심찬 한 점이에요. 약 30점의 준비 스케치 후, 그가 단 4일 만에 거대한 캔버스에 그것을 직접 그렸습니다.
1913년 11월, 칸딘스키가 약 47세에 한 점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가 그 한 점을 위해 약 30점의 준비 스케치 — 수채화, 드로잉, 작은 유화 — 를 약 4년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그 모든 준비 후, 그가 1913년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단 4일 만에 약 2×3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직접 그 그림을 그렸어요.
그 한 점의 주제가 한 가지 — 〈우주의 종말과 새 창조(Apocalypse and Resurrection)〉예요. 그러나 그 주제가 〈사실적 인물이나 사물〉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색과 형태와 선이 한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폭풍처럼 흐르고 있어요. 칸딘스키가 그 그림에 대해 적은 한 줄이 있어요. "이 그림 안에 7가지 큰 주제가 있다 — 천사의 나팔, 부활, 최후의 심판, 노아의 방주, 비잔틴 황금, 황금 송아지, 무지개.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 〈색과 형태의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결정적인 까닭이 한 가지 — 그것이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작〉이라는 한 가지 거대한 주제를 〈완전히 추상적으로〉 그린 첫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까지 한 시대의 종말은 항상 〈인물〉과 〈사물〉로 그려졌어요(예: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541). 그러나 칸딘스키는 그 거대한 주제를 — 단지 색과 형태로만 — 그렸습니다. 그 한 가지 결정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추상화〉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그 그림이 러시아로 옮겨졌고, 1918년 러시아 혁명 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몽마르트르 카페, 모더니스트 안료, 1910년 패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빈 분리파 건물.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900~191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카페에서 — 입체주의, 야수파, 모더니즘 시의 거의 모든 첫 결정이 일어났어요.
몽마르트르(Montmartre)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화가들의 자리였어요. 1880년대 인상주의의 자리는 게르부아 카페였지만, 1900년대 모더니즘의 자리는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Lapin Agile)〉,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 같은 카페들이었습니다.
그 모임의 가장 큰 자리가 한 미국인 컬렉터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의 한 살롱이었어요. 그녀가 1903년 약 29세에 자기 동생 레오와 함께 파리로 왔고, 두 사람이 1903~1914년 약 11년 동안 매주 토요일 저녁 자기 집 — 27 rue de Fleurus — 에서 한 살롱을 열었습니다. 그 살롱에 매주 약 50~80명의 화가, 시인, 작가, 컬렉터가 모였어요.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모딜리아니, 아폴리네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 그 시대 모든 가장 큰 사람이 그 한 살롱의 한 식탁 주위에 있었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후원자였어요. 그녀가 1905년 약 31세에 처음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을 사서, 그 한 점이 그 시대 첫 번째 큰 〈야수파〉 컬렉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6년 그녀가 피카소를 직접 만나서, 그가 그녀의 초상을 약 1년에 걸쳐 그렸어요(〈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 그 초상이 피카소의 가장 결정적 그림 중 하나입니다. 한 카페와 한 살롱이 한 시대 미술의 가장 큰 자리가 된 그 사례 — 1900~1914년의 몽마르트르였어요.

1916년에 발명된 〈티타늄 화이트(titanium white)〉가 — 그 후 약 100년의 거의 모든 현대 회화의 흰색이 됩니다.
1916년 노르웨이의 한 화학자 길베르트 야콥센(Gilbert Jacobsen)과 페데르 파룰루드 닐센(Peder Farup-Nielsen)이 한 가지 새 흰 안료를 만들었어요. 〈티타늄 화이트(titanium white, 화학식 TiO₂)〉예요. 그 안료가 그 전 시대의 모든 흰색 — 납백(lead white), 아연 백(zinc white) — 을 거의 다 대체합니다.
티타늄 화이트의 가장 큰 매력이 한 가지 — 매우 강한 흰색이고, 시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으며, 독성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 전 시대의 납백은 매우 강했지만 매우 독성이 있어, 화가들이 평생 그 안료에 노출되어 〈납중독(saturnism)〉으로 죽기도 했습니다. 새 티타늄 화이트는 그 모든 위험이 없었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새 안료가 〈크롬 옥시드 그린(chrome oxide green)〉, 〈프탈로 블루(phthalo blue, 1935)〉, 〈프탈로 그린(phthalo green, 1938)〉입니다. 이 새 합성 안료들이 모두 매우 강한 색이고,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아요. 그 결과 20세기의 화가들 —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 클레, 미로, 폴록, 로스코 — 의 그림이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그린 시기의 색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새 화학 발명이 한 시대 미술의 시각적 기록을 영원히 보존한 그 사례 — 1916년 티타늄 화이트였어요.

1906년 한 프랑스 디자이너가 한 가지 결정적 결정을 했어요. "나는 코르셋의 시대를 끝냈다." 그가 폴 푸아레(Paul Poiret, 1879-1944)였습니다.
폴 푸아레는 1903년 약 24세에 자기 작은 패션 하우스를 파리에 열었어요. 그의 가장 큰 결정이 1906년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한 가지 새 드레스 형식 — 〈디렉투아르 라인(Directoire line)〉 — 을 선언했어요. 그 새 형식이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 코르셋이 없었어요.
그 전까지 약 350년 동안 거의 모든 부유한 여성이 매일 코르셋을 입었어요. 그 코르셋이 여성의 허리를 약 18~20인치까지 조였고, 그 결과 많은 여성이 평생 호흡 장애와 척추 문제를 겪었습니다. 푸아레의 새 드레스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깨뜨렸어요. 그가 1908년에 적은 한 줄이 — "나는 코르셋과 전쟁을 선포했다. 여성의 몸을 자기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나의 평생 임무다."
그가 또 한 가지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동방〉이에요. 1909년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가 파리에 와서 첫 공연을 했고, 그 공연의 의상이 매우 화려한 동방 스타일이었습니다. 푸아레가 그 영향을 즉시 받아, 1910년경부터 〈하렘 바지(harem pants)〉, 〈터번(turban)〉, 그리고 매우 화려한 자수의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한 디자이너가 한 시대 여성 패션의 가장 큰 변화를 만든 그 사례 — 1900년대 폴 푸아레였습니다.

1913년 5월 29일 파리에서 한 새 발레 음악의 첫 공연이 있었어요. 약 30분 후 그 극장에서 한 가지 인류 음악사 가장 큰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러시아 작곡가로, 1909년 파리로 와서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음악 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1910년 〈불새(L'Oiseau de feu)〉, 1911년 〈페트루슈카(Petrushka)〉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1913년 약 31세에 한 가지 새 발레 음악을 작곡했어요.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입니다.
그 음악의 가장 큰 새 점이 한 가지 — 그 시대까지의 모든 음악 룰을 깨뜨린 강한 리듬과 불협화음이었어요. 그 음악 안의 리듬이 매우 불규칙하고, 화성이 매우 거친 불협화음이며, 한 가지 〈원시적 폭력〉을 직접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클래식 음악이 매우 〈균형 잡힌〉 형식이었지만, 〈봄의 제전〉은 그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깨뜨렸어요.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Élysées)에서 첫 공연이 있었어요. 약 1,800명의 관객이 그 새 음악과 무용가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매우 새로운 안무를 처음 봤습니다. 약 5분 후부터 일부 관객이 야유를 시작했고, 약 30분 후 그 야유가 폭동으로 변했어요. 일부 관객이 다른 관객을 때리기 시작했고, 약 40명의 경찰이 출동해 약 50명의 관객을 체포했습니다. 한 음악 공연이 그렇게 큰 폭동을 일으킨 사례 — 음악사에 다시 거의 없어요. 그 폭동이 한 가지 — 〈한 시대 사람들이 새 미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직접 보여 준 그 사례 — 1913년 봄의 제전이었습니다.

1898년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가 자기 전용 전시 건물을 세웠어요. 그 한 채의 건물이 한 시대 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이 건물은 1897~1898년 약 1년에 걸쳐 빈 시내에 지어졌어요. 건축가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였습니다. 그가 약 30세에 빈 분리파의 의뢰로 이 건물을 디자인했어요. 그 시대 빈의 다른 모든 건물이 매우 화려한 〈역사주의(historicism)〉 양식 —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의 옛 형식을 모방한 양식 — 이었지만, 이 건물은 매우 단순한 흰색의 새 형식이었습니다.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이 한 가지 — 정상에 있는 한 거대한 〈황금 잎(laurel) 돔〉이에요. 약 3,000개의 황금 잎으로 만들어진 그 돔이 〈한 시대의 황금 시대〉의 시각적 상징이 됩니다. 빈 사람들이 그 돔을 보고 〈황금 양배추(Goldenes Krauthappel)〉라 농담하며 부르기 시작했어요.
건물의 정면에 한 줄이 새겨져 있습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그 한 줄이 빈 분리파의 가장 깊은 미학이었어요. 1902년 그 건물 안에서 한 매우 유명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베토벤 전시〉예요. 그 전시의 가장 큰 작품이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라는 약 34미터 길이의 한 거대한 벽화였어요. 그 벽화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시각적으로 옮긴 한 가지 〈종합 예술 작품(Gesamtkunstwerk)〉이었습니다. 한 건물이 한 시대 미술의 가장 깊은 자리가 된 그 사례 — 1898년 빈 분리파 건물이었어요.

1862 클림트 출생 / 1863 뭉크 출생
1866 칸딘스키 출생 / 1869 마티스 출생
1881 피카소 출생 / 1882 스트라빈스키 출생
1893 뭉크 〈절규〉
1897.04.03 빈 분리파 선언
1898 빈 분리파 건물 완공 (올브리히)
1902 빈 베토벤 전시 (클림트 프리즈)
1903 거트루드 스타인 파리 살롱 시작
1905 살롱 도톤 — 〈야수파(Fauvism)〉 이름 만들어짐 / 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
1906 푸아레 〈코르셋 끝〉 / 세잔 사망 / 피카소 〈스타인 초상〉
1907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 클림트 〈키스〉 시작
1908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 — 입체주의 시작 / 칸딘스키 무르나우 정착
1909 발레 뤼스 파리 데뷔 / 슈추킨 〈춤〉 의뢰
1910 마티스 〈춤〉 / 칸딘스키 첫 추상 수채화
1911 칸딘스키 〈정신적인 것〉 출간
1913.05.29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폭동 / 칸딘스키 〈구성 7〉
1914.07 1차 세계 대전 시작
1916 티타늄 화이트 발명 / 다다이즘 시작 (취리히)
1917 러시아 혁명 / 뒤샹 〈샘(Fountain)〉
1918 1차 대전 끝 / 클림트·실레 사망 (스페인 독감)
1919 바우하우스 설립 (바이마르)
1944 칸딘스키 사망 (78세, 파리) / 뭉크 사망 (80세)
1954 마티스 사망 (84세) / 1973 피카소 사망 (91세)

1. 뭉크 〈절규〉 1893 — 한 사람의 비명을 그린 첫 그림.
2.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 입체주의의 시작.
3. 클림트 〈키스〉 1907~1908 — 황금 시대의 결정체.
4. 마티스 〈춤〉 1910 — 야수파 + 색의 자유.
5. 칸딘스키 〈첫 추상 수채화〉 1910 — 인류 첫 추상화.
6. 칸딘스키 〈구성 7〉 1913 — 추상화의 가장 야심찬 한 점.
7. 마티스 〈블루 누드 II〉 1952 — 옆 그림. 종이 오려 붙이기 후기.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5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출발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시대 미술이 〈사실〉을 영원히 떠난 20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1911 ·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1938 · MoMA·에르미타주·트레티야코프·벨베데레·노르웨이 내셔널 갤러리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1916년부터 1940년까지 약 24년. 뒤샹의 변기, 마그리트의 파이프, 달리의 늘어진 시계. 한 시대 미술이 〈논리〉를 떠난 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