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6년 취리히 카바레 볼테르에서 1940년 2차 세계 대전까지 약 24년 —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미술의 〈논리〉를 영원히 깨뜨린 24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네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916년 2월 5일 저녁, 스위스 취리히의 한 작은 카바레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에서 한 가지 이상한 모임이 시작되었어요. 약 5명의 화가, 시인, 작가가 모여서 — 의미 없는 시를 낭독하고, 작은 헝겊 인형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동시에 여러 언어로 외쳤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이 〈다다(Dada)〉였어요. 그 한 단어가 — 그 시대 어떤 단어도 의미하지 않는, 그저 〈아기의 첫 옹알이〉 같은 말이었습니다.
왜 그 시대에 그런 모임이 있었을까요. 한 가지 답이 — 〈1차 세계 대전〉이에요. 1914~1918년의 그 4년의 전쟁이 인류 역사상 첫 〈전체 전쟁〉이었습니다. 약 2,000만 명이 죽었고, 유럽의 거의 모든 옛 제국 —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 이 무너졌어요. 그 폭력의 한가운데에서 한 그룹의 젊은 예술가들이 한 가지를 말했습니다. "이성과 논리가 우리를 이 전쟁으로 끌고 왔다. 우리는 모든 이성을 거부한다." 그것이 다다의 가장 깊은 시작이었어요.
1917년 4월 9일, 뉴욕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약 30세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한 점의 〈예술 작품〉을 〈독립 예술가 협회〉의 전시에 출품했어요. 그 작품이 — 〈일반 화장실의 한 변기〉였습니다. 그가 그것을 〈샘(Fountain)〉이라 이름하고, 〈R. Mutt 1917〉이라 서명했어요. 그 한 점이 — 인류 미술사 가장 큰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이 미술인가?"
그 후 약 8년이 지난 1924년 10월 15일, 파리에서 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이 한 가지 새 운동의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입니다. 그 선언이 한 가지를 말했어요. "우리는 의식이 아닌 무의식을 그릴 것이다. 꿈, 환상, 비합리의 세계가 우리의 새 자료다." 그 선언이 마그리트, 달리, 에른스트, 미로, 폴록의 시조가 됩니다.
이 호의 가장 큰 한 가지 — 〈한 시대 미술이 〈논리〉를 떠난 후 무엇이 가능했는가〉예요. 다다는 〈모든 의미의 거부〉,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표현〉, 두 운동이 매우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성이 만든 세계는 불충분하다."
제1부는 다섯 풍경. 제2부는 다섯 사람 — 뒤샹, 마그리트, 달리, 미로,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제3부는 다섯 점 — 〈샘〉, 〈이미지의 배반(파이프)〉, 〈기억의 지속(녹은 시계)〉, 〈거짓 거울〉, 〈인물〉. 제4부는 일상.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1916 카바레 볼테르에서 1931 카다케스까지, 24년의 다섯 풍경.
뒤샹, 마그리트, 달리, 미로 —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샘, 이미지의 배반, 기억의 지속, 거짓 거울, 인물.
취리히 카바레, 콜라주 도구, 1920년대 패션, 사티 음악, 초현실 게임.
1916년 취리히의 한 작은 카바레에서 1931년 카다케스의 한 해변까지. 한 시대 미술이 의미와 논리와 사실의 모든 룰을 떠나 24년의 다섯 풍경.
한 시대가 어떻게 의미와 논리를 떠났는지를 다섯 자리로.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2월 5일, 중립국 스위스 취리히의 한 작은 카바레에서 다다이즘이 시작되었어요. 그 한 자리가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안티-아트〉의 시조입니다.
휴고 발(Hugo Ball, 1886-1927)은 독일 시인이자 무대 감독이었어요. 그가 1차 대전이 시작된 후 1차 대전을 피해 1915년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했습니다. 1916년 2월 5일, 그가 자기 부인 에미 헤닝스(Emmy Hennings)와 함께 취리히 시내 슈피겔가세(Spiegelgasse) 1번지에 한 작은 카바레를 열었어요. 그 카바레의 이름이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습니다.
그 카바레의 첫 저녁 모임에 약 5명의 예술가들이 모였어요. 휴고 발, 에미 헤닝스,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 1896-1963, 루마니아 시인), 한스 아르프(Hans Arp, 1886-1966, 독일 화가), 마르셀 얀코(Marcel Janco, 1895-1984, 루마니아 화가). 그들이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일을 했습니다. 의미 없는 시를 낭독하고, 헝겊 인형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동시에 여러 언어로 외쳤어요.
약 4월 18일에 그 모임이 자기 운동의 이름을 결정했습니다. 휴고 발이 한 사전을 무작위로 펼쳤는데, 그곳에 〈Dada〉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프랑스어 〈장난감 말〉, 독일어 〈좋아〉, 그리고 어린 아이의 첫 옹알이 — 그 모든 의미가 한 단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운동의 이름이 되었어요. "다다는 무엇인가? 다다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다의 의미다." 한 카바레가 한 시대 〈안티-아트〉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1916년 카바레 볼테르였습니다.

1917년 4월 9일 뒤샹이 한 일반 변기를 한 미술 전시에 출품했어요. 그 한 사건이 — 인류 미술사 가장 큰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미술인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1887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형 자크 비용(Jacques Villon)과 동생 레몽 뒤샹-비용(Raymond Duchamp-Villon)도 모두 화가였습니다. 약 22세에 그가 입체주의에 합류했고, 1912년 약 25세에 한 점의 매우 유명한 그림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2)〉를 그렸어요. 그 그림이 1913년 뉴욕 〈아모리 쇼(Armory Show)〉에 출품되어 큰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그가 회화 자체를 거의 떠나,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한 가지 새 개념을 만들었어요. 한 일반 산업 제품을 그대로 미술 작품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13년 자전거 바퀴, 1914년 병 건조대, 1915년 제설용 삽 등을 그가 자기 작품으로 선언했어요. 1917년 약 30세에 그가 가장 결정적인 한 점을 만듭니다.
1917년 4월 9일 뉴욕 〈독립 예술가 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첫 전시가 열렸어요. 그 전시는 〈모든 출품자를 받는다〉는 룰이 있었습니다. 뒤샹이 약 6달러로 한 일반 화장실의 변기를 샀고, 그것을 옆으로 돌리고 그 위에 〈R. Mutt 1917〉이라 서명한 뒤, 〈샘(Fountain)〉이라 이름하고 출품했어요. 그러나 그 전시 위원회가 그것을 〈미술이 아니다〉라며 출품을 거부했습니다. 뒤샹이 그 결정에 항의하며 위원회에서 사임했어요. 그 결정 자체가 — 미술사상 가장 큰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무엇을, 미술이라 결정하는가?" 그 한 가지 질문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의 시조가 됩니다.

마그리트가 1929년에 매우 단순한 한 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한 파이프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한 줄을 적은 그림. 그 한 점이 — 미술사상 가장 큰 한 가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 레신(Lessines)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1912년 약 14세 때 자살했고, 그 비극이 그의 평생 그림의 한 가지 깊은 자료가 됩니다. 약 18세에 그가 브뤼셀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 후 약 10년 동안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1925년 그가 한 가지 결정적 그림을 봤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사랑의 노래(The Song of Love, 1914)〉였어요. 그 그림 안에서 한 그리스 조각의 머리, 한 의사의 고무 장갑, 한 작은 녹색 공이 매우 이상한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 한 점이 마그리트의 평생 미술 양식을 결정했어요.
1929년 그가 한 점의 매우 단순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이에요. 우리가 C2에서 만날 한 점이지요. 그 그림 안에 한 갈색 파이프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한 줄이 적혀 있었어요. 그 한 점이 한 가지 매우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그림 안의 파이프는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그림〉이다." 한 그림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림 자체로 증명한 그 사례 — 1929년 마그리트였어요.

1931년 달리가 약 27세에 한 점의 매우 작은 그림 — 약 24×33cm — 을 그렸어요. 그 한 점이 — 그 후 100년 동안 인류가 가장 자주 본 초현실주의 그림이 됩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한 작은 마을 피게레스(Figueres)에서 태어났어요. 약 17세에 마드리드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1926년 약 22세에 〈규율 위반〉으로 퇴학당했습니다. 1929년 약 25세에 그가 파리로 와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어요.
1931년 그가 약 27세에 〈기억의 지속(La persistencia de la memoria)〉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약 24×33cm의 매우 작은 캔버스에, 한 카탈루냐 해변 풍경 위에 세 개의 〈녹은 시계〉가 그려져 있어요. 한 시계는 한 죽은 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다른 한 시계는 한 바위 위에 놓여 있고, 또 한 시계는 한 부드러운 형태(달리의 자기 얼굴 비유) 위에 누워 있습니다.
달리가 그 그림에 대해 한 줄로 적었어요. "내가 한 카망베르 치즈를 보고 〈녹은 시계〉를 생각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어요. 그 사상을 달리가 한 그림에 옮긴 거예요. 〈시간이 녹는 것〉이 그 시대 새 과학과 새 미술의 가장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1934년 미국 뉴욕의 한 갤러리가 그 그림을 사서, 1934년에 MoMA에 들어갔어요. 그 후 약 90년 동안 그 한 점이 — 인류가 가장 자주 본 초현실주의 그림이 됩니다.

호안 미로가 평생 추구한 한 가지가 있었어요. "한 화가는 어린 아이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한 줄이 그의 평생 미학이었습니다.
호안 미로는 189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어요. 약 14세에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1920년 약 27세에 처음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만났어요. 1924년 그가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 서명한 첫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한 한 가지가 한 줄로 요약돼요. "나는 회화를 죽이고 싶다." 그 〈죽이고 싶다〉는 그 시대까지의 모든 큰 회화 — 사실 묘사, 르네상스 비례, 입체주의의 분석 — 을 거부하고, 〈한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매우 자유로운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였어요.
그가 1924년 약 31세에 〈농장(La Granja)〉이라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 그림이 그의 평생 가장 큰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 후 1925년부터 그가 점점 〈사물의 사실적 묘사〉를 떠나, 매우 추상적이고 자유로운 양식으로 옮겨 갔어요. 동그라미, 별, 곡선, 강한 색의 작은 형태들이 한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림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양식이 그 후 약 60년의 추상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에 영향을 줬어요. 미로가 1983년 약 90세에 마요르카(Mallorca)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어린 아이의 자유를 추구한 그 사례 — 미로였어요.
뒤샹(1887-1968), 마그리트(1898-1967), 달리(1904-1989), 미로(1893-1983). 한 시대 미술의 〈논리〉를 매우 다른 네 가지 방향으로 깨뜨린 네 사람. 마지막에 한 가지 의문 — 왜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동시에 나왔을까.
한 사람씩 가까이 다가가 그가 한 가지 결정한 일을 함께 봅니다.

뒤샹은 평생 화가에서 시작해, 미술사상 가장 큰 한 가지 질문 〈무엇이 미술인가?〉를 그림 없이 던진 한 사람이에요.
뒤샹은 1887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약 22세에 입체주의에 합류했고, 약 25세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1913년 약 26세에 그가 매우 결정적인 결정을 했어요. 그가 회화 자체를 거의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후 약 50년 동안 그가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대신 그가 〈레디메이드〉, 〈모터로 움직이는 조각〉, 〈3D 광학 연구〉, 그리고 가장 큰 한 작업 — 〈큰 유리(The Large Glass, 1915~1923)〉 — 를 만들었습니다. 1923년 그가 그 마지막 큰 작품 후 〈공식적인 화가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선언하고, 약 50년 동안 거의 체스만 두며 살았어요.
그러나 그가 한 가지 매우 비밀스러운 작업을 했습니다. 1946~1966년 약 20년에 걸쳐, 그가 비밀리에 한 점의 거대한 인스톨레이션 〈주어진 것: 1. 폭포, 2. 가스 등(Étant donnés)〉을 만들었어요. 그 작품이 1968년 그가 죽은 후에야 처음 공개되었고, 지금까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미술의 정의 자체를 영원히 바꾼 그 사례 — 20세기 뒤샹이었어요.

마그리트가 그 시대의 다른 모든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매우 달랐어요. 달리가 매우 화려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마그리트는 평생 한 평범한 부르주아처럼 살았습니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 레신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1912년 14세 때 자살했고, 그 사건이 그의 평생 그림의 가장 깊은 자료가 됩니다. 그가 1925년 약 27세에 키리코의 그림을 처음 보고 자기 평생 양식을 결정했어요. 그 후 1927~1930년 약 3년 동안 파리에서 살면서 브르통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친구가 되었지만, 1930년 그가 다시 브뤼셀로 돌아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평생 살아간 모습이 매우 평범했어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정장을 입고, 자기 작은 집의 거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자기 부인 조르제트(Georgette)와 평생 약 47년 동안 함께 살았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범한 외모〉 안에서 그가 평생 매우 깊은 철학적 그림을 그렸어요. 〈이미지의 배반(1929)〉, 〈인간의 조건(1933)〉, 〈거짓 거울(1935)〉, 〈아들의 아들(1964)〉.
그의 가장 깊은 미학이 한 줄로 요약돼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린다." 한 그림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리지만, 그 그림의 진짜 의미는 〈그 사물 너머의 무엇〉이라는 한 가지 사상이었어요. 한 정장 신사가 평생 이미지의 철학을 그린 그 사례 — 20세기 마그리트였습니다.

달리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으로 만든 것 — 자기 콧수염, 자기 큰 눈, 자기 화려한 의상, 자기 매우 큰 〈쇼맨십〉을 한 가지 〈브랜드〉로 만들었어요.
달리는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 피게레스에서 태어났어요. 약 17세에 마드리드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을 만났습니다. 그가 1929년 약 25세에 부뉴엘과 함께 한 가지 매우 유명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를 만들었어요. 그 영화의 첫 장면 — 한 면도칼이 한 여자의 눈을 자르는 — 이 인류 영화사 가장 충격적 첫 장면이 됩니다.
같은 해 1929년 그가 파리로 와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한 러시아 여인 갈라(Gala, 1894-1982)를 만났습니다. 갈라는 그 시대 시인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의 부인이었어요. 그러나 1929년 그녀가 엘뤼아르를 떠나 달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1934년 두 사람이 결혼했습니다. 갈라가 그 후 약 50년 동안 달리의 〈매니저, 모델, 평생 동반자〉로 함께 살았어요.
1939년 초현실주의 그룹의 리더 앙드레 브르통이 달리를 그룹에서 추방했어요. 이유가 한 가지 — 달리가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자기 미술을 〈상업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르통이 달리의 이름을 거꾸로 쓴 한 줄을 만들어 그를 비웃었어요. "Avida Dollars(달러를 원하는)". 그 한 줄이 평생 달리의 별명이 됩니다. 그러나 달리는 그 별명을 즐겁게 받아들였어요. 그가 자기를 〈한 명의 천재 + 한 명의 사업가〉로 정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한 가지 브랜드로 만든 첫 미술가 — 20세기 달리였어요.

미로가 약 90세까지 살았어요. 그 90년 동안 그가 약 2,000점의 그림과 5,000점의 드로잉, 그리고 약 100점의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호안 미로는 189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어요. 약 27세에 처음 파리를 방문했고, 1924년 약 31세에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파리에서 살지 않고, 카탈루냐의 한 농촌 마을 〈몽-로치(Mont-roig del Camp)〉의 농가와 마요르카(Mallorca)의 한 작업실을 오가며 살았어요.
그가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중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1936년 7월 내전이 시작되자 그가 가족과 함께 파리로 망명했고,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 공화국 관〉의 한 큰 그림을 그렸어요. 같은 박람회에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어요. 1956년 약 63세에 그가 마요르카에 큰 작업실을 짓고, 그곳에서 약 27년 동안 평생 마지막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한 미학이 한 가지 — 〈어린 아이의 자유와 카탈루냐 시골의 흙〉이었어요. 그의 그림 안의 모든 형태가 매우 단순하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 형태들이 한 가지 깊은 카탈루냐 농촌의 시각적 시조 — 별, 달, 새, 사람, 곤충 — 에서 옵니다. 1983년 12월 25일, 그가 약 90세에 마요르카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한 사람의 90년이 한 가지 깊은 자유를 추구한 사례 — 미로였습니다.

1916~1940년 약 24년의 짧은 시기에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함께 일어났어요. 한 시대가 두 가지 큰 운동을 동시에 낳은 다섯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1차 세계 대전〉이에요. 1914~1918년의 그 4년의 전쟁이 인류 역사상 첫 〈전체 전쟁〉이었습니다. 약 2,000만 명이 죽었고, 인류가 이성과 논리로 지은 모든 큰 시스템 — 제국, 산업, 자본주의 — 이 그 폭력의 가장 큰 원인이었음이 명백해졌어요. 그 충격이 다다이즘의 가장 깊은 시작이었습니다.
둘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니다. 1900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출간했고, 그 후 약 20년 동안 그의 이론이 유럽 지식 사회에 깊이 영향을 줬어요. 〈인간의 정신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더 깊다〉는 그의 사상이 — 초현실주의의 가장 깊은 이론적 시조가 됩니다.
셋째 〈영화와 사진〉이에요. 1900년대 영화가 발달하면서, 한 그림이 〈움직이는 이미지〉의 한 작은 일부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사진이 점점 더 정밀해지면서, 한 화가의 〈사실 묘사 의무〉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 결과 화가들이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한 가지 깊은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러시아 혁명〉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그 시대 모든 옛 권위 — 왕정, 자본주의, 부르주아 도덕 — 의 정당성을 흔들었어요. 그 결과 미술도 〈모든 옛 룰〉을 거부하는 한 가지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다섯째 〈미국이라는 새 자리〉예요. 1차 대전 후 많은 유럽 예술가가 미국으로 망명했고, 1925년경부터 뉴욕이 파리와 함께 미술의 한 큰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다양한 자리가 한 시대 두 큰 운동의 가장 깊은 자료가 되었어요. 한 시대가 두 운동을 같이 낳은 그 사례 — 1916~1924년의 8년이었습니다.
뒤샹 〈샘〉(1917),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1929), 달리 〈기억의 지속〉(1931),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1933), 미로 〈인물〉(1933~1935). 다다와 초현실주의 24년의 다섯 점.
시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한 점부터.

1917년 뒤샹의 한 변기가 — 그 후 100년 동안 인류 미술의 가장 큰 한 가지 질문이 됩니다. 〈무엇이 미술인가?〉
1917년 4월 9일, 뉴욕의 〈독립 예술가 협회〉가 자기 첫 큰 전시를 개최했어요. 그 전시의 룰이 한 가지 — 〈모든 출품자에게 6달러의 회비만 받으면 그 모든 작품을 전시한다〉였습니다. 약 1,200명의 예술가가 약 2,500점의 작품을 출품했어요.
그 중에 한 점이 — 한 일반 화장실 변기였습니다. 출품자 이름이 〈리처드 머트(Richard Mutt)〉, 작품 이름이 〈샘(Fountain)〉, 가격이 6.50달러였어요. 그 작품을 전시 위원회가 비밀 투표로 〈예술이 아니다〉라며 출품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정에 항의해 뒤샹과 다른 두 위원이 위원회에서 사임했어요.
그러나 그 〈샘〉이 진짜 누가 출품했는지 — 그 시대에는 비밀이었습니다. 약 50년이 지난 1960년대에야 그것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이라는 것이 공식 인정되었어요. 그 한 가지 사실 — 〈한 미술 작품의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도 미술의 한 가지 질문이 됩니다. 뒤샹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발언을 했어요. "미술가가 한 사물을 〈선택〉하고 그것을 〈미술〉이라 선언하는 행위 자체가 — 미술이다." 그 한 줄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개념 미술〉의 시조가 됩니다.
원본 〈샘〉은 1917년 전시 후 곧 분실되었어요. 1950년대부터 뒤샹이 자기 손으로 약 17점의 〈인증된 복제품(replicas)〉을 만들었고, 그 복제품들이 지금 MoMA, 테이트 모던, 퐁피두 센터 등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있습니다. 한 변기가 한 시대 미술의 정의 자체를 바꾼 그 사례 — 1917년 〈샘〉이었어요.

마그리트가 1929년 한 점의 매우 단순한 그림을 그렸어요. 한 파이프와 한 줄. 그 한 점이 — 그 후 약 100년의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 그림 안에 한 갈색 파이프가 그려져 있어요. 그 파이프가 매우 사실적으로, 마치 한 광고 카피처럼 깔끔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파이프 아래에 한 줄이 적혀 있어요.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 한 줄이 매우 중요해요. 마그리트가 한 인터뷰에서 그 한 줄에 대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한 번 그것을 채워 보아라. 담배를 넣을 수 있는가? 없다. 이것은 한 그림이지, 한 파이프가 아니다." 한 그림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림 안에서 그림 자체로 증명한 그 첫 사례입니다.
이 그림이 한 시대의 가장 깊은 한 가지 철학적 질문을 던졌어요 —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질문이 그 후 1968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자기 책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쓰는 자료가 됩니다. 한 그림 한 점이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철학적 책의 자료가 된 그 사례 — 1929년 마그리트였어요.

달리가 1931년에 그린 약 24×33cm의 매우 작은 그림이 — 그 후 약 90년 동안 인류가 가장 자주 본 초현실주의 그림이 됩니다.
1931년 어느 여름 저녁, 달리가 자기 카다케스(Cadaqués) 작업실에서 한 가지 매우 이상한 한 가지 영감을 받았어요. 그가 자기 식탁 위에 한 카망베르 치즈가 녹아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가 이렇게 적었어요. "내가 그 녹은 카망베르를 보고 〈녹은 시계〉를 생각했다. 시간이 고체가 아니라 액체일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상이 떠올랐다."
그 한 점이 — 1차 세계 대전 후 약 13년이 지난 시점, 인류가 〈시간과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옛 사상을 거의 잃은 시기에 그려졌어요. 같은 시기 1905~191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했고, 1900~1925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인간의 기억이 사실이 아니라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달리의 그림이 그 두 가지 새 과학과 새 심리학의 한 가지 시각적 결정체였어요.
그림 안에 4개의 시계가 있습니다. 세 개는 〈녹은 시계〉이고, 한 개는 그림 한 모서리의 〈주황색 회중 시계〉예요. 그 회중 시계 위에 약 50마리의 작은 개미들이 있는데, 그 개미들이 〈시간을 먹고 있는〉 한 가지 비유입니다. 그림 한가운데에 한 부드러운 형태가 있는데, 그 형태가 달리 자신의 옆얼굴이라고 그가 인정했어요. 그 위에 한 〈녹은 시계〉가 누워 있어요. 한 사람의 기억과 시간이 함께 녹아 있는 그 한 풍경이 — 1931년의 가장 깊은 시각적 비유였습니다. 1934년 그 그림이 약 250달러에 한 미국 컬렉터에게 팔렸고, 그가 같은 해에 MoMA에 기증했어요. 그곳에서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거짓 거울〉은 한 거대한 사람의 눈을 그린 그림이에요. 그 눈의 흰자위가 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고, 동공이 한 검은 둥근 점입니다.
1929년 마그리트가 약 31세에 한 점의 매우 신비로운 그림을 그렸어요. 〈거짓 거울(Le Faux Miroir)〉입니다. 그림 안에 한 거대한 사람의 눈이 정면에서 그려져 있어요. 그 눈의 흰자위가 한 매우 강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의 풍경이고, 동공이 한 검은 둥근 점입니다.
그 한 그림이 한 가지 매우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보는 것이 진짜 세상인가, 아니면 내 눈에 비친 한 가지 풍경일 뿐인가?" 그 한 가지 질문 — 〈인식과 실재 사이의 관계〉 — 이 마그리트의 평생 미학의 가장 깊은 자료였어요.
1936년 그 그림이 미국으로 옮겨졌고, 1956년 MoMA가 그 그림을 사서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1962년에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어요. 미국 CBS 방송국이 자기 새 로고를 디자인할 때, 그 그림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지금도 보는 CBS의 〈눈 모양 로고〉가 — 1929년 마그리트의 〈거짓 거울〉의 후예예요. 한 그림이 한 시대 가장 큰 방송국의 시각적 정체성이 된 그 사례 — 미술사에 다시 거의 없습니다.

미로의 가장 결정적 시기가 1925~1965년 약 40년이에요. 그 40년 동안 그가 그 시대 어떤 화가도 만들지 않은 한 가지 매우 자유로운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미로의 그림 안의 모든 형태가 매우 단순하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 형태들이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요. 동그라미, 별, 곡선, 점들이 한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균형과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형식 — 〈자유로워 보이는 정확한 구성〉 — 이 그 후 약 60년의 그래픽 디자인의 시조가 되었어요.
그가 1929년부터 한 가지 새 양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털레이션(Constellations)〉 시리즈예요. 그가 1940~1941년 약 23점의 작은 그림을 만들었는데, 모든 그림 안에 한 〈우주의 별자리〉를 표현하는 한 가지 형식이었어요. 그 작품들이 1945년 뉴욕에서 처음 전시되어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 에게 직접 영향을 줬습니다.
1956년 약 63세에 미로가 마요르카에 한 큰 작업실을 짓고, 그곳에서 약 27년 동안 평생 마지막 시기를 보냈어요. 그 시기에 그가 점점 큰 〈벽화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90년의 평생이 한 가지 깊은 자유의 표현이 된 그 사례 — 20세기 미로였어요.
취리히 카바레, 콜라주 도구, 1920년대 패션, 사티의 음악, 초현실 게임 〈우아한 시체〉.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한 가지씩 천천히 읽어 보아 주세요.

1916년 6월 23일 저녁, 휴고 발이 카바레 볼테르의 무대 위에 올라가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시를 낭독했어요. 그 시가 한 단어도 의미가 없는, 단지 〈소리〉만의 시였습니다.
휴고 발이 1916년 6월 23일 저녁에 한 점의 시 〈가지베리 빔바(Karawane)〉를 낭독했어요. 그 시의 첫 줄이 — "jolifanto bambla ô falli bambla"예요. 그 모든 단어가 의미가 없는 단지 〈소리의 조합〉이었습니다. 그가 그 시를 낭독하면서 매우 이상한 한 가지 종이 인형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 의상이 종이로 만든 큰 〈비숍의 모자〉, 큰 종이 의상, 그리고 한 종이로 만든 새 부리였습니다.
휴고 발이 그 한 가지 행위에 대해 한 줄로 적었어요. "우리는 한 의미 없는 시를 통해 그 시대의 모든 의미 — 전쟁, 정치, 산업 — 의 무의미를 폭로한다." 그 한 가지 사상이 다다이즘의 가장 깊은 미학이 되었어요. 〈의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한 시대의 비합리성〉에 대한 한 가지 답이라는 것이지요.
그 시기에 카바레 볼테르에 매일 저녁 약 30~50명의 관객이 모였습니다. 거의 모두가 1차 대전을 피해 스위스에 망명한 화가, 시인, 작가들이었어요. 그 작은 카바레가 약 6개월 후 1916년 7월에 문을 닫았지만, 그 6개월의 모임이 — 그 후 100년의 모든 〈안티-아트〉의 시조가 됩니다. 한 카바레의 한 의미 없는 시가 한 시대 미술의 가장 깊은 출발이 된 그 사례 — 1916년 카바레 볼테르였어요.

1912년 피카소와 브라크가 처음 발명한 〈콜라주(collage)〉를 다다이스트들이 정치적 무기로 발전시켰어요. 1920년 베를린에서 〈포토몽타주(photomontage)〉라는 새 양식이 만들어집니다.
〈콜라주〉라는 이름은 프랑스어 〈colle(풀)〉에서 왔어요. 그 이름이 보여 주듯, 한 가지 작은 종이 조각이나 사진을 캔버스에 풀로 붙이는 한 가지 형식입니다. 1912년 피카소가 〈등 의자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Chair Caning)〉이라는 한 점에 한 가지 등 의자 무늬가 있는 천을 직접 캔버스에 붙였어요. 그것이 미술사에서 첫 콜라주로 알려진 한 점입니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이 그 콜라주를 매우 정치적으로 발전시켰어요. 1919~1920년 베를린에서 한 그룹의 다다이스트들 — 한나 회흐(Hannah Höch, 1889-1978),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 이 〈포토몽타주(photomontage)〉라는 새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신문 사진, 광고 사진, 정치인의 사진을 잘라서 매우 강한 정치적 풍자의 새 이미지로 다시 조합한 거예요.
한나 회흐의 1919년 작품 〈한 다다 부엌칼로 마지막 바이마르 맥주 시기를 자르다(Cut with the Dada Kitchen Knife)〉가 그 새 양식의 가장 결정적인 한 점이에요. 약 1.1×0.9미터의 큰 캔버스에 약 100개의 신문 사진 조각을 붙여, 그 시대 독일 정치의 모든 부패를 매우 강하게 풍자했습니다. 한 가위가 한 새 미술 형식을 만든 그 사례 — 1920년대 다다 포토몽타주였어요.

1920년대 가장 큰 패션 변화가 한 가지 — 〈코르셋의 영원한 종말〉이에요. 그 변화의 가장 큰 디자이너가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 1883-1971)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결정적으로 바뀌었어요. 약 200만 명의 유럽 남성이 죽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처음으로 〈공장, 사무실, 운전사, 의사, 교사〉 같은 모든 직업에 들어왔습니다. 그 변화가 패션을 완전히 바꿨어요.
코코 샤넬이 1920년경부터 한 가지 새 형식을 만들었어요. 〈일자형 드레스(la robe garçonne, 소년 같은 드레스)〉입니다. 가슴과 허리의 구분이 거의 없는 매우 단순한 일자 형식이었고, 코르셋이 전혀 필요 없었어요. 1926년 그녀가 또 한 가지 결정적 디자인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검은 드레스(la petite robe noire, the little black dress, LBD)〉예요. 그 한 옷이 — 그 후 약 100년 동안 모든 여성의 〈필수 옷장 한 점〉이 됩니다.
또 한 가지 큰 변화가 〈머리〉예요. 1920년대 여성들이 처음으로 자기 머리를 매우 짧게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손느 컷(garçonne cut)〉, 〈보브 컷(bob cut)〉이 그 시대 가장 큰 유행이었어요. 그 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 여성의 〈긴 머리〉가 〈여성성〉의 가장 큰 표시였습니다. 그 한 가지 천 년의 룰이 약 5년의 1920년대에 거의 사라졌어요. 한 디자이너가 한 시대 여성의 자유를 만든 그 사례 — 1920년대 코코 샤넬이었습니다.

에릭 사티가 1917년 한 가지 매우 새로운 음악 개념을 발명했어요.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 furniture music)〉. 한 음악이 〈주의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한 가구처럼 한 자리에 있는 것〉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는 1866년 프랑스 옹플뢰르(Honfleur)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1917년 약 51세에 한 가지 새 음악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 그 새 음악의 기본 사상이 한 줄로 요약돼요. "음악은 한 침묵의 사이를 채우는 한 가지 가구일 뿐이다. 한 가구처럼, 음악도 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서."
그가 1920년 3월에 한 작은 콘서트에서 그 새 형식을 처음 시도했어요. 한 갤러리에서 한 가지 작은 곡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제발 음악을 듣지 마세요. 마치 우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가 실패했어요. 관객들이 결국 모두 음악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티의 그 한 가지 사상이 — 약 30년 후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1948년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가 사티의 〈가구 음악〉을 직접 인용하면서 자기 새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1952년 케이지의 가장 유명한 곡 〈4분 33초(4'33")〉가 —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한 음도 연주하지 않는 한 곡 — 사티의 가장 깊은 후예입니다. 그 곡 안에서 〈음악〉은 콘서트홀의 모든 우연한 소음 — 기침, 의자의 삐걱거림, 비행기 소리 — 이었어요. 한 명의 음악가의 한 가지 사상이 약 30년 후 다른 한 음악가의 가장 결정적 곡이 된 그 사례 — 사티에서 케이지로의 흐름이었습니다.

1925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이 한 가지 매우 단순한 게임을 발명했어요. 그 게임이 — 그 후 약 100년 동안 모든 〈집단 창작〉의 시조가 됩니다.
1925년 파리의 한 카페 〈카페 데 자라드(Café des Halles)〉에서, 앙드레 브르통,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이브 탕기(Yves Tanguy), 마르셀 뒤아멜(Marcel Duhamel)이 한 가지 매우 이상한 게임을 발명했어요. 한 종이를 길게 4~6번 접고, 첫 번째 사람이 그 첫 부분에 한 그림이나 한 단어를 그렸습니다. 그 후 종이를 접어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그 사람이 자기 부분에 다른 그림이나 단어를 적었어요. 마지막에 종이를 펼쳐 보면 — 매우 비논리적인, 한 가지 매우 신기한 〈한 그림 또는 한 문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게임의 첫 결과 한 문장이 한 줄로 — "우아한 시체가 새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Le cadavre exquis boira le vin nouveau)." 그 시대 누구도 이런 문장을 의도해서 쓰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한 문장이 — 한 가지 매우 깊은 시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게임의 이름이 〈우아한 시체(Cadavre Exquis)〉가 되었어요.
그 게임이 한 시대 미술의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상을 보여 줬습니다. "한 사람의 의식보다 여러 사람의 무의식이 더 깊은 진실을 만들 수 있다." 그 사상이 그 후 약 100년의 모든 〈집단 창작〉, 〈그룹 워크숍〉, 〈인터넷 협업〉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됩니다. 한 게임이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사상이 된 그 사례 — 1925년 〈우아한 시체〉였어요.

1887 뒤샹 출생 / 1893 미로 출생 / 1898 마그리트 출생
1900 프로이트 〈꿈의 해석〉
1904 달리 출생
1914.07 1차 대전 시작
1916.02.05 카바레 볼테르 — 다다이즘의 시작
1917.04.09 뒤샹 〈샘〉 출품
1918.11 1차 대전 끝
1919 한나 회흐 첫 포토몽타주
1922 다다이즘 약화 / 〈리테라튀르〉 잡지 시작
1924.10.15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발표
1925 〈우아한 시체〉 게임 발명 / 첫 초현실주의 전시
1929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 달리 파리 합류
1931 달리 〈기억의 지속〉
1933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1936 첫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 (런던)
1938 파리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 (브르통·뒤샹 큐레이팅)
1939 브르통이 달리를 그룹에서 추방 (〈Avida Dollars〉)
1939.09 2차 세계 대전 시작
1940~1945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미국으로 망명 (브르통·에른스트·마송)
1944 칸딘스키·뭉크 사망
1966 브르통 사망 / 1967 마그리트 사망
1968 뒤샹 사망 / 1983 미로 사망 / 1989 달리 사망

1. 휴고 발 〈가지베리 빔바〉 1916 — 의미 없는 시.
2. 뒤샹 〈샘〉 1917 — 미술의 정의를 바꾼 한 변기.
3. 한나 회흐 〈다다 부엌칼〉 1919 — 첫 포토몽타주.
4.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9 — 한 줄이 한 그림을 부정.
5.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 녹은 시계.
6. 마그리트 〈거짓 거울〉 1929 — CBS 로고의 시조.
7. 〈우아한 시체〉 1925 — 집단 창작의 시조.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6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논리를 떠난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한 시대 미술이 〈논리〉를 떠난 24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1924 · 한스 리히터 〈Dada: Art and Anti-Art〉 1965 ·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68 · MoMA·LACMA·퐁피두 디지털 컬렉션
대부분의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시대 풍경과 잡지식 일러스트는 미드저니 v7로 재현했습니다. 일부 후기 작품은 저작권 보호로 작업실 풍경으로 대체했습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약 40년.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클레의 색의 음악,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새 디자인이 만든 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