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약 20년 — 워홀의 〈캠벨 수프 캔〉,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점, 스텔라의 줄, 저드의 박스. 미술이 일상과 산업의 형식으로 다시 옮겨간 2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일곱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962년 7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작은 갤러리 〈페러스 갤러리(Ferus Gallery)〉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한 단독전이 열렸어요. 한 화가의 첫 큰 단독전이었습니다. 그 전시에 32점의 매우 똑같은 그림이 — 한 줄로 — 벽에 걸려 있었어요. 32가지 다른 캠벨 수프(Campbell's Soup)의 캔을 매우 정확하게 그린 32점의 그림. 그 한 화가의 이름이 —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었습니다.
그 전시가 — 한 시대 미술의 매우 결정적 한 시간이었어요. 그 시대까지의 추상표현주의가 매우 진지하고 매우 영적이고 매우 개인적이었다면, 워홀의 한 점이 — 매우 가볍고 매우 일상적이고 매우 비개인적이었습니다. "한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의 한 캔이 — 한 시대 미술이 될 수 있다." 그 한 가지 사상이 〈팝아트(Pop Art)〉의 결정적 첫 줄이었어요.
거의 같은 시기 — 1960년대 초 — 에 또 한 가지 매우 다른 운동이 만들어졌습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에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 댄 플래빈(Dan Flavin, 1933-1996), 칼 안드레(Carl Andre, 1935-2024),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931-2018) — 그 시대 약 6명의 화가/조각가가 — 매우 단순한, 매우 산업적인 형태 — 강철 박스, 형광등, 벽돌, 강철판 — 만으로 작업했어요.
그 두 운동 — 팝과 미니멀 — 이 매우 정반대로 보이지만, 한 가지 깊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매우 비개인적이다〉예요. 추상표현주의의 〈한 화가의 평생 깊은 감정〉을 두 운동이 모두 거부했어요. 워홀이 한 줄로 적었어요.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I want to be a machine)." 저드도 한 줄로 적었습니다. "한 작품이 한 사람의 깊은 감정이 아니라 — 한 객체(object)다." 그 두 줄이 — 한 시대 미술의 결정적 한 가지 새 사상이었어요.
또 한 갈래가 있었습니다. 〈컨셉추얼 아트(Conceptual Art)〉예요. 1965년경부터 약 12명의 화가들 — 솔 르윗,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1945-), 로런스 위너(Lawrence Weiner, 1942-2021),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 — 이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상을 만들었어요. "한 미술이 한 객체가 아니라 — 한 개념(concept)이다." 코수스가 1965년에 한 점의 매우 결정적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한 의자, 한 의자의 사진, 한 의자의 사전 정의 — 세 가지를 함께 전시한 〈하나와 셋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 그 한 점이 — 컨셉추얼 아트의 첫 결정적 표현이었어요.
이 호의 가장 큰 한 줄 — "미술이 일상의 한 캔, 산업의 한 박스, 한 줄의 정의가 되었습니다." 제1부는 다섯 풍경 — 워홀의 팩토리, 카스텔리 갤러리, 1962 MoMA, 스테이블 갤러리, 소호. 제2부는 다섯 사람 — 워홀, 리히텐슈타인, 호크니, 저드, 켈리. 제3부는 다섯 점. 제4부는 일상 — 매스미디어, 소비 사회, 패션, 음악, 컨셉추얼.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1962년 LA 페러스 갤러리부터 1980년대 소호까지, 20년의 다섯 풍경.
워홀, 리히텐슈타인, 호크니, 저드, 엘즈워스 켈리.
캠벨 수프 · 마릴린 · 익사하는 소녀 · 큰 첨벙 · 저드의 스택.
TV, 슈퍼마켓, 패션, 음악, 컨셉추얼 아트.
1962년 LA 페러스 갤러리에서 1980년대 소호까지. 한 시대의 새 미술 — 〈일상과 산업의 미술〉 — 의 다섯 풍경.

1964년 앤디 워홀이 뉴욕 47번가의 한 옛 모자 공장을 임대해, 그 모든 벽을 은박지로 덮었어요. 그 자리에서 워홀이 약 4년 동안 — 평생 가장 결정적 시기 — 그림 약 600점, 영화 약 60편, 그리고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회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까지 한 화가의 작업실이 거의 모두 〈비공개〉였어요. 한 화가가 자기 평생 가장 깊은 작업을 하는 사적인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워홀이 그 사상을 거꾸로 했어요. 〈팩토리〉는 매우 〈공개적〉이었습니다. 매일 수십 명의 사람들 — 화가, 시인, 음악가, 영화 배우, 부유한 컬렉터, 거리의 부랑자 — 이 그곳에 들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약을 하고, 함께 작업했어요.
그 자리의 단골이 매우 다양했어요. 시인 알렌 긴즈버그,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한 차례 방문),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1965년 워홀이 그들의 매니저가 되었음), 영화 배우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그리고 약 30명의 〈팩토리 슈퍼스타(Factory Superstars)〉 — 에디 세지윅(Edie Sedgwick, 1943-1971), 비바(Viva), 캔디 달링(Candy Darling) — 이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1968년 6월 3일, 한 비극적 사건이 있었어요. 〈팩토리 슈퍼스타〉 중 한 명인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 1936-1988)가 워홀에게 총을 쐈습니다. 워홀이 매우 큰 부상을 입었지만, 약 2개월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 후 그가 평생 매우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았고, 그가 다시는 첫 시기의 매우 자유로운 자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1984년 그가 또 한 자리로 옮겼지만, 첫 팩토리(1964~1968)의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는 영영 사라졌어요. 한 작업실이 한 사회 자리가 된 그 사례 — 1964~1968년 워홀의 팩토리였습니다.

한 시대의 결정적 미술 운동에 한 결정적 갤러리스트가 있어요. 추상표현주의에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이 있었듯이 — 팝과 미니멀의 가장 큰 갤러리스트가 〈레오 카스텔리〉였습니다.
레오 카스텔리는 1907년 9월 4일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이 레오 크라우스(Leo Krausz)였는데, 그가 1933년 약 26세에 자기 이름을 어머니의 결혼 전 성 〈카스텔리(Castelli)〉로 바꿨습니다.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그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어요. 그 후 약 18년 동안 그가 미술상으로 다양한 일을 했지만, 자기 갤러리는 가지지 않았습니다.
1957년 2월 약 50세에, 그가 뉴욕 4 East 77th Street에 자기 첫 갤러리를 열었어요. 그 갤러리에서 첫 큰 두 그룹의 화가들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가 —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예요. 그들이 〈네오 다다(Neo-Dada)〉라는 한 운동의 첫 번째 두 사람이었고, 1958년 카스텔리가 그들의 첫 단독전을 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 추상표현주의에서 팝아트로 가는 결정적 한 다리 역할을 했어요.
1962년 약 55세에 카스텔리가 한 결정적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워홀,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2022),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1933-2017) — 팝아트의 첫 4명의 큰 화가들 — 의 첫 단독전을 열어 주었어요. 그 후 약 1965년부터 그가 미니멀의 첫 큰 화가들 — 도널드 저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 댄 플래빈 — 도 자기 갤러리에 영입했습니다.
그가 약 40년 동안 그 갤러리를 운영했어요. 1999년 8월 21일 약 92세에 그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갤러리스트가 한 시대 미술을 만든 그 사례 — 카스텔리였어요. 지금까지 그의 갤러리가 〈Castelli Gallery〉라는 이름으로 매우 결정적 한 자리에 있습니다.

1962년 7월 9일 — LA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 앤디 워홀의 32점의 캠벨 수프 캔이 한 줄로 걸렸어요. 그 한 시간이 — 팝아트의 결정적 시작이었습니다.
1962년 7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 약 4주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한 작은 갤러리 〈페러스 갤러리(Ferus Gallery)〉에서 앤디 워홀의 첫 큰 단독전이 열렸어요. 워홀이 약 34세였습니다. 갤러리 안의 한 벽에 — 매우 좁고 긴 한 선반 위에 — 32점의 매우 작은 그림이 한 줄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32점이 — 그 시대 미국 슈퍼마켓의 모든 32가지 캠벨 수프 캔이었어요. 토마토, 치킨 누들, 야채, 비프 누들 등. 워홀이 그 모든 캔을 매우 정확하게 — 거의 사진처럼 — 그렸어요. 그러나 매우 결정적 한 가지 — 〈모든 그림이 매우 똑같다〉. 32가지 다른 라벨, 매우 똑같은 캔의 형태, 매우 똑같은 화면 구성. 그 한 가지가 — 그 시대 추상표현주의의 〈한 사람의 평생 깊은 감정〉의 정확한 반대였습니다.
그 전시가 큰 충격을 일으켰어요. 한 비평가가 부정적 글을 썼습니다. 〈누구라도 한 슈퍼마켓에서 그 진짜 캔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가 매우 긍정적으로 봤어요. 〈그것이 바로 그 사상이다 — 한 시대 모든 사람이 가진 〈일상의 한 캔〉을 한 미술로 만든 것〉. 그 시대 페러스 갤러리의 디렉터 어빙 블룸(Irving Blum)이 그 32점 모두를 약 1,000달러에 구입했어요. 그 32점이 1996년 약 1,500만 달러에 MoMA에 매각되었고, 지금 MoMA의 가장 결정적 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 작은 갤러리에서 한 시대 미술이 시작된 그 사례 — 1962년 페러스였어요.

1962년 11월 워홀의 첫 뉴욕 단독전이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열렸어요. 그 전시가 — 마릴린 먼로 사망 약 3개월 후의 한 시간이었습니다.
1962년 8월 5일 —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가 약 36세에 LA 자기 집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어요. 그것이 그 시대 미국 사회의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시대 마릴린이 — 미국 영화 산업의 가장 큰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워홀이 그 죽음을 듣자 —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그가 마릴린의 한 사진 — 1953년 영화 〈나이아가라(Niagara)〉의 한 컷 사진 — 을 가져와, 그것을 자기 새 〈실크스크린(silkscreen)〉 기법으로 변환했습니다. 실크스크린은 한 가지 매우 산업적인 인쇄 기법이에요. 한 사진이 매우 정밀한 메쉬(mesh)에 옮겨지고, 그 메쉬를 통해 캔버스 위에 잉크를 직접 인쇄해요. 한 그림이 — 매우 똑같이 — 무한히 인쇄될 수 있습니다.
그가 약 3개월 동안 그 마릴린의 사진을 — 다양한 색의 변주로 — 약 20점 만들었어요. 〈샷 마릴린(Shot Marilyns)〉, 〈매릴린 디프티치(Marilyn Diptych)〉, 〈오렌지 마릴린(Orange Marilyn)〉. 그 모든 그림이 — 마릴린의 매우 정형화된 한 얼굴, 매우 강한 색의 변주, 매우 산업적인 인쇄의 흔적 — 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62년 11월 6일 그 시리즈가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첫 단독전으로 공개되었고, 그것이 워홀의 평생 가장 큰 결정적 한 시리즈가 됩니다.
그 시리즈의 가장 깊은 한 가지 사상이 —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시대의 한 아이콘이 된다." 그 한 사상이 그 후 워홀의 평생 가장 큰 한 가지 — 〈Death and Disaster〉 시리즈 — 의 첫 시작이었어요. 한 죽은 여배우가 한 시대 아이콘이 된 그 사례 — 1962년 워홀의 마릴린이었습니다. 그 시리즈 중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Shot Sage Blue Marilyn, 1964)〉이 2022년 약 1억 9,500만 달러에 매각되어, 그 시대까지 가장 비싼 미국 그림이 되었어요.

1970년대 뉴욕 소호 — 옛 공장 건물들의 큰 로프트 공간이 — 화가들의 새 작업실이 되었어요. 그 자리가 — 미니멀과 컨셉추얼 아트의 가장 결정적 한 자리입니다.
소호(SoHo)는 〈South of Houston Street〉의 줄임말이에요. 뉴욕 맨해튼 남쪽 부분의 한 동네입니다. 19세기에 그곳에 매우 많은 작은 공장과 창고가 지어졌어요. 매우 큰 — 약 100~200㎡ — 의 〈로프트〉 공간을 가진 5~6층의 옛 주철 건물(cast-iron buildings)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그 공장들이 거의 모두 폐쇄되었어요. 매우 빈 건물들이 매우 낮은 임대료에 임대되고 있었습니다. 1968년경부터 화가들이 — 그 빈 큰 공간에 매료되어 — 그곳으로 옮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첫 그룹이 — 미니멀과 컨셉추얼 아트의 화가들이었습니다. 도널드 저드가 1968년 100 Spring Street의 한 5층 옛 건물 전체를 매입해 자기 평생 작업실 + 거주 + 영구 컬렉션의 자리로 만들었어요. 그 건물이 지금 〈주드 재단(Judd Foundation)〉에 의해 영구 박물관으로 운영됩니다.
그 외에 댄 플래빈, 솔 르윗,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척 클로즈(Chuck Close, 1940-2021),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8-2024), 그리고 약 200명의 다른 큰 화가들이 — 1970년대 소호에 거주했습니다. 그 자리에 또 한 가지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 — 〈얼터너티브 스페이스(Alternative Space)〉가 만들어졌어요. 〈112 Greene Street〉, 〈The Kitchen〉, 〈Artists Space〉 — 갤러리도 박물관도 아닌 — 매우 실험적인 한 공간들이 거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소호의 임대료가 매우 빠르게 올랐어요. 화가들이 더 동쪽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로, 그 후 〈첼시(Chelsea)〉로, 그 후 〈브루클린(Brooklyn)〉의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부시윅(Bushwick)〉으로 점점 옮겨갔습니다. 한 동네가 한 시대 미술의 자리가 되었다가 사라진 그 사례 — 1970년대 소호였어요.
앤디 워홀(1928-1987),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 데이비드 호크니(1937-), 도널드 저드(1928-1994), 엘즈워스 켈리(1923-2015). 한 시대의 두 갈래 — 팝과 미니멀 — 의 다섯 화가.

앤디 워홀이 한 줄로 적었어요.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I want to be a machine)." 그 한 줄이 — 그의 평생 가장 깊은 미학이었습니다.
앤드루 워홀라(Andrew Warhola)는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부모가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였습니다. 그가 어릴 때 매우 매우 가난했고, 약 8세에 〈시드넘 코레아(Sydenham chorea, 무도병)〉라는 매우 희귀한 신경 질환에 걸려 약 1년 동안 학교에 갈 수 없었어요. 그 시기에 그가 매일 자기 침대에 누워서 미국의 대중 잡지 〈라이프(LIFE)〉, 〈타임(TIME)〉을 봤습니다.
1949년 약 21세에 그가 카네기 멜론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옮겼어요. 그 후 약 10년 동안 그가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습니다. 그가 매우 결정적 한 가지 — 〈샵 윈도(shop window)의 일러스트〉, 〈잡지 광고〉 — 의 매우 정밀한 일러스트를 그렸어요. 그 시기 일러스트가 — 그의 평생 미학의 매우 깊은 시조가 됩니다.
1962년 약 34세에 그가 첫 큰 단독전을 LA 페러스 갤러리에서 열었어요. 그 후 약 25년 동안 그가 평생 약 4,000점의 그림과 약 100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평생 가장 큰 한 가지 사상 — 〈한 사람의 평생 깊은 감정이 아니라 — 한 시대의 표면(surface)을 그린다〉 — 에 매우 충실했어요.
그가 자기 인생에 대해 매우 결정적 한 줄을 적었습니다. "미래에 모든 사람이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 그 한 줄이 — 그 후 약 60년 후의 〈SNS 시대〉의 결정적 첫 예언이 됐어요. 1987년 2월 22일 약 58세에 그가 뉴욕에서 한 갈대뼈 수술 후 매우 갑작스러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한 시대 표면을 평생 그린 그 사례 — 워홀이었어요.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1961년 약 38세에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한 만화책 — 그의 아들이 보던 한 만화 — 의 한 컷을 매우 정확하게 한 큰 캔버스 위에 그려보자.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1923년 10월 27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어요. 1949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미술학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약 12년 동안 매우 평범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961년 약 38세에 그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그의 아들 데이비드(David Lichtenstein, 약 6세)가 그에게 한 가지 도전을 했습니다. 〈아빠는 미키 마우스만큼 잘 그릴 수 없잖아!〉
그 한 가지 도전이 — 그의 평생을 결정했습니다. 그가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한 만화책의 한 컷을 가져와, 그것을 매우 정확하게 —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그렸어요. 그 첫 그림이 〈Look Mickey(1961)〉입니다. 그 후 약 30년 동안 그가 매우 결정적 시리즈 — 〈드라우닝 걸(Drowning Girl, 1963)〉, 〈와우(Whaam!, 1963)〉, 〈M-Maybe(1965)〉 — 를 만들었어요.
그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벤-데이 도트(Ben-Day Dots)〉입니다. 그 시대 만화 인쇄에 사용된 한 가지 〈점 무늬〉를 — 그가 매우 큰 캔버스 위에 매우 정밀하게 — 손으로 그렸어요. 그 한 가지 — 점의 무한한 반복 — 이 그의 평생 가장 깊은 형식이 되었습니다. 한 그림 안에 약 10만 개의 점이 그려진 한 가지 매우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었어요.
그가 평생 약 5,000점의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1997년 9월 29일 약 73세에 그가 뉴욕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한 만화의 한 컷이 한 시대 그림이 된 그 사례 — 1961년 리히텐슈타인이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1964년 약 27세에 처음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어요. 그가 그곳에서 평생 가장 결정적 한 가지 — LA의 수영장과 햇빛 — 에 매료되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7년 7월 9일 영국 요크셔 브래드퍼드(Bradford)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어릴 때 매우 매우 흐린 영국 북쪽의 한 산업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1957년 약 20세에 그가 런던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에서 미술을 공부했어요. 1962년 약 25세에 그가 졸업할 때 — 매우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그가 자기 졸업 포트폴리오에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적은 한 그림 〈Going to be a Queen for Tonight〉을 발표했어요. (그 시대 영국에서 동성애가 1967년까지 불법이었어요.)
1964년 약 27세에 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습니다. 그 시대 LA의 매우 강한 햇빛, 매우 푸른 수영장, 매우 정형화된 모더니즘 건축이 — 그를 매우 매료시켰어요. 그가 매우 결정적 시리즈 〈A Bigger Splash(1967)〉,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1972)〉, 〈Mr and Mrs Clark and Percy(1970-1971)〉를 그렸습니다. 그 시리즈가 —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작업이 됐어요.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 그림이 한 사람의 직접 본 한 가지를 — 매우 정확하게 — 그려야 한다." 그가 추상표현주의도, 워홀의 팝아트도, 미니멀도 — 모두 매우 다른 길로 봤습니다. 그가 평생 〈사실주의의 새 형식〉을 추구했어요. 1980년대부터 그가 디지털 매체 — 폴라로이드 콜라주, 팩스 그림, 아이패드 그림 — 를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약 88세까지 — 지금 — 매우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어요. 한 영국 화가가 LA 수영장에 매료된 그 사례 — 1960~1970년대 호크니였습니다.

도널드 저드가 평생 거의 〈박스〉만 만들었어요. 강철 박스, 콘크리트 박스, 알루미늄 박스. 그 한 가지 매우 단순한 형식이 — 한 시대 미니멀리즘의 가장 깊은 시조입니다.
도널드 저드는 1928년 6월 3일 미국 미주리 엑셀시어 스프링스(Excelsior Springs)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한국 전쟁(1950-1953)에 미군 공병으로 약 18개월 참전했습니다. 그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약 8년 동안 매우 평범한 추상화가로 작업했어요.
1962년 약 34세에 그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그림을 — 매우 영구히 — 거부했어요. "한 그림은 한 평면 위의 환상이다. 그러나 한 객체(object)는 — 그 자체로 — 한 공간 안에 있다." 그가 그 후 약 32년 동안 평생 약 600점의 〈박스〉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박스가 — 매우 단순한 직육면체. 매우 정확한 산업 기법(주로 강철·알루미늄·플렉시글래스). 매우 매끄러운 표면. 매우 정확한 비율.
그가 1964년에 발표한 한 평론 〈특정 객체(Specific Objects)〉가 — 미니멀리즘의 결정적 첫 선언이 되었어요. 그 평론에서 그가 한 줄로 적었습니다. "이 새 작업은 그림도 조각도 아니다. 그것은 매우 다른 한 가지 — 〈특정 객체〉다."
1968년 약 40세에 저드가 뉴욕 소호의 한 5층 옛 주철 건물(101 Spring Street)을 매입해, 평생 작업실 + 거주 + 영구 컬렉션의 자리로 만들었어요. 1972년에는 텍사스 마파(Marfa) — 인구 약 2,000명의 한 매우 작은 사막 마을 — 에 매우 큰 자기 작업실 + 영구 박물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옛 미군 기지의 빈 강철 격납고들에 — 평생 가장 큰 자기 작품들 — 약 100점의 콘크리트 박스, 약 100점의 알루미늄 박스 — 을 영구 설치했어요.
1994년 2월 12일 약 65세에 그가 뉴욕에서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구 컬렉션 두 자리 — 뉴욕 101 Spring Street의 〈주드 재단〉과 마파의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 — 이 지금까지 매우 활발하게 운영됩니다. 한 박스가 한 시대 미니멀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도널드 저드였어요.

엘즈워스 켈리가 평생 매우 단순한 — 한 색의 한 모양 — 만 그렸어요. 그러나 그 한 가지 매우 단순한 형식 안에 한 가지 매우 깊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엘즈워스 켈리는 1923년 5월 31일 미국 뉴욕 주 뉴버그(Newburgh)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에 입대해, 1943~1945년 약 2년 동안 〈고스트 아미(Ghost Army)〉라는 매우 비밀스러운 부대 — 가짜 전차, 가짜 비행기, 가짜 무전 통신을 사용해 적을 속이는 부대 — 에 복무했어요. 그 시기에 그가 매우 매우 시각적 — 가짜와 진짜의 경계 — 한 가지를 매우 깊이 경험했습니다.
1948년 약 25세에 그가 〈G.I. 빌(GI Bill)〉의 지원으로 파리로 갔어요. 그곳에서 약 6년 동안 살면서 그가 평생 결정적 한 가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매일 파리 거리를 걷다가, 한 우연한 한 가지 — 한 건물의 한 창문, 한 길의 한 구석, 한 다리의 한 그림자 — 의 매우 단순한 한 모양에 매료되었어요. 그 모양을 그가 매우 정확하게 자기 캔버스 위에 옮겼습니다.
1954년 그가 미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약 60년 동안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 — 〈한 색의 한 모양〉 — 만 만들었어요. 매우 단순한 한 색면, 매우 정확한 한 가장자리(hard-edge), 매우 다양한 형태 — 직사각형, 원, 곡선, 비대칭 모양. 그가 그 형식을 〈하드 엣지(Hard-Edge)〉라 불렸습니다. 그것이 — 미니멀리즘의 첫 큰 한 가지였어요.
그가 평생 매우 활발하게 약 92세까지 작업했습니다. 2015년 12월 27일 약 92세에 그가 뉴욕 주 스펜서타운(Spencertown)의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한 색의 한 모양이 한 시대를 만든 그 사례 — 엘즈워스 켈리였습니다.
워홀 〈캠벨 수프 캔〉(1962), 〈마릴린 디프티치〉(1962), 리히텐슈타인 〈드라우닝 걸〉(1963), 호크니 〈A Bigger Splash〉(1967), 저드 〈무제(스택)〉(1965). 팝과 미니멀 20년의 다섯 점.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32점의 매우 똑같은 그림이 한 줄로 — 그 시대의 32가지 캠벨 수프 캔을 매우 정확하게 그린 32점.
이 작품은 1962년 워홀이 약 34세에 그린 32점의 그림이에요. 각 그림이 약 51×41cm의 매우 작은 크기로, 모든 그림이 매우 똑같은 캠벨 수프 캔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정확한 한 캔의 형태, 매우 똑같은 화면 구성, 매우 정확한 라벨. 그러나 32점이 모두 매우 다른 32가지 — 토마토, 치킨 누들, 야채, 비프 누들 등 — 의 라벨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한 사람의 평생 깊은 감정이 아니라, 한 시대 모든 사람이 매일 보는 한 객체를 그린다〉예요. 그 시대 미국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 이 32가지 캠벨 수프가 매우 똑같이 — 줄 지어 서 있었습니다. 워홀이 그 진열대의 한 풍경을 — 그대로 — 한 갤러리의 한 벽으로 옮겼어요.
이 작품이 1962년 페러스 갤러리 첫 단독전에 출품되었습니다. 그 시대 페러스 갤러리의 디렉터 어빙 블룸(Irving Blum)이 32점 모두를 약 1,000달러에 구입했어요. 그가 그 후 약 34년 동안 그 32점을 매우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1996년에 그가 그 32점을 MoMA에 약 1,500만 달러에 매각했어요. 지금 이 작품이 MoMA의 가장 결정적 한 작품 중 하나이고, 한 시대 팝아트의 결정적 첫 점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워홀이 한 줄로 적었어요. "내가 평생 매일 점심으로 한 캠벨 수프 캔을 먹었다. 약 20년 동안 매일 똑같은 한 캔. 그 매일이 한 시대 미국 모든 사람의 매일이다." 한 일상의 캔이 한 시대 미술이 된 그 사례 — 1962년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이었습니다.

워홀의 〈마릴린 디프티치〉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매우 큰 디프티치(diptych, 두 폭) 캔버스 위에, 마릴린 먼로의 한 얼굴이 — 약 50번 —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62년 — 마릴린 먼로 사망 약 3개월 후 — 에 그려진 한 점이에요. 워홀이 그녀의 1953년 영화 〈나이아가라(Niagara)〉의 한 컷 사진을 가져와, 그것을 자기 새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변환했습니다. 그 사진을 매우 정밀한 메쉬에 옮기고, 그 메쉬를 통해 캔버스 위에 직접 인쇄했어요.
한 큰 디프티치 — 두 캔버스가 함께 — 캔버스의 왼쪽 절반에 25번의 마릴린 얼굴이 매우 강한 색의 변주(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로 그려져 있고, 오른쪽 절반에 25번의 마릴린이 매우 비극적인 흑백으로 그려져 있어요. 그 한 가지 구조가 — 매우 깊은 한 가지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쪽의 매우 강한 색의 마릴린이 — 〈살아 있을 때의 마릴린〉, 한 영화 산업의 가장 큰 아이콘. 오른쪽의 매우 비극적인 흑백의 마릴린이 — 〈죽음 후의 마릴린〉, 점점 사라져 가는 한 기억. 두 절반이 함께 — 한 시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그렸어요. 그 한 가지 구조가 — 워홀이 평생 추구한 한 가지 —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시대 아이콘이 되는 과정〉의 가장 결정적 표현입니다.
이 그림이 1980년 테이트(Tate, 런던)에 매입되었어요. 지금 테이트 모던의 가장 결정적 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 죽은 여배우가 50번 반복된 그 사례 — 1962년 워홀의 마릴린 디프티치였어요.

리히텐슈타인의 〈드라우닝 걸〉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약 172×170cm의 매우 큰 캔버스 위에, 한 만화의 한 컷이 매우 정확하게 — 매우 큰 점들로 —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63년 리히텐슈타인이 약 40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그가 1962년에 출간된 한 미국 만화책 〈Run for Love!〉의 한 컷을 — 매우 정확하게 — 한 큰 캔버스 위에 옮겼습니다. 그림 안의 한 어린 여인이 — 매우 큰 파도 안에서 — 익사하는 한 시간이 그려져 있어요. 그녀의 한 손이 위로 들려 있고, 그녀의 입술이 매우 비통한 한 표정.
그림 위에 한 말풍선(speech bubble)이 있어요. 그 안에 한 줄 — "I don't care! I'd rather sink — than call Brad for help!"(상관없어! 브래드한테 도움을 청하느니 차라리 빠져 죽을 거야!) 그 한 줄이 — 매우 매우 만화 같은, 매우 매우 멜로드라마 같은, 매우 매우 미국적인 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 한 줄을 보면 — 즉시 한 멜로 만화의 분위기를 느꼈어요.
이 그림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Ben-Day Dots(점)〉입니다. 그림 안의 모든 색이 — 매우 큰 점의 무한한 반복으로 —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그 시대 만화 인쇄에 사용된 한 가지 정형화된 한 점 무늬였습니다. 리히텐슈타인이 그 점을 —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정밀하게 — 손으로 그렸어요. 그 한 가지 — 손으로 그린 매우 큰 인쇄 점 — 이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였습니다.
이 그림이 1971년 MoMA가 매입했어요. 지금 MoMA의 가장 결정적 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 만화의 한 컷이 한 그림이 된 그 사례 — 1963년 리히텐슈타인의 〈드라우닝 걸〉이었어요.

호크니의 〈A Bigger Splash〉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약 242×244cm의 매우 큰 캔버스 위에, 한 LA 수영장의 한 시간 — 한 사람이 막 다이빙한 직후의 첨벙(splash) 한 가지 — 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67년 호크니가 약 30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그가 LA에 거주한 약 3년 후의 시기였습니다. 그림 안의 한 풍경이 — 매우 단순해요. 한 큰 푸른 수영장, 한 매우 단순한 모더니즘 집의 한 부분, 한 노란 다이빙 보드, 한 야자수 한 그루, 매우 푸른 LA 하늘. 그리고 — 한 사람이 막 다이빙한 직후의 〈첨벙(splash)〉 한 가지.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첨벙〉이에요. 그림의 거의 모든 부분이 매우 정확하고 매우 평면적인 색면으로 그려져 있지만, 한 가운데의 첨벙만 — 매우 거친 흰색의 붓터치로 — 매우 빠른 한 시간을 그렸어요. 그 한 가지 대비 — 〈매우 정적인 풍경 + 매우 동적인 한 시간〉 — 이 이 그림의 가장 깊은 사상입니다.
호크니가 자기 그림에 대해 한 줄로 적었어요. "나는 그 첨벙을 그리는 데 약 2주가 걸렸다. 한 첨벙이 — 실제로는 약 0.5초의 한 시간이지만 — 매우 매우 오래 걸려서 그렸다." 그 한 줄이 — 호크니의 평생 가장 깊은 사상입니다. "한 매우 빠른 한 시간을 — 매우 천천히 — 그린다."
이 그림이 1981년 테이트가 매입했어요. 지금 테이트 모던의 가장 결정적 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1974년에 한 영화 〈A Bigger Splash〉가 호크니의 평생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로 출간되었고, 그 영화 제목이 — 이 그림의 제목에서 직접 따왔어요. 한 첨벙이 한 시대 미국의 풍경이 된 그 사례 — 1967년 호크니의 〈A Bigger Splash〉였습니다.

도널드 저드의 〈스택(Stack)〉 시리즈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이에요. 한 벽에 — 매우 똑같은 — 약 10개의 박스가 매우 정확한 같은 간격으로 수직으로 쌓인 한 작품.
이 작품은 1965년 저드가 약 37세에 처음 만든 한 형식이에요. 그가 그 후 약 30년 동안 약 70개의 〈스택〉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스택의 구조가 매우 똑같아요. 매우 똑같은 한 박스 (약 23×102×79cm) — 매우 매끄러운 강철 또는 플렉시글래스 표면 — 가 약 10개. 그 박스들이 한 벽에 — 매우 정확한 같은 간격(약 23cm) — 으로 수직으로 쌓여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정확한 동일성〉이에요. 모든 박스가 — 한 가지 매우 작은 차이도 없이 — 매우 똑같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간격도 — 한 가지 매우 작은 차이도 없이 — 매우 똑같습니다. 그 한 가지 매우 매우 정확한 동일성이 — 미니멀리즘의 가장 깊은 사상이었어요. 〈한 사람의 평생 깊은 감정이 아니라, 매우 정확한 한 가지 산업적 동일성〉.
또 한 가지 매우 결정적 — 한 벽 자체가 한 작품의 일부예요. 박스만이 작품이 아니고, 박스와 그 사이의 빈 간격, 그리고 그 박스가 걸린 한 벽 — 그 모두가 함께 한 작품입니다. 그 한 가지 사상이 — 〈한 작품이 한 공간 안에 한 객체로 있다〉라는 저드의 평생 사상의 결정적 표현이었어요.
이 1965년 첫 〈스택〉이 1968년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 매입했고, 지금 구겐하임의 영구 컬렉션입니다. 그 후 약 30년 동안 저드가 만든 약 70개의 〈스택〉이 거의 모든 큰 미술관 — MoMA, 테이트, 휘트니 — 에 영구 설치되었어요. 10개의 똑같은 박스가 한 시간 자리가 된 그 사례 — 1965년 저드의 첫 스택이었습니다.
매스미디어, 소비 사회, 패션, 음악, 컨셉추얼 아트.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1950년 미국 가정의 약 9%만 TV를 가지고 있었어요. 1970년에는 약 95%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 20년의 그 변화가 — 한 시대 미국 사람의 매일을 매우 결정적으로 결정했어요.
1947년 미국 RCA가 첫 흑백 TV를 시판하기 시작했어요. 그 후 약 3년 동안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1950년에 미국 약 4백만 가정 (약 9%)이 TV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 후 약 10년 후 — 1960년에 약 4,500만 가정 (약 87%) — 이 TV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약 10년 후 1970년에는 약 95%의 미국 가정이 TV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 결과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실 — "한 시대 모든 미국 사람이 매일 같은 한 가지를 본다." 1960년 9월 26일 — 미국 대통령 후보 케네디(Kennedy)와 닉슨(Nixon)의 첫 TV 토론이 — 약 7천만 명이 동시에 본 첫 큰 매스미디어 사건이었습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암살의 보도가 약 4일 동안 24시간 — 미국의 모든 채널에서 — 보도되었어요. 그것이 한 시대의 첫 큰 〈매스미디어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광고 산업이 매우 매우 빠르게 성장했어요. 한 슈퍼마켓의 한 캔, 한 자동차의 한 종, 한 옷의 한 브랜드 — 모든 것이 TV를 통해 매일 광고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 시대 미국 모든 사람이 — 같은 한 가지 캔, 같은 한 가지 자동차, 같은 한 가지 옷의 〈브랜드〉 — 를 매우 잘 알게 되었어요. 그 한 가지 〈공통 브랜드〉가 — 워홀의 캠벨 수프, 코카콜라, 마릴린, 엘비스 — 의 깊은 시조였습니다.
한 평론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이 1964년 한 책 〈매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에서 한 줄로 적었어요. "매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 그 한 줄이 — 한 시대 매스미디어의 결정적 첫 정의였습니다. 한 가전제품이 한 시대 일상을 결정한 그 사례 — 1950~1970년 미국 TV였어요.

1950년대 미국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한 자리가 만들어졌어요. 〈슈퍼마켓〉입니다. 그 자리에서 — 한 시대 미국 사람의 매일이 매우 다른 한 가지 형식이 되었어요.
1916년 미국 멤피스에서 한 가게 〈피글리 위글리(Piggly Wiggly)〉가 첫 〈셀프 서비스(self-service)〉 식료품 가게를 열었어요. 그 시대까지 미국 모든 식료품 가게가 — 한 점원이 손님의 주문을 받아 — 한 가지씩 가져다 주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피글리 위글리에서 — 손님이 직접 매장 안을 걸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골라 — 계산대에서 한 번에 결제하는 새 형식이 시작되었어요.
그 형식이 1950년대에 매우 빠르게 성장한 〈슈퍼마켓〉 형식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1950년 미국에 약 14,000개의 슈퍼마켓이 있었고, 1960년에는 약 33,000개가 되었어요. 같은 시기 〈쇼핑몰(shopping mall)〉이라는 한 가지 새 형식도 만들어졌어요. 1956년 미국 미네소타 〈사우스데일 센터(Southdale Center)〉가 — 첫 큰 실내 쇼핑몰이었습니다. 한 거대한 실내 공간 안에 — 약 80개의 가게가 — 함께 있는 한 가지 새 형식.
또 한 가지 매우 결정적인 것이 〈신용 카드〉예요. 1950년 〈다이너스 클럽(Diners Club)〉이 첫 일반 신용 카드를 도입했어요. 그 후 1958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1958년 〈비자(Visa)〉가 차례로 도입되었습니다. 신용 카드가 — 〈매일 현금이 없어도 매일 살 수 있다〉는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일상을 만들었어요.
그 결과 1950~1970년의 미국이 — 〈소비 사회(Consumer Society)〉라는 한 가지 새 형식이 됐습니다. 한 시대 모든 사람이 — 매일 슈퍼마켓에 가고, 매일 새 옷을 사고, 매일 새 자동차를 꿈꾸고, 매일 새 가전제품을 살 수 있다는 한 가지 매우 새로운 일상. 그 사회가 — 워홀의 〈팝아트〉의 결정적 직접 시조였어요. 〈한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의 한 캔이 — 한 시대 모든 사람의 매일이다.〉 한 슈퍼마켓이 한 시대 일상을 만든 그 사례 — 1950~1970년 미국 슈퍼마켓이었습니다.

1965년 메리 콴트가 무릎 위 약 15~20cm 위까지 올라간 매우 짧은 치마 — 〈미니스커트〉 — 를 발표했어요. 그 한 옷이 — 그 시대 여성의 결정적 첫 자유였습니다.
메리 콴트는 1930년 2월 11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어요. 그녀가 1955년 약 25세에 자기 친구 알렉산더 플런켓-그린(Alexander Plunket-Greene)과 함께 런던 첼시(Chelsea)의 한 작은 가게 〈바자(Bazaar)〉를 열었습니다. 그 가게에서 그녀가 매우 새로운 〈젊은 여성을 위한〉 옷을 디자인했어요.
1965년 약 35세에 그녀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옷을 발표했습니다. 〈미니스커트(mini-skirt)〉예요. 무릎 위 약 15~20cm까지 올라간 매우 짧은 치마. (그 시대까지 거의 모든 여성 치마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어요.) 그녀가 그 옷의 이름을 — 자기가 좋아한 한 자동차 〈미니 쿠퍼(Mini Cooper)〉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 한 옷이 — 매우 큰 충격이었어요. 그 시대까지 여성의 다리가 —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니스커트가 — 여성의 무릎과 종아리를 — 매우 직접 보여주었어요. 그것이 그 시대 여성에게 매우 큰 자유의 한 가지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자유롭게 입을 수 있고, 매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 후 약 5년 동안 미니스커트가 — 영국, 미국, 유럽 전체로 — 매우 빠르게 퍼졌어요. 1967년 트위기(Twiggy, 1949-) 같은 영국 모델이 미니스커트를 매우 매우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 여성의 매우 매우 큰 변화 — 〈여성이 자기 옷을 자기가 결정한다〉 — 의 가장 결정적 한 표현이었어요. 한 짧은 치마가 한 시대 자유가 된 그 사례 — 1965년 메리 콴트의 미니스커트였습니다.

1960~1970년의 약 10년 — 〈록(Rock)〉 음악의 첫 큰 황금기 — 가 그 시대 팝아트의 음악적 평행이었어요. 비틀스, 롤링스톤스, 밥 딜런이 — 그 시대 모든 사람의 매일을 결정했습니다.
1960년 8월 영국 리버풀(Liverpool)의 한 작은 클럽에서 〈비틀스(The Beatles)〉라는 한 록 밴드가 시작되었어요. 멤버 4명 —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1940-) — 가 — 매우 새로운 한 가지 록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1962년 첫 싱글 〈Love Me Do〉를 발표했고, 1964년 미국으로 진출해 매우 매우 큰 인기를 일으켰어요. 〈비틀마니아(Beatlemania)〉라는 한 시대의 새 사회 현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약 10년 동안 약 213곡을 만들었어요. 그 시대 록 음악의 매우 매우 결정적 시조가 됐습니다. 〈I Want to Hold Your Hand〉(1963), 〈Yesterday〉(1965), 〈Hey Jude〉(1968), 〈Let It Be〉(1970). 1970년 4월 그들이 해체했고, 그 후 약 10년 후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뉴욕에서 한 광기의 한 팬에게 살해되었어요.
또 한 사람의 결정적 인물이 밥 딜런(Bob Dylan, 1941-)이었습니다. 그가 1962년 약 21세에 첫 앨범을 발표했고, 그 후 약 60년 동안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어요. 그가 한 줄로 적은 매우 결정적 노래 〈Blowin' in the Wind〉(1963), 〈The Times They Are a-Changin'〉(1964), 〈Like a Rolling Stone〉(1965)이 — 그 시대 모든 미국 젊은 사람의 매일을 결정했어요. 2016년 약 75세에 그가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첫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워홀이 그 시대 록 음악과 매우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1965년 그가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한 록 밴드의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그 밴드의 첫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1967)〉의 표지 — 매우 유명한 한 노란 바나나 — 를 워홀이 직접 디자인했어요. 한 사람이 한 시대 음악을 만든 그 사례 — 1960~1970년 록의 첫 황금기였습니다.

1965년경부터 약 10년 동안 한 가지 매우 새로운 운동이 만들어졌어요. 〈컨셉추얼 아트(Conceptual Art)〉입니다. "한 미술이 한 객체가 아니라 — 한 개념(concept)이다."
1965년 미국의 한 어린 화가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1945-)가 약 20세에 한 점의 매우 결정적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가 한 갤러리의 한 자리에 — 세 가지 — 를 함께 전시했습니다. 한 가지 — 진짜 한 의자(나무로 만든). 두 번째 — 그 의자의 매우 큰 사진. 세 번째 — 영어 사전의 〈Chair(의자)〉라는 단어의 정의가 — 매우 큰 사진으로 — 인쇄된 한 종이.
그 한 점의 작품 제목이 〈하나와 셋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예요. 그 작품의 매우 깊은 사상이 — "한 의자(객체) + 한 의자의 사진(이미지) + 한 의자의 정의(언어). 그 세 가지가 함께 — 〈의자〉라는 한 개념을 매우 다른 세 가지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 컨셉추얼 아트의 가장 결정적 첫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또 한 사람의 결정적 화가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이었어요. 그가 1967년에 한 평론 〈컨셉추얼 아트에 대한 짧은 단상(Paragraphs on Conceptual Art)〉을 발표했습니다. 그 평론에서 그가 한 줄로 적었어요. "컨셉추얼 아트에서 —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아이디어가 결정되면, 그 후의 만드는 과정은 〈자동적인 한 가지〉다."
그가 그 사상에 매우 매우 충실했어요. 1968년부터 그가 〈벽 그림(Wall Drawings)〉이라는 한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매우 매우 단순한 한 가지 — 〈한 벽 위에 한 줄의 직선을 — 매우 정확한 한 가지 룰에 따라 — 그려라〉. 그 룰이 그의 작품 자체였고, 그 룰을 다른 사람 — 그의 학생, 그의 조수, 그의 컬렉터의 친구 — 이 직접 그려도 〈솔 르윗의 작품〉이 됩니다. 그 한 가지 사상이 — 그 후 50년의 컨셉추얼 아트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됐어요. 한 미술이 한 개념이 된 그 사례 — 1965년 코수스의 〈하나와 셋의 의자〉였습니다.

1923 리히텐슈타인 출생 / 1923 켈리 출생
1928.06.03 저드 출생 (미주리) / 1928.08.06 워홀 출생 (피츠버그)
1937.07.09 호크니 출생 (영국) / 1945 코수스 출생
1947 RCA 첫 흑백 TV 시판
1955 메리 콴트 〈바자〉 가게 (런던 첼시)
1956 첫 실내 쇼핑몰 〈사우스데일 센터〉
1957.02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 개관 (뉴욕)
1958 재스퍼 존스·라우셴버그 첫 단독전
1960 비틀스 결성 (영국 리버풀)
1961 리히텐슈타인 〈Look Mickey〉 (첫 팝)
1962.07.09 워홀 〈32 캠벨 수프 캔〉 (LA 페러스 갤러리)
1962.08.05 마릴린 먼로 사망 (36세)
1962.11.06 워홀 첫 뉴욕 단독전 (스테이블 갤러리)
1963 리히텐슈타인 〈드라우닝 걸〉
1963.11.22 케네디 암살 (4일 24시간 보도)
1964 매클루언 〈매체의 이해〉 / 워홀 팩토리 시작 (47번가)
1964 저드 〈특정 객체〉 평론 / 호크니 LA 이주
1965 코수스 〈하나와 셋의 의자〉 / 메리 콴트 미니스커트
1965 저드 첫 〈스택〉 / 워홀 벨벳 언더그라운드 매니저
1967 르윗 〈컨셉추얼 아트 단상〉 / 호크니 〈A Bigger Splash〉
1968 르윗 첫 〈벽 그림〉 / 저드 101 Spring Street 매입
1968.06.03 워홀 총격 (솔라나스)
1970 비틀스 해체 / 미국 가정 TV 95%
1972 저드 텍사스 마파 시작
1980.12.08 존 레논 살해 (뉴욕)
1987.02.22 워홀 사망 (58세, 합병증)
1994.02.12 저드 사망 (65세, 림프종)
1996 페러스 갤러리 32점이 MoMA에 매각 (약 1,500만 달러)
1997.09.29 리히텐슈타인 사망 (73세)
1999.08.21 카스텔리 사망 (92세)
2015.12.27 켈리 사망 (92세) / 2016 딜런 노벨 문학상
2022 워홀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약 1억 9,500만 달러 매각

1. 워홀 〈캠벨 수프 캔〉 1962 — 한 일상의 캔.
2. 워홀 〈마릴린 디프티치〉 1962 — 한 시대 아이콘.
3. 리히텐슈타인 〈드라우닝 걸〉 1963 — 한 만화의 한 컷.
4. 저드 〈무제(스택)〉 1965 — 10개의 똑같은 박스.
5. 코수스 〈하나와 셋의 의자〉 1965 — 한 개념의 미술.
6. 호크니 〈A Bigger Splash〉 1967 — 한 첨벙의 한 시간.
7. 켈리 〈Red Blue Green〉 1963 — 한 색의 한 모양.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9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매스미디어와 소비 사회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미술이 일상과 산업의 형식이 된 20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 매클루언 〈매체의 이해〉 1964 · 저드 〈특정 객체〉 1964 · 르윗 〈컨셉추얼 아트 단상〉 1967 · MoMA·테이트 모던·구겐하임 디지털 컬렉션
거의 모든 팝아트와 미니멀 작품이 21세기까지 저작권 보호되므로, 작품 일부는 미드저니 v7의 팝·미니멀 풍 재현으로 대체했습니다. 인물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중국 산수화의 1,000년, 일본 우키요에의 황금기, 한국 풍속화의 정조 시대. 동양의 세 길 — 한 산수의 깊이, 한 부세의 가벼움, 한 풍속의 따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