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미술사Luna Art History · 2027
Vol
18
No.18 · 20부작
동양 미술의 길
SPECIAL ISSUE · 동양의 세 길

동양 미술의

중국 산수화의 1,000년, 일본 우키요에의 황금기, 한국 풍속화의 정조 시대 — 동양의 세 길 — 한 산수의 깊이, 한 부세의 가벼움, 한 풍속의 따뜻함.

LUNA WHALE · ART HISTORY54 PAGES · 4 PARTS
EDITOR'S LETTER · 여는 글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여덟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이 잡지의 17호가 — 거의 모두 〈서양 미술〉의 한 흐름을 따라갔어요. 동굴 벽화, 이집트 신전, 그리스 조각,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상주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 그 모든 한 흐름이 — 매우 결정적이지만 — 인류 미술의 〈한 절반〉일 뿐이었습니다.

이 호는 — 또 다른 한 절반 — 〈동양 미술〉의 세 길을 따라갑니다. 동양에서도 인류 미술의 가장 깊은 한 흐름이 — 약 2,000년 동안 — 매우 결정적으로 흘렀어요. 그 흐름이 서양 미술의 한 흐름과 매우 다르고, 매우 깊고, 매우 매우 풍부합니다.

첫 번째 길 — 중국 산수화(山水畵)의 1,000년이에요. 약 10세기 송나라(宋, Song Dynasty, 960-1279)부터 약 17세기 청나라(淸, Qing Dynasty, 1644-1912) 초기까지 약 700년 동안. 중국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그림 형식이 만들어졌어요. 〈산수화〉입니다. 한 매우 큰 산, 한 매우 깊은 물, 한 매우 작은 사람. 그 한 가지 매우 정교한 비율 — 〈인간이 자연 안에서 매우 작다〉 — 이 — 동양 미학의 가장 깊은 한 사상이었습니다. 송나라의 화가 판콴(范寬, Fan Kuan, 약 950-1032)의 〈여행자가 산과 물 사이에 있다(谿山行旅圖)〉가 — 그 시조의 결정적 한 점이에요.

두 번째 길 — 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황금기입니다. 약 1700년 에도 시대(江戸時代, Edo Period, 1603-1868) 중반부터 1860년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직전까지 약 170년 동안. 일본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그림 형식이 만들어졌어요. 〈우키요에(浮世絵, 부세회)〉입니다. 〈부세〉는 — 〈매우 빠르게 변하는 — 매우 가벼운 — 한 시간의 세계〉라는 뜻이에요. 그 매우 가벼운 세계의 한 풍경 — 한 게이샤(芸者)의 한 시간, 한 가부키(歌舞伎) 배우의 한 자세, 한 산의 한 풍경 — 을 매우 정교한 목판화(木版畵)로 인쇄한 한 가지 새 형식이었습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Katsushika Hokusai, 1760-1849)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Utagawa Hiroshige, 1797-1858)가 그 황금기의 가장 큰 두 거장이에요.

세 번째 길 — 한국 풍속화(風俗畵)의 정조 시대입니다. 1776년 정조(正祖, 1752-1800)가 즉위한 후 약 24년 동안. 한국 조선 후기에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그림 형식이 만들어졌어요. 〈풍속화(風俗畵)〉입니다. 그 시대까지의 모든 그림이 — 한 양반의 한 가지 매우 점잖은 자세, 한 산의 한 매우 큰 풍경 — 만 그렸지만, 풍속화가 그 시대 일반 백성의 매일의 한 가지 — 한 시장의 한 시간, 한 씨름의 한 자세, 한 단오의 한 그네 — 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김홍도(金弘道, Kim Hong-do, 1745-1806)와 신윤복(申潤福, Sin Yun-bok, 1758-?)이 그 가장 큰 두 거장이에요.

이 호의 가장 큰 한 줄 — "동양 미술이 자연의 깊이, 일상의 가벼움, 백성의 따뜻함을 그렸습니다." 제1부는 다섯 풍경 — 송나라 산수, 에도 일본, 정조 한국. 제2부는 다섯 사람. 제3부는 다섯 점. 제4부는 일상 — 차, 글씨, 정원, 시, 병풍.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2027년 10월 · 루나웨일 미술사 편집실
EDITOR — Luna Whale
02
CONTENTS · 목차

한 호의 네 부

A

시대의 풍경

송나라 산수, 에도 일본의 부세, 정조 시대 한국 — 다섯 풍경.

P.04 – P.15
B

동양의 다섯 사람

판콴, 호쿠사이, 히로시게, 김홍도, 신윤복.

P.16 – P.27
C

남긴 다섯 점

계산행려도·가나가와 큰 파도·도카이도 53선·씨름·단오풍정.

P.28 – P.39
D

차·글씨·정원·시·병풍

동양 일상 미학의 다섯 자리.

P.40 – P.51
03
A
PART A · 5 STORIES · 시대의 풍경

동양의 다섯 풍경

송나라의 깊은 산, 에도의 빠른 부세, 정조의 따뜻한 풍속. 한 시대 동양의 세 길의 다섯 풍경.

동양은 자연·도시·백성의 세 길로 흘렀습니다.
04 · CHAPTER OPENER
04
PART A · 다섯 풍경

동양의 다섯 풍경

A1

10세기 송나라의 산수

판콴·궈시·미푸의 산수화 · P.06
A2

1700년대 에도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도시 · P.08
A3

1830년대 우키요에 황금기

호쿠사이·히로시게의 풍경판화 · P.10
A4

에도 후지산의 풍경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 · P.12
A5

1776 정조 시대 한양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자리 · P.14
05
A · 01 · 송나라 산수
송나라 산수
10세기 중국 송나라(宋, 960-1279)의 산수화 — 매우 큰 산, 매우 깊은 물, 매우 작은 한 사람. 약 700년 동양 미학의 가장 깊은 시조.
06
A · 01 · 송나라 산수 · 960 ~ 1279

한 산이 한 시대 미학의 시조

10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한 가지 매우 결정적 미학이 만들어졌어요. 〈산수화(山水畵)〉입니다. 한 매우 큰 산, 한 매우 깊은 물, 한 매우 작은 사람. 그 한 가지 비율이 — 그 후 1,000년 동양 미학의 가장 깊은 시조가 됐어요.

중국 송나라는 960년부터 1279년까지 약 320년 동안 지속된 한 왕조예요. 그 시대가 — 중국 미술 역사의 첫 큰 황금기였습니다. 그 시대까지 중국 그림의 가장 큰 형식이 — 〈인물화(人物畵)〉, 그 후 〈화조화(花鳥畵)〉, 그 후 〈산수화〉의 순서로 발전했어요. 그러나 송나라에 와서 — 산수화가 가장 큰 첫 형식이 됐습니다.

그 시대 산수화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 — 〈인간이 자연 안에서 매우 작다〉라는 사상이에요. 그림 안의 매우 거대한 산, 매우 깊은 물의 한 가운데에 — 매우 매우 작은 한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 한 사찰을 향해 가는 한 여행자, 한 어부, 한 농부. 그 사람의 크기가 — 산 전체의 약 1/100, 약 1/200 정도. 매우 매우 작아요. 그 한 가지 비율이 — 동양 미학의 가장 깊은 한 가지 사상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를 그렸습니다.

그 시대 산수화의 가장 큰 거장 세 명이 있었어요. 첫째 형호(荊浩, Jing Hao, 약 855-915)와 그의 제자 관통(關仝, Guan Tong, 약 907-960). 그들이 〈북방 산수파(北方山水派)〉의 시조였어요. 둘째 동원(董源, Dong Yuan, 약 934-약 962)과 그의 제자 거연(巨然, Juran). 그들이 〈남방 산수파(南方山水派)〉의 시조였습니다. 셋째 — 가장 결정적 — 판콴(范寬, Fan Kuan, 약 950-1032)예요. 그가 형호의 한 제자로 시작했지만, 그 후 자기 평생 가장 큰 한 점 〈여행자가 산과 물 사이에 있다(谿山行旅圖, Travelers Among Mountains and Streams, 약 1000년)〉를 그렸어요. 그 한 점이 — 약 1,000년 동안 중국 산수화의 가장 결정적 첫 점이었습니다.

송나라960 ~ 1279
북방 산수파형호 · 관통 · 판콴
남방 산수파동원 · 거연
계산행려도약 1000 판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 송나라 산수화의 가장 깊은 사상.
07
A · 02 · 1700년대 에도
에도 도시
1700년대 일본 에도(江戸, 지금 도쿄) —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1603-1868)의 한 시대. 약 100만 명의 인구로 그 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
08
A · 02 · 에도 시대 · 1603 ~ 1868

한 도시가 한 시대 미술을 만들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가 일본을 통일한 후 — 약 265년의 〈에도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그 시대 에도가 — 그 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천황에게 〈쇼군(将軍, Shogun)〉이라는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직책을 받았어요. 그 후 약 265년 동안 — 일본을 도쿠가와 가문이 거의 완전히 통치했습니다. 그 시기가 〈에도 시대(江戸時代)〉라 불려요.

도쿠가와 막부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 정책이 — 〈사코쿠(鎖国, 쇄국)〉예요. 1633년부터 1639년까지 약 6년 동안, 막부가 일본의 모든 외국과의 관계를 거의 끊어냈습니다. 한 곳 — 나가사키(長崎)의 한 작은 인공 섬 〈데지마(出島)〉 — 에서만 매우 제한적인 네덜란드·중국 무역이 허락되었어요. 일본인이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고, 외국인이 일본 안으로 거의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약 200년 후 1854년 미국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매우 큰 흑선(黒船)을 끌고 와서 강제로 그 쇄국을 깰 때까지요.

그 쇄국 안에서 — 일본 안의 한 매우 독자적 도시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에도(江戸, 지금 도쿄)가 — 그 시대 가장 큰 도시였어요. 1700년대 약 100만 명의 인구. 그 시대 영국 런던이 약 67만 명, 프랑스 파리가 약 50만 명이었으므로 — 에도가 — 그 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에도의 인구 구조가 매우 매우 흥미로워요. 약 절반이 〈무사(武士, samurai)〉와 그 가족이었습니다. 그 시대 막부의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제도 — 모든 다이묘(大名, 영주)가 자기 부인과 자식을 에도에 인질로 두고, 자기는 1년에 약 6개월 에도에 거주해야 하는 — 때문에 매우 많은 무사가 에도에 살았어요. 또 절반이 〈조닌(町人)〉이라 불리는 — 상인, 장인, 공무원, 예술가 — 의 도시 평민이었습니다. 그 조닌의 새 도시 문화가 — 〈우키요에(浮世絵)〉의 결정적 시조가 됐어요. 한 도시가 한 시대 미술을 만든 그 사례 — 1700년대 에도였습니다.

에도 시대1603 ~ 1868
쇄국1633 ~ 1639 시작
에도 인구약 100만 명 (1700년대)
조닌 문화도시 평민 미학
한 도시가 한 시대 미술을 만든 사례 — 1700년대 일본 에도.
09
A · 03 · 우키요에 황금기
우키요에 황금기
1830~1860년대 — 우키요에(浮世絵)의 가장 큰 황금기.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1831),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1833) — 두 시리즈가 동시대 결정작.
10
A · 03 · 우키요에 황금기 · 1830 ~ 1860

한 목판화가 한 시대 일본의 풍경

우키요에가 약 1700년경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그 가장 결정적 황금기는 — 183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약 30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평생 가장 큰 두 시리즈가 — 거의 동시에 — 만들어졌어요.

우키요에(浮世絵, 부세회)는 〈부세(浮世)의 그림〉이라는 뜻이에요. 〈부세〉는 — 〈매우 빠르게 변하는, 매우 가벼운, 매우 일시적인 한 시간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 시대 에도의 새 도시 문화 — 카부키(歌舞伎, 가부키 극장), 게이샤(芸者), 차야(茶屋, 다실), 〈요시와라(吉原, 요시와라 거리, 매춘 구역)〉 — 의 풍경을 그린 한 가지 새 형식이었어요.

우키요에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정교한 목판화 인쇄〉입니다. 한 그림이 — 약 10~30개의 매우 정교한 나무 판 — 각 색별로 한 판 — 으로 인쇄되어, 매우 똑같은 한 그림이 약 200~5,000장 인쇄될 수 있었어요. 그 한 가지 산업 인쇄가 — 우키요에의 가장 결정적 새 점이었습니다.

1700년경부터 약 130년 동안 — 〈초기 우키요에〉가 만들어졌어요. 그 시기 가장 큰 화가들이 —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清信, 1664-1729),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5-1770),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 토슈사이 사라쿠(東洲斎写楽, 활동 1794-1795)였습니다. 그 시기 우키요에가 — 거의 모두 인물화(美人画, 미인화), 가부키 배우 그림(役者絵, 야쿠샤에) — 이었어요.

그러나 1830년경부터 —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형식이 만들어졌어요. 〈풍경 우키요에(名所絵, 명소화)〉입니다. 그 시대 일본 도시인들이 — 점점 여행을 매우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 일본의 명소를 그린 풍경판화가 매우 매우 인기가 됐습니다. 1831년 호쿠사이가 약 71세에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 시리즈를 발표했고, 1833년 히로시게가 약 36세에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 시리즈를 발표했어요. 그 두 시리즈가 — 우키요에 황금기의 결정적 시조였습니다. 그 후 약 30년 동안이 우키요에의 가장 큰 황금기였어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시대가 끝나면서, 우키요에도 점점 끝났습니다.

우키요에 시작약 1700
초기 미인화우타마로 · 사라쿠
황금기 풍경1830 ~ 1860
결정 시리즈후가쿠 36경 · 도카이도 53선
한 목판화가 한 시대 일본의 풍경이 된 사례 — 1830~1860년 우키요에 황금기.
11
A · 04 · 후지산
후지산
후지산(富士山, Mt. Fuji, 3,776m) — 일본의 가장 신성한 산. 호쿠사이가 1831년에 그 산의 36가지 풍경을 그린 〈후가쿠 36경〉이 — 그의 평생 가장 큰 시리즈였어요.
12
A · 04 · 후지산 · 호쿠사이 36경

한 산이 36가지로 그려지다

후지산이 일본의 가장 신성한 한 산이에요. 호쿠사이가 1831년에 그 한 산의 36가지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 한 시리즈가 — 그의 평생 가장 큰 한 작업이었어요.

후지산(富士山)은 일본 혼슈(本州) 중부의 한 산입니다. 해발 3,776m로 일본 최고봉이에요. 그 매우 정형화된 한 가지 — 매우 매우 정형화된 한 원뿔 모양 — 의 형태와, 정상의 매우 깊은 흰 눈이, 일본인에게 매우 매우 신성한 한 산이었습니다. 약 12세기부터 〈후지산 신앙(富士信仰)〉이 발전해, 매우 많은 사람이 매년 그 산을 등반(혹은 가까이서 보았어요).

1831년 호쿠사이가 약 71세에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그가 후지산의 한 가지 — 36가지 — 풍경을 그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가 일본의 다양한 자리 — 에도, 가나가와, 시즈오카, 요코하마, 산악 마을, 어촌 — 에서 본 후지산의 다양한 한 풍경을 매우 정교한 우키요에 목판화로 그렸어요.

이 시리즈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한 산이 한 풍경의 한 부분〉이라는 사상이에요. 거의 모든 그림 안에서 — 후지산이 그림의 한 가운데 있지 않고, 멀리 한 작은 한 부분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림의 한 가운데에는 한 시간의 다양한 한 사건 — 한 어부, 한 다리, 한 꽃, 한 큰 파도, 한 폭풍 — 이 있고, 그 한 사건의 뒤에 후지산이 매우 작은 한 부분으로 보여요. 그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구도가 — 호쿠사이의 평생 가장 깊은 시각이었습니다.

그 36점이 약 1830~1832년 약 2년에 걸쳐 인쇄되었어요. 그러나 매우 큰 인기로, 약 10점이 더 추가되어 — 결국 약 46점의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점이 — 매우 정교한 〈프루시안 블루(プロイセン青, Prussian Blue)〉라는 한 가지 새 합성 안료 — 1704년 독일에서 발견된 첫 합성 청색 안료 — 를 매우 매우 많이 사용했어요. 그 깊은 푸른 색이 — 호쿠사이의 평생 가장 결정적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한 산이 36가지로 그려진 그 사례 — 1831년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이었어요.

후지산해발 3,776m
호쿠사이 36경1830 ~ 1832
실제 점 수약 46점
새 안료프루시안 블루
한 산이 36가지로 그려진 사례 — 1831년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
13
A · 05 · 정조 시대 한양
정조 한양
1776~1800년 약 24년의 정조(正祖) 시대 한양 — 조선 후기의 한 큰 르네상스. 김홍도, 신윤복, 정선, 강세황 등 —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황금기 중 하나.
14
A · 05 · 정조 시대 · 1776 ~ 1800

한 임금이 한 시대 미술의 자리

1776년 정조(正祖, 1752-1800)가 즉위한 후 약 24년 동안 —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르네상스가 — 한양(漢陽, 지금 서울)에서 일어났어요. 그 시기에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황금기 중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1776년 3월 10일 — 정조가 약 24세에 한국 조선 왕조의 22대 왕이 되었어요. 그가 즉위한 후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 평생 가장 깊은 한 가지 사상이 — 〈문예(文藝)와 학문의 부흥〉이었어요. 그 시기를 〈정조 시대〉라 부릅니다. 약 24년의 그 시기에 — 한국 미술과 학문의 매우 큰 황금기가 만들어졌어요.

그가 1776년 9월 25일 〈규장각(奎章閣)〉이라는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새 기관을 만들었어요. 〈왕립 도서관 + 학자 회의 + 임금의 서재〉가 합쳐진 한 가지 새 형식이었습니다. 그곳에 그 시대 가장 큰 학자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1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 이 — 매일 모여 학문과 미술을 토론했어요.

그 시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풍속화(風俗畵)〉입니다. 그 시대까지 한국 그림의 거의 모두가 — 한 양반의 한 점잖은 자세, 한 산의 한 매우 큰 풍경 — 만 그렸어요. 그러나 정조 시대의 두 큰 화가 — 김홍도(金弘道, Kim Hong-do, 1745-1806)와 신윤복(申潤福, Sin Yun-bok, 1758-?) — 이 — 그 시대 한국 일반 백성의 매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김홍도의 〈씨름(씨름圖)〉, 〈서당(書堂圖)〉, 〈기와이는 사람(瓦工)〉 — 그 시대 한국 평민의 한 시간을 매우 따뜻하게 그렸어요.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圖)〉, 〈쌍검대무(雙劍對舞圖)〉, 〈주유청강(舟遊淸江圖)〉 — 그 시대 한국 부유한 양반의 매우 우아한 한 시간을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 두 사람의 풍속화가 —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한 가지 — 〈백성의 따뜻함〉을 —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했어요.

1800년 6월 28일 — 약 49세에 —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한국 미술의 그 황금기가 점점 어두워졌어요. 한 임금이 한 시대 미술의 자리를 만든 그 사례 — 1776~1800년 정조 시대였습니다.

정조 즉위1776.03.10
규장각1776.09.25
두 화가김홍도 · 신윤복
정조 사망1800.06.28 (49세)
한 임금이 한 시대 미술의 자리를 만든 사례 — 1776~1800년 정조 시대.
15
B
PART B · 5 PEOPLE · 동양의 다섯 사람

동양의 다섯 사람

판콴(약 950-1032), 호쿠사이(1760-1849), 히로시게(1797-1858), 김홍도(1745-1806), 신윤복(1758-?). 동양 미술의 약 1,000년의 다섯 거장.

한 시대가 다섯 사람으로 동양을 그렸습니다.
16 · CHAPTER OPENER
16
PART B · 다섯 사람

동양의 다섯 이름

B1

판콴 — 송나라 산수의 시조

약 950 ~ 1032 · 중국 화가 · P.18
B2

가츠시카 호쿠사이

1760 ~ 1849 · 일본 화가 · P.20
B3

우타가와 히로시게

1797 ~ 1858 · 일본 화가 · P.22
B4

김홍도 (단원) — 백성의 따뜻함

1745 ~ 1806 · 한국 화가 · P.24
B5

신윤복 (혜원) — 양반의 우아함

1758 ~ ? · 한국 화가 · P.26
17
B · 01 · 판콴
판콴
판콴(范寬, Fan Kuan, 약 950-1032) — 중국 송나라 시대 산수화의 가장 큰 시조. 그의 〈여행자가 산과 물 사이에 있다(谿山行旅圖)〉가 — 약 1,000년 동양 미학의 결정적 한 점.
18
B · 01 · 판콴 · 약 950 ~ 1032

한 화가가 한 산을 매우 깊이 보다

판콴이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 산을 그리려면 — 그 한 산 안에 매우 매우 오래 살아야 한다." 그가 평생 깊은 산 속에서 살면서 — 한 산을 매우 매우 깊이 — 본 한 사람이었습니다.

판콴은 약 950년 중국 산시(陝西, Shaanxi) 화원(華原)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본명이 범중정(范中正)이었지만, 그가 매우 매우 자유롭고 거친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 친구들이 그를 〈콴(寬, 〈매우 자유로운, 매우 거친〉)〉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판콴(范寬)〉이라 알려졌어요.

그가 처음 형호(荊浩)와 그의 제자 관통(關仝)의 한 제자로 배웠어요. 그러나 약 30대에 그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습니다. "옛 거장들의 그림을 모방하지 말자. 자연을 직접 보자." 그가 그 후 평생 — 산시성의 매우 깊은 산 속 — 종남산(終南山, Zhongnan Mountains), 태화산(太華山, Mt. Hua) — 에서 살면서 — 매일 한 산을 — 매우 매우 깊이 보았어요.

그가 한 줄로 적은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이 — "옛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스승이고, 자연보다 자기 마음이 먼저 스승이다(師古人不如師造化, 師造化不如師心源)." 그 한 줄이 — 동양 미학의 가장 깊은 한 사상이 됐습니다.

그가 평생 약 30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3점뿐입니다. 가장 큰 한 점이 — 〈여행자가 산과 물 사이에 있다(谿山行旅圖, Travelers Among Mountains and Streams)〉예요. 약 1000년경 그렸고, 약 200×100cm의 매우 큰 비단 위 수묵화입니다. 지금 —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국립 고궁 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 National Palace Museum)〉의 가장 결정적 영구 컬렉션이에요. 그 그림 한 점이 — 약 1,000년 중국 산수화의 가장 결정적 첫 시조였습니다. 한 화가가 한 산을 매우 깊이 본 그 사례 — 판콴이었어요.

생몰약 950 ~ 1032
출생중국 산시 화원
평생 산종남산 · 태화산
대표작계산행려도 약 1000
"옛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스승이고, 자연보다 자기 마음이 먼저 스승이다." — 판콴.
19
B · 02 · 호쿠사이
호쿠사이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Katsushika Hokusai, 1760-1849) — 일본 에도 시대 우키요에의 가장 큰 거장. 평생 약 30,000점의 그림을 그렸고, 〈가나가와 큰 파도〉와 〈후가쿠 36경〉의 시조.
20
B · 02 · 호쿠사이 · 1760 ~ 1849

한 사람이 30,000점을 그리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평생 약 30,000점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 한 사람의 평생이 — 그 시대 일본 우키요에의 가장 큰 황금기였습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1760년 10월 31일 일본 에도(江戸, 지금 도쿄) 가츠시카(葛飾)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이 나카지마 테츠조(中島鉄蔵)였습니다. 그가 약 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약 14세에 한 큰 우키요에 화가 카츠카와 슌쇼(勝川春章, 1726-1793)의 한 제자가 되었어요. 그 후 약 75년 동안 — 그가 약 89세까지 — 평생 매우 활발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일을 했어요. 그가 자기 이름을 평생 약 30번 바꾸었습니다. 슌로(春朗), 소리(宗理), 카쿠(可候), 호쿠사이(北斎), 가키오(画狂), 마니지(卍) 등. 매번 자기가 새로운 한 시기에 들어갈 때마다 — 자기 이름을 새로 만들었어요. 그가 한 줄로 적었습니다. "한 새 시기에 한 새 이름이다."

그가 평생 매우 매우 가난했어요. 그가 일본 에도 안의 약 90개의 다른 자리에서 살았습니다. 매우 자주 자리를 옮긴 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한 줄로 적었습니다. "나는 한 자리에 매우 매우 짧게만 산다."

그의 평생 가장 큰 시리즈가 — 1831년 약 71세에 발표된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이에요. 그 시리즈의 한 점인 〈가나가와 큰 파도(神奈川沖浪裏)〉가 —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고, 동양 미술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점이 됐습니다. 1849년 5월 10일 약 89세에 그가 에도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평생 마지막에 적은 한 줄이 — "나에게 5년만 더 있으면, 나는 진정한 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あと五年生かしてくれたら、本物の画家になれるのに)." 한 사람이 평생 30,000점을 그린 그 사례 — 호쿠사이였습니다.

생몰1760 ~ 1849 (89세)
평생 작품약 30,000점
이름 변경약 30번
대표작1831 후가쿠 36경
"나에게 5년만 더 있으면, 나는 진정한 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1849년 호쿠사이의 마지막 한 줄.
21
B · 03 · 히로시게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Utagawa Hiroshige, 1797-1858) — 호쿠사이와 함께 우키요에 황금기의 가장 큰 두 거장. 평생 약 8,000점,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의 시조.
22
B · 03 · 히로시게 · 1797 ~ 1858

한 길이 53가지로 그려지다

히로시게가 1833년 약 36세에 평생 가장 결정적 시리즈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을 발표했어요. 일본 도카이도의 53개 역참(宿場)을 그린 — 그 시대 일본 풍경판화의 결정작.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797년 일본 에도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본명이 안도 토쿠타로(安藤徳太郎)였습니다. 그가 약 13세에 한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토요히로(歌川豊広)의 한 제자가 되었고, 그 후 평생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1832년 약 35세에 그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여행을 떠났습니다. 〈도카이도(東海道)〉라는 한 길 — 에도(江戸, 도쿄)에서 교토(京都)까지 약 514km — 을 직접 걸어 여행했어요. 그 길에 53개의 〈역참(宿場, 숙박 자리)〉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 53개 역참 — 모두 — 의 한 풍경을 매우 정교하게 스케치했어요.

그 여행이 끝난 후 — 1833년 약 36세에 — 그가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이라는 한 매우 큰 시리즈를 발표했어요. 〈53선〉은 — 53개의 역참 + 시작점(에도)과 끝점(교토)을 합친 — 〈55점〉의 우키요에 풍경판화 시리즈입니다. 그 시리즈가 — 우키요에 황금기의 결정적 두 시조 중 한 가지가 됐어요. (또 한 가지가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

그가 평생 약 8,000점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약 30,000점에 비하면 적지만, 그의 한 점 한 점이 매우 매우 정교했어요. 그의 작품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깊은 푸른색의 한 시간〉입니다. 그가 평생 매우 매우 좋아한 한 가지 — 〈저녁 노을, 비 오는 날, 새벽 안개, 한 달밤〉 — 같은 매우 정교한 한 시간의 한 빛이 그의 작품에 매우 매우 많이 그려져 있어요.

1858년 9월 6일 약 61세에 그가 — 그 시대 에도에 있던 한 큰 콜레라 전염병으로 —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길이 53가지로 그려진 그 사례 — 1833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이었어요.

생몰1797 ~ 1858
도카이도 여행1832 (35세)
53선 발표1833 (실제 55점)
평생 작품약 8,000점
한 길이 53가지로 그려진 사례 — 1833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
23
B · 04 · 김홍도
김홍도
김홍도(金弘道, Kim Hong-do, 1745-1806) — 호 〈단원(檀園)〉. 한국 정조 시대 최고의 화원(畵員). 평생 약 1,000점의 그림 — 풍속화·산수화·인물화 — 한국 풍속화의 시조.
24
B · 04 · 김홍도 · 1745 ~ 1806

한 화가가 백성의 매일을 그리다

김홍도가 평생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한 양반의 한 점잖은 자세가 아니라, 한 평민의 매일 한 시간을 그리겠다." 그가 한국 미술 역사에서 첫 번째로 — 평민의 매일을 매우 큰 풍속화로 — 그린 한 사람입니다.

김홍도는 1745년 한국 경기도(京畿道) 안산(安山, 지금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본명이 김홍도였고, 호가 〈단원(檀園, 단풍나무 정원)〉이었습니다. 그가 약 7세에 한 큰 양반 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가 약 30세에 한국 조정의 〈도화서(圖畵署, 왕립 미술 학교)〉의 한 화원(畵員, 왕립 화가)이 되었습니다.

1788년 약 43세에 그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임무를 받았어요. 정조의 명령으로 한국의 가장 큰 산 — 금강산(金剛山) — 의 풍경을 매우 정교하게 그린 〈해동도(海東圖)〉를 그렸습니다. 그 한 가지 작업이 — 그를 한국 정조 시대의 가장 큰 화원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풍속화〉입니다. 그가 1780년대부터 — 한국 평민의 매일을 매우 따뜻하게 그렸어요. 그의 평생 가장 큰 풍속화 시리즈가 —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입니다. 약 25점의 그림이 한 첩(帖)으로 묶여 있어요. 〈씨름(씨름圖)〉, 〈서당(書堂圖)〉, 〈기와이는 사람(瓦工)〉, 〈빨래터(漂母圖)〉, 〈장터의 풍경(都市場圖)〉 등.

각 그림이 매우 매우 작아요. 약 27×23cm 크기의 한 종이에, 매우 정교한 수묵과 담채(淡彩, 가벼운 색)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한 가지 매우 매우 작은 크기 안에 — 매우 매우 풍부한 한 시대 한국 평민의 매일이 그려져 있어요. 한 씨름 경기, 한 서당의 한 시간, 한 시장의 매우 정교한 한 표정. 그 모든 한 가지에 —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람의 시각이 있습니다.

1806년 약 61세에 그가 한국 한양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나 그가 평생 마지막 약 4년 동안 매우 가난해 — 거의 약을 사기 위해 자기 그림을 매우 매우 낮은 가격에 팔아야 했습니다. 한 화가가 백성의 매일을 그린 그 사례 — 김홍도였어요.

생몰1745 ~ 1806
단원 (檀園)
스승강세황
대표작단원풍속도첩 (약 25점)
"나는 한 평민의 매일 한 시간을 그리겠다." — 김홍도의 평생 사상.
25
B · 05 · 신윤복
신윤복
신윤복(申潤福, Sin Yun-bok, 1758-?) — 호 〈혜원(蕙園)〉. 정조 시대 최고의 양반 풍속화 화가. 〈단오풍정(端午風情圖)〉, 〈쌍검대무(雙劍對舞圖)〉의 시조.
26
B · 05 · 신윤복 · 1758 ~ ?

한 화가가 양반의 우아함을 그리다

신윤복이 김홍도와 거의 같은 시대 — 정조 시대 — 의 한 큰 풍속화 화가였어요. 그러나 그의 시각이 매우 달랐습니다. 김홍도가 〈평민의 따뜻함〉을 그렸다면, 신윤복이 〈양반·기생·풍류남의 우아함과 미묘함〉을 그렸어요.

신윤복은 1758년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호가 〈혜원(蕙園, 난초의 정원)〉이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1813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한국 도화서의 한 화원이었지만, 김홍도와 매우 다른 한 가지 — 〈매우 우아하고, 매우 미묘한, 매우 매우 정교한〉 풍속화를 그렸어요.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시리즈가 —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입니다. 약 30점의 그림이 한 첩으로 묶여 있어요. 〈단오풍정(端午風情圖)〉, 〈쌍검대무(雙劍對舞圖)〉, 〈주유청강(舟遊淸江圖)〉, 〈청금상련(聽琴賞蓮圖)〉 등.

그의 그림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여인〉입니다. 그가 한국 미술 역사에서 첫 번째로 — 〈한국 여인의 매우 우아한,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세〉를 매우 매우 자세히 그린 한 사람이었어요. 그림 안의 여인이 — 한 기생(妓生), 한 양반의 부인, 한 무희(舞姬). 매우 매우 정교한 한복(韓服), 매우 매우 정교한 비녀(髻), 매우 매우 우아한 한 자세, 매우 매우 미묘한 한 표정.

그러나 그의 그림에 — 매우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가 있었어요. 거의 모든 그림이 — 한 가지 매우 미묘한 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 양반과 한 기생의 한 시간, 한 부유한 사람과 한 평민의 한 만남, 한 여인의 한 매우 매우 미묘한 표정 안의 한 사연. 그 한 가지 매우 매우 미묘한 한 드라마 — 〈말이 되지 않은 한 시간의 깊이〉 — 가 — 신윤복의 평생 가장 깊은 시각이었어요.

그가 한국 도화서에서 약 30대에 —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사건으로 — 추방되었어요. 그가 양반의 매우 매우 사적인 한 시간 — 그리고 매우 매우 미묘한 한 사랑 — 을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렸기 때문에 — 그 시대 양반들에게 매우 매우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 200년 후인 지금 — 그의 그림이 — 한국 풍속화의 가장 매우 결정적 한 가지가 됐어요. 한 화가가 양반의 우아함을 그린 그 사례 — 신윤복이었습니다.

생몰1758 ~ ? (약 1813)
혜원 (蕙園)
대표작혜원전신첩 (약 30점)
시각양반·기생·풍류남의 우아함
"말이 되지 않은 한 시간의 깊이." — 신윤복 풍속화의 가장 깊은 시각.
27
C
PART C · 5 WORKS · 남긴 다섯 점

한 점씩 가까이

판콴 〈계산행려도〉(약 1000), 호쿠사이 〈가나가와 큰 파도〉(1831),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선〉(1833), 김홍도 〈씨름〉, 신윤복 〈단오풍정도〉. 동양 미술 1,000년의 다섯 점.

한 점을 천천히, 가까이.
28 · CHAPTER OPENER
28
PART C · 다섯 점

남긴 다섯 점

C1

판콴 〈계산행려도〉

약 1000 · 대만 고궁 박물원 · P.30
C2

호쿠사이 〈가나가와 큰 파도〉

1831 · MoMA·메트 · P.32
C3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선〉

1833 · 도쿄 후지 미술관 · P.34
C4

김홍도 〈씨름도〉

약 1780 · 국립중앙박물관 · P.36
C5

신윤복 〈단오풍정도〉

약 1805 · 간송미술관 · P.38
29
C · 01 · 계산행려도
계산행려도
판콴 〈계산행려도(谿山行旅圖, Travelers Among Mountains and Streams)〉, 약 1000년경. 비단에 수묵, 약 206×103cm. 대만 타이베이 국립 고궁 박물원.
30
C · 01 · 계산행려도 · 약 1000년

한 산이 매우 매우 크게 그려지다

판콴의 〈계산행려도〉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고, 약 1,000년 동양 미학의 가장 결정적 첫 점이에요. 약 206×103cm의 매우 큰 세로 비단 위에, 한 거대한 산이 — 매우 매우 크게 —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약 1000년경 판콴이 약 50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그의 사인이 — 매우 매우 작게, 매우 매우 숨겨진 자리 — 한 큰 나무 잎의 한 부분에 있어요. 거의 1,000년 후 1958년에야 한 학자가 그 사인을 발견했습니다. 그 발견으로 이 그림이 판콴의 진짜 작품으로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인정되었어요.

그림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거대한 한 산이에요. 그림의 약 2/3 — 위쪽 — 이 — 한 매우 매우 큰 산입니다. 그 산이 거의 — 한 그림 전체를 — 가득 채우고 있어요. 그 한 가지 매우 매우 큰 비율이 — 〈인간이 자연 안에서 매우 매우 작다〉라는 송나라 산수화의 가장 깊은 사상의 결정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림의 아래 — 약 1/3 — 에 — 한 매우 작은 길이 있어요. 그 길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 두 마리의 말과 한 사람의 여행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크기가 — 산 전체의 약 1/200, 약 1/300 정도. 매우 매우 매우 작아요. 그러나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매우 매우 자세하게 — 그려져 있습니다. 그 한 가지 — 매우 큰 산 + 매우 작은 사람 — 의 매우 매우 큰 비율이 — 동양 미학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였어요.

이 그림이 1925년부터 〈국립 고궁 박물원〉의 영구 컬렉션이에요. 1949년 중국 내전 후 — 그 박물원이 대만 타이베이로 옮기면서, 이 그림도 대만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까지 그곳의 가장 결정적 한 점입니다. 한 산이 매우 매우 크게 그려진 그 사례 — 약 1000년 판콴의 〈계산행려도〉였어요.

시기약 1000년
크기약 206 × 103 cm
매체비단에 수묵
소장대만 국립 고궁 박물원
한 산이 매우 매우 크게 그려진 사례 — 약 1000년 판콴의 〈계산행려도〉.
31
C · 02 · 가나가와 큰 파도
가나가와 큰 파도
가츠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충 파도리(神奈川沖浪裏, 가나가와 앞바다의 큰 파도)〉, 1831년. 다색 목판화, 약 25×38cm.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oMA·대영 박물관·도쿄 국립 박물관 등 영구 컬렉션.
32
C · 02 · 가나가와 큰 파도 · 1831

한 큰 파도가 한 시대 동양의 아이콘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충 파도리〉가 — 동양 미술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점이에요. 약 25×38cm의 매우 작은 우키요에 한 점이 — 그러나 그 안에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31년 호쿠사이가 약 71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후가쿠 36경〉 시리즈의 한 점입니다. 그림 안에 — 매우 매우 큰 파도 한 개와, 매우 매우 작은 후지산 한 개와, 매우 매우 작은 어선 세 척이 있어요.

그림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비율의 매우 큰 변화〉예요. 큰 파도가 — 그림 전체의 거의 절반 — 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 파도가 — 매우 매우 큰 〈손가락〉처럼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림의 한 가운데 위로 솟아 있습니다. 그 파도의 한 부분에 — 매우 매우 작은 거품들이 —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요. 그 한 가지 — 매우 큰 파도 + 매우 작은 후지산 — 의 매우 결정적 비율 변화가 — 호쿠사이의 평생 가장 깊은 한 시각이었습니다.

그림의 매우 매우 작은 부분 — 약 1/20 — 에 — 후지산이 있어요. 매우 작지만,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 그 시대 일본인에게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메시지였어요. "한 큰 파도 위에서도, 후지산은 변하지 않고 매우 매우 매우 같은 자리에 있다."

이 그림이 1831년 약 1,000장 정도 인쇄되었어요. 지금까지 약 100~200장이 —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 영구 컬렉션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뉴욕), MoMA(뉴욕), 대영 박물관(런던), 시카고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도쿄 국립 박물관 등. 1888년 빈센트 반 고흐가 한 편지에 적었어요. "한 일본 화가의 한 점 — 매우 매우 단순하지만, 그 안에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가 있다." 그 시대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한 운동이 시작된 결정적 시조 중 한 가지가 — 호쿠사이의 이 그림이었습니다.

한 큰 파도가 한 시대 동양의 아이콘이 된 그 사례 — 1831년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충 파도리〉였어요.

시기1831년
크기약 25 × 38 cm
초판약 1,000장
자포니즘 시조1888 고흐 편지
한 큰 파도가 한 시대 동양의 아이콘이 된 사례 — 1831년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충 파도리〉.
33
C · 03 · 도카이도 53선
도카이도 53선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선(東海道五十三次)〉, 1833년. 55점의 다색 목판화, 각 약 24×36cm. 도쿄 후지 미술관·메트로폴리탄·시카고 미술관 영구 컬렉션.
34
C · 03 · 도카이도 53선 · 1833

한 길이 55점으로 그려지다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시리즈예요. 일본의 가장 큰 길 — 도카이도(東海道) — 의 53개 역참 + 시작점·끝점을 그린 55점의 우키요에.

도카이도(東海道)는 일본 에도(지금 도쿄)에서 교토(京都)까지 약 514km의 한 길이에요. 약 1600년대에 도쿠가와 막부가 만든 다섯 개의 큰 길 〈오카이도(五街道)〉 중 가장 큰 한 길입니다. 그 길에 — 매 약 10km마다 — 한 〈역참(宿場, 숙박 자리)〉이 있었어요. 그 역참 53개가 있었습니다.

1832년 약 35세의 히로시게가 한 가지 매우 결정적 여행을 떠났어요. 그가 도쿠가와 막부의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 도카이도를 직접 걸어 — 약 한 달 동안 — 여행했습니다. 그 여행 중 그가 53개 역참 모두의 한 풍경을 매우 정교하게 스케치했어요.

1833년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 약 55점의 매우 정교한 우키요에 시리즈가 만들어졌습니다. 시작점 (니혼바시, 日本橋) + 53개 역참 + 끝점 (산조오바시, 三條大橋) = 55점. 각 점이 약 24×36cm 크기에 매우 매우 정교한 다색 목판화로 인쇄되었어요.

그 시리즈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한 풍경의 한 시간〉이에요. 거의 모든 점이 —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시간 — 새벽, 저녁 노을, 비 오는 날, 한 달밤, 첫 눈 — 의 한 빛을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쇼노 백우(庄野白雨, 〈쇼노의 흰 비〉)〉가 —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비 안에서 — 한 사람들이 매우 매우 빠르게 길 위를 걸어가는 —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시간을 그렸어요.

이 시리즈가 매우 매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 약 20년 동안 약 8회 — 다른 출판사에서 — 새로 인쇄되었어요. 그 시대 일본의 모든 사람이 — 도카이도를 직접 여행할 수 없었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 매우 매우 깊이 — 그 길을 매일 상상했습니다. 한 길이 55점으로 그려진 그 사례 — 1833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이었어요.

도카이도 약 514km
역참53개
시리즈1833 (55점)
재인쇄약 8회 (20년)
한 길이 55점으로 그려진 사례 — 1833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선〉.
35
C · 04 · 씨름도
김홍도 씨름도
김홍도 〈씨름(씨름圖)〉, 약 1780년. 종이에 수묵·담채, 약 27×23cm. 한국 국립 중앙 박물관(〈단원풍속도첩〉의 한 점).
36
C · 04 · 씨름도 · 약 1780년

한 씨름이 한 시대 한국의 매일

김홍도의 〈씨름〉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약 27×23cm의 매우 작은 종이 위에, 한 한국 평민의 씨름 경기 한 시간 — 매우 매우 따뜻한 한 풍경 — 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약 1780년 김홍도가 약 35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라는 한 첩의 한 점입니다. 약 25점의 그림이 한 첩으로 묶여 있어요.

그림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자유로운 한 시간〉이에요. 그림 안에 — 매우 둥글게 — 약 22명의 평민들이 둘러앉아 있고, 그 한 가운데에 — 두 명의 남자가 —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한 명이 약간 더 크고, 한 명이 약간 더 작아요. 두 사람이 매우 매우 강하게 — 서로 잡고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세 — 한 명이 다른 명을 들어 올리려 하는 한 시간 — 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둘레 약 22명의 한 표정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사람의 한 표정이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매우 매우 즐겁게 웃고 있고, 한 사람이 매우 매우 진지하게 보고 있고, 한 사람이 매우 매우 놀라고 있고, 한 사람이 자기 친구와 매우 매우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고, 한 작은 어린이가 매우 매우 좋아하고 있어요. 그 모든 한 사람의 한 표정이 —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한 한 가지 한 시각으로 —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이 한국 풍속화의 가장 결정적 한 점입니다. 한 시대 한국 평민의 매일이 — 매우 매우 따뜻하게,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진 그 사례. 지금 이 그림이 한국 국립 중앙 박물관(서울)의 가장 결정적 영구 컬렉션 중 하나예요. 한 씨름이 한 시대 한국의 매일이 된 그 사례 — 약 1780년 김홍도의 〈씨름도〉였습니다.

시기약 1780년
크기약 27 × 23 cm
매체종이에 수묵 · 담채
소장한국 국립 중앙 박물관
한 씨름이 한 시대 한국의 매일이 된 사례 — 약 1780년 김홍도의 〈씨름도〉.
37
C · 05 · 단오풍정도
신윤복 단오풍정도
신윤복 〈단오풍정도(端午風情圖)〉, 약 1805년. 종이에 수묵·담채, 약 28×35cm. 한국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38
C · 05 · 단오풍정도 · 약 1805년

한 단오의 한 풍경이 한 그림이 되다

신윤복의 〈단오풍정도〉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한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 한 시간의 한국 양반·여인의 매우 매우 매우 우아한 한 풍경.

이 그림은 약 1805년 신윤복이 약 47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는 한 첩의 한 점입니다. 약 30점의 그림이 한 첩으로 묶여 있어요.

〈단오〉는 한국·중국·일본의 음력 5월 5일의 한 큰 명절이에요. 그 날 — 한국에서 한 큰 풍습이 있어요. 〈씨름〉, 〈그네타기〉, 〈창포물에 머리감기〉, 〈수리떡 먹기〉. 그러나 가장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가 — 〈여인의 그네타기〉입니다.

그림 안에 — 한 큰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한 그루의 한 가지에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그네가 매달려 있어요. 그 그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복 — 흰색 저고리, 매우 매우 매우 빨간 치마 — 을 입은 한 여인이 매우 매우 우아하게 서 있습니다. 그녀의 한 발이 그네에 있고,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비녀(髻)가 머리 위에 있어요.

그림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한국식 정원이 있습니다. 한 작은 폭포, 한 작은 시내, 매우 매우 푸른 한 풀, 매우 매우 한 산. 그리고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 — 한 큰 바위 뒤에서 — 두 명의 양반 남자가 그 여인을 매우 매우 매우 비밀스럽게 보고 있어요. 그 두 양반의 한 표정이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말이 되지 않은 한 미묘함〉입니다.

그 한 가지 — 한 우아한 여인 + 한 비밀스럽게 보고 있는 한 양반 — 의 한 매우 매우 미묘한 한 시간이 — 신윤복의 평생 가장 깊은 한 시각이었어요. 그 시대 한국 양반 사회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풍속을 — 매우 매우 매우 솔직하게 — 그가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1938년 한국의 한 큰 컬렉터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매입했어요. 그가 평생 한국 미술 약 1만 점을 매입해, 그 후 그 컬렉션을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이라는 한 사립 미술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그림이 그곳의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한 단오의 한 풍경이 한 그림이 된 그 사례 — 약 1805년 신윤복의 〈단오풍정도〉였습니다.

시기약 1805년
크기약 28 × 35 cm
단오음력 5월 5일
소장한국 간송미술관
한 단오의 한 풍경이 한 그림이 된 사례 — 약 1805년 신윤복의 〈단오풍정도〉.
39
D
PART D · 5 STORIES · 동양 일상 미학

동양의 일상

차의 시간, 글씨의 마음, 정원의 자리, 시의 한 줄, 병풍의 그림.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동양 일상 안에 미술의 또 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40 · CHAPTER OPENER
40
PART D · 다섯 가지 잡학

동양의 일상

D1

차(茶)의 시간

중국·일본·한국 차 문화 · P.42
D2

글씨(書)의 마음

왕희지·구양순·한석봉 · P.44
D3

정원(園)의 자리

소주 정원·교토 정원·창덕궁 · P.46
D4

산수의 시(詩)

이백·도연명·정선 · P.48
D5

병풍(屛風)의 그림

금의 한 시간 · P.50
41
D · 01 · 차의 시간
차의 시간
중국 송나라(960~1279)의 〈점다(點茶)〉,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차노유(茶の湯)〉, 한국 조선의 〈다도(茶道)〉 — 동양 차 문화의 매우 매우 깊은 한 자리.
42
D · 01 · 차의 시간 · 동양 차 문화

한 잔의 차가 한 시대 미학의 자리

동양에서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일상이 — 〈차의 시간〉이에요. 약 2,000년 동안 — 중국·일본·한국에서 — 한 잔의 차가 — 한 시대 미학의 가장 깊은 한 자리였습니다.

차의 시조가 — 약 2,800년 전 중국 신농(神農) 황제의 한 전설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매우 매우 큰 한 가지 일상의 자리가 된 것이 — 약 8세기 중국 당나라(唐, 618-907)의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 차 마시기가 매우 매우 큰 한 가지 사회 의식이 됐어요. 770년경 — 당나라 학자 육우(陸羽, 733-804)가 — 〈차경(茶經)〉이라는 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인류 역사 첫 번째 차 책이에요. 그 책에서 그가 — 차 만드는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의식 — 〈자다(煮茶)〉 — 를 매우 매우 자세히 정리했어요.

약 1100년경 송나라에서 — 한 새 형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점다(點茶)〉예요. 차 잎을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가루로 갈고, 그 가루를 매우 정교한 차완(茶碗)에 넣고, 매우 뜨거운 한 물을 부어, 매우 정교한 대나무 솔(茶筅)로 매우 빠르게 저어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거품이 만들어진 한 차를 만드는 형식이었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송나라의 매우 매우 큰 한 사회 의식이 됐습니다.

1191년경 — 일본 승려 에이사이(栄西, 1141-1215)가 — 그 시대 송나라에 약 4년 동안 가서 그 점다 형식을 일본으로 가져왔어요. 그 후 약 400년 동안 — 일본에서 그 형식이 — 〈차노유(茶の湯)〉, 〈사도(茶道)〉라는 한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시조의 가장 큰 한 사람이 —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예요.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깊은 사상 — 〈와비-사비(侘び寂び)〉,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단순함의 매우 깊은 아름다움〉 — 을 만들었어요.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깊은 차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1392년 조선 왕조 시작 후 — 한국 차 문화가 약간 점점 어두워졌어요. 그 후 약 1820년대 —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그의 친구 초의(草衣, 1786-1866)가 —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조선 다도(朝鮮 茶道)〉의 한 부흥을 만들었습니다. 한 잔의 차가 한 시대 미학의 자리가 된 그 사례 — 동양 차 문화였어요.

차경770 육우
송 점다약 1100
센노 리큐1522 ~ 1591
조선 다도 부흥약 1820 정약용·초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단순함의 매우 깊은 아름다움(와비-사비)." — 센노 리큐의 평생 사상.
43
D · 02 · 글씨의 마음
글씨
왕희지(王羲之, 303-361), 구양순(歐陽詢, 557-641), 한석봉(韓石峯, 1543-1605) — 중국·한국의 가장 큰 서예가들. 동양에서 〈글씨(書)〉가 한 매우 깊은 미술 형식이었어요.
44
D · 02 · 서예 · 동양의 글씨

한 글씨가 한 사람의 마음이다

동양에서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미술 형식이 — 〈서예(書藝)〉, 즉 〈글씨〉예요. 한국·중국·일본에서 — 약 2,000년 동안 — 한 글씨가 — 한 사람의 마음의 매우 깊은 한 거울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첫 번째로 매우 매우 큰 글씨가 — 약 1600년경 상나라(商, c. 1600-1046 BC)의 〈갑골문(甲骨文, oracle bone script)〉이에요. 그 후 약 3,500년 동안 — 중국 글자가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가장 결정적 한 사람이 — 왕희지(王羲之, Wang Xizhi, 303-361)예요. 그가 중국 동진(東晉, 317-420) 시대 한 사람이었습니다. 약 353년 4월 22일 — 그가 자기 친구들과 한 정자 〈난정(蘭亭)〉에서 한 큰 모임을 가진 후 — 한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글씨를 적었어요. 〈난정서(蘭亭序)〉입니다. 약 324자의 매우 매우 정교한 행서로 적힌 한 글씨예요. 그 한 글씨가 — 약 1,700년 동안 — 동양 서예의 가장 매우 결정적 첫 한 점입니다.

그 후 약 1,500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서예가들 — 구양순(歐陽詢, 557-641, 매우 매우 정교한 해서), 안진경(顔眞卿, 709-785, 매우 매우 강한 해서), 회소(懷素, 737-799, 매우 매우 자유로운 초서) — 이 — 평생 한 글씨의 매우 깊은 한 길을 만들었어요. 그 모든 사람이 한 줄로 적었습니다. "한 글씨는 한 사람의 마음의 매우 매우 깊은 한 거울이다."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큰 서예가들이 있었어요. 가장 큰 한 사람이 — 한석봉(韓石峯, Han Seok-bong, 1543-1605)입니다. 그가 평생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해서를 만들었어요. 그 한 해서가 — 그 후 약 400년 동안 — 한국 모든 학교의 한 글씨 표준이 됐습니다. 일본에서도 — 〈쇼도(書道)〉라는 매우 매우 깊은 한 형식이 있었어요. 한 글씨가 한 사람의 마음이 된 그 사례 — 동양 서예였습니다.

왕희지303 ~ 361 · 난정서 353
구양순557 ~ 641 · 해서
한석봉1543 ~ 1605 · 한국 표준
사상글씨 = 사람의 마음
"한 글씨는 한 사람의 마음의 매우 매우 깊은 한 거울이다." — 동양 서예의 평생 사상.
45
D · 03 · 정원
동양 정원
중국 소주(蘇州)의 정원, 일본 교토(京都)의 〈선 정원(枯山水)〉, 한국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 — 동양 세 길의 매우 매우 깊은 정원 미학.
46
D · 03 · 정원 · 동양 정원 미학

한 정원이 한 그림이 되다

동양에서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미학이 — 〈정원〉이에요. 한 산수화의 매우 매우 작은 한 풍경이 — 한 작은 자리에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다시 만들어진 한 가지 형식.

중국 소주(蘇州, Suzhou)의 정원이 — 동양 정원의 가장 큰 시조 중 한 가지예요. 약 11세기부터 — 소주의 매우 매우 부유한 학자들이 — 자기 집의 한 정원을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산수화처럼 — 만들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정원 〈졸정원(拙政園, 1500-1520년대 건축)〉이 약 5만 ㎡의 매우 매우 큰 한 자리에 — 한 작은 호수, 한 작은 산,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작은 누각,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작은 다리 — 가 있는 매우 매우 깊은 한 자리입니다.

일본의 정원이 — 매우 매우 다른 한 형식이었어요.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가레산스이(枯山水, 카레산스이, 〈마른 산수〉)〉, 즉 〈선 정원〉입니다. 1450년경 일본 교토의 한 절 〈료안지(龍安寺)〉에서 만들어진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정원 형식이었어요. 그 정원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흰 모래 + 매우 매우 정교한 약 15개의 한 큰 바위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푸른 풀 — 만 있어요.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자리이지만, 그 단순함 안에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선(禪, Zen)〉의 한 사상이 있습니다.

한국 정원의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가 — 〈창덕궁(昌德宮, 1405년 건축) 후원(後苑)〉이에요. 1623년경 — 약 30만 ㎡의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후원이 — 매우 매우 자연적인 — 매우 매우 매우 한국적인 — 한 형식으로 — 만들어졌어요. 한국 정원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정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인공의 산수, 일본 정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추상의 산수라면, 한국 정원이 — 매우 매우 자연 그 자체의 깊은 한 자리였어요.

한 정원이 한 그림이 된 그 사례 — 동양 정원 미학이었습니다.

소주 졸정원1500 ~ 1520
료안지 가레산스이약 1450
창덕궁 후원1623 (약 30만 ㎡)
세 형식인공·추상·자연
한 정원이 한 그림이 된 사례 — 동양 정원 미학.
47
D · 04 · 산수의 시
산수시
이백(李白, 701-762), 두보(杜甫, 712-770), 도연명(陶淵明, 365-427) — 중국 산수 시인들. 한국의 정선(鄭歚, 1676-1759) 시대 — 산수가 시와 그림 안에 함께 그려졌어요.
48
D · 04 · 산수시 · 동양 시 미학

한 시가 한 산수화이다

동양에서 — 시(詩)와 그림이 매우 매우 깊이 — 같은 한 자리에 있었어요. 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이 — "시(詩)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약 11세기 중국 학자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한 줄.

중국 시의 매우 매우 큰 첫 황금기가 — 당나라(唐, 618-907)의 약 200년이에요. 그 시대 가장 큰 두 시인이 — 이백(李白, Li Bai, 701-762)과 두보(杜甫, Du Fu, 712-770)였습니다. 이백이 평생 매우 매우 자유로운 한 산수와 한 술의 시 약 1,000편을 적었어요. 두보가 매우 매우 진지한 한 사회와 한 정치의 시 약 1,500편을 적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 동양 시의 가장 큰 두 시조였어요.

그러나 동양 시의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가 — 〈산수시(山水詩)〉예요. 중국 동진의 도연명(陶淵明, Tao Yuanming, 365-427)이 평생 약 130편의 한 산수시를 적었어요. 그가 약 41세에 자기 정부 자리를 영원히 그만두고 — 시골에 한 작은 농장을 만들어 — 평생 매우 매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가 평생 적은 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줄이 —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서, 멀리 남쪽 산을 한가하게 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그 한 줄이 — 동양 산수시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시조입니다.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시간 — 한 사람이 자기 정원에서 한 국화를 따고, 멀리 한 산을 본다 — 안에 — 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평온함이 있어요. 그 한 가지 사상이 — 그 후 약 1,500년 동양 산수화의 매우 매우 깊은 한 시조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큰 산수 시인들이 있었어요. 가장 큰 한 사람이 — 정선(鄭歚, Jeong Seon, 1676-1759)이에요. 그가 평생 한국 산수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새 형식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진짜 풍경의 산수화)〉를 만들었어요. 그가 — 그 시대까지 한국 그림이 — 거의 모두 중국 산수의 모방이었기 때문 — 한국의 매우 매우 매우 실제 한 산 — 금강산(金剛山), 인왕산(仁王山) — 을 직접 가서 그렸습니다.

한 시가 한 산수화이다 — 그 사례 — 동양 산수시 미학이었어요.

이백701 ~ 762 (약 1,000편)
두보712 ~ 770 (약 1,500편)
도연명365 ~ 427 (산수시 시조)
정선1676 ~ 1759 (한국 진경산수)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 — 1080년경 소동파의 한 줄.
49
D · 05 · 병풍
병풍
한국·일본·중국의 〈병풍(屛風)〉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큰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가구의 한 형식으로 — 매일의 한 자리에 — 함께 살아온 한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 형식.
50
D · 05 · 병풍 · 동양 병풍 미학

한 가구가 한 그림이다

동양에서 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 — 〈병풍(屛風)〉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큰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가구의 한 형식으로 — 매일의 한 자리에 함께 살았어요.

병풍의 시조가 — 약 2세기 중국 후한(後漢, 25-220) 시대로 거슬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매우 큰 한 가지 일상의 한 자리가 된 것이 — 약 7세기 당나라 시대였어요. 그 시대 매우 매우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 집의 한 가운데에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큰 병풍을 — 한 가구처럼 — 두기 시작했습니다.

병풍의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가지가 — 〈한 큰 그림 + 한 가구의 매우 매우 깊은 한 결합〉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큰 — 약 2~3m 높이의 — 한 종이/비단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산수화 또는 한 풍속화 또는 한 화조화가 그려져 있어요. 그 그림이 — 약 4, 6, 8, 10폭(屛, 〈폭〉, 한 부분)의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구로 —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구가 — 한 큰 방 안에 —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에 — 자유롭게 — 펼쳐지거나 닫혀지거나 옮겨질 수 있었어요.

일본의 병풍이 —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이었어요. 약 8세기 — 일본이 중국 당나라에서 그 형식을 받아 — 자기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형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본 병풍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금박(金箔, 〈킨파쿠〉) 배경〉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큰 종이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얇은 금박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붙였습니다. 그 금박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그림이 — 매우 매우 정교한 잉크와 페인트로 — 그려졌어요.

가장 큰 한 점이 — 1574년경 일본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의 화가 카노 에이토쿠(狩野永徳, 1543-1590)의 〈인왕도(仁王圖)〉, 약 1604년경 〈송응도 병풍(松鷹圖屏風)〉, 약 1640년경 〈낙중낙외도 병풍(洛中洛外圖屏風, 〈교토 안과 교토 밖〉)〉입니다.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결정적 병풍이 있었어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가 — 약 17세기부터 — 한국 임금의 옥좌 뒤에 — 거의 모든 큰 의식에 함께 — 펼쳐진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병풍이었습니다. 한 가구가 한 그림이다 — 그 사례 — 동양 병풍 미학이었어요.

시조약 2세기 중국 후한
일본 형식약 8세기 ~ 금박
카노 에이토쿠1543 ~ 1590
한국 일월오봉도약 17세기 ~ 임금 옥좌
한 가구가 한 그림이다 — 그 사례 — 동양 병풍 미학.
51
APPENDIX · 시대 연표

동양 미술의 1,000년

동양

약 BC 1600 중국 상나라 갑골문

353.04.22 왕희지 〈난정서〉 (동양 서예의 첫 시조)

약 405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 (산수시 시조)

770 육우 〈차경(茶經)〉 (인류 첫 차 책)

약 800 이백·두보 (당나라 시 황금기)

약 1000 판콴 〈계산행려도〉 (중국 산수화 시조)

약 1080 소동파 "詩中有畵 畵中有詩"

약 1100 송나라 〈점다(點茶)〉 형식

1191 일본 에이사이 차 가져오기

약 1450 료안지 〈가레산스이〉 정원

1543 한석봉 (한국 서예 표준)

1543 ~ 1590 카노 에이토쿠 (일본 모모야마 병풍)

1574 카노 에이토쿠 〈인왕도〉

1591 센노 리큐 〈와비-사비〉

1603 일본 에도 시대 시작

1623 한국 창덕궁 후원

1633 ~ 1639 일본 사코쿠(쇄국)

1676 ~ 1759 정선 (한국 진경산수)

약 1700 일본 우키요에 시작

1745 김홍도 출생 / 1758 신윤복 출생

1760 호쿠사이 출생

1776 정조 즉위 (한국 풍속화 시대)

1797 히로시게 출생 / 약 1780 김홍도 〈씨름도〉

1800.06.28 정조 사망 (49세)

약 1805 신윤복 〈단오풍정도〉 / 1806 김홍도 사망

약 1820 정약용·초의 (한국 다도 부흥)

1831 호쿠사이 〈후가쿠 36경 (가나가와 큰 파도)〉

1833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선〉

1849.05.10 호쿠사이 사망 (89세)

1854 페리 흑선 (일본 쇄국 끝)

1858.09.06 히로시게 사망 (61세)

1868 일본 메이지 유신 (에도 시대 끝)

1888 고흐 편지 〈자포니즘〉 시조

52
APPENDIX · 핵심 일곱 점

이 호의 일곱 점

세 길

1. 판콴 〈계산행려도〉 약 1000 — 송나라 산수의 시조.

2. 호쿠사이 〈가나가와 큰 파도〉 1831 — 동양 미술의 가장 유명한 한 점.

3.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선〉 1833 — 한 길의 55가지.

4. 김홍도 〈씨름도〉 약 1780 — 평민의 따뜻한 한 시간.

5. 신윤복 〈단오풍정도〉 약 1805 — 양반의 우아한 한 시간.

6. 왕희지 〈난정서〉 353 — 동양 서예의 첫 시조.

7. 카노 에이토쿠 〈인왕도〉 1574 — 일본 병풍의 시조.

53
COLOPHON · 닫는 글

열여덟 번째 호를 다 따라간 후

EDITORIAL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10월 1쇄

이 호의 4부

A 동양 시대 풍경 5장면 · B 동양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동양 일상 미학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동양의 세 길 — 산수의 깊이, 부세의 가벼움, 풍속의 따뜻함.

주요 참고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50 (동양 부분) · 강세황 〈단원기(檀園記)〉 1781 · 호쿠사이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 1831 · 대만 국립 고궁 박물원·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디지털 컬렉션

이미지 출처

일부 작품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했고, 동양 풍경과 풍속화는 미드저니 v7과 한국 전통화 풍 재현 일러스트로 대체했습니다.

NEXT ISSUE · Vol.19 예고
한국 근현대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100년.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빨래터, 김환기의 점, 백남준의 비디오. 한 시대 한국이 매우 큰 격동 안에서 매우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든 100년.

LUNA WHALE · ART HISTORYVOL.18 · 2027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