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미술사Luna Art History · 2027
Vol
19
No.19 · 20부작
한국 근현대 미술
SPECIAL ISSUE · 격동의 100년

한국 근현대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100년.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빨래터, 김환기의 점, 백남준의 비디오 — 한국이 매우 큰 격동 안에서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든 100년.

LUNA WHALE · ART HISTORY54 PAGES · 4 PARTS
EDITOR'S LETTER · 여는 글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아홉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900년부터 2000년까지 — 한국의 약 100년이에요. 그 100년 동안 한국이 —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매우 큰 격동을 겪었습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 합병, 1945년 광복, 1948년 남북 분단, 1950~1953년 한국 전쟁, 1960~1980년 군사 정권,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 1997년 IMF 외환 위기. 그 모든 큰 격동 안에서 — 한국 미술이 매우 깊은 한 길을 — 만들었어요.

이 호의 가장 큰 한 줄 — "한국 미술이 격동 안에서도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람의 매일을 그렸습니다."

네 명의 가장 결정적 거장이 있어요. 첫 번째 —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b, 1916-1956). 그가 평생 〈황소(소)〉를 그렸어요. 한 매우 매우 강한 한 황소, 매우 매우 거친 한 붓,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랑. 그가 한국 전쟁 시기 매우 매우 가난해 — 자기 가족과 헤어져, 평생 약 2,000장의 매우 매우 작은 〈은박지 그림(銀紙畵)〉을 만들어 자기 사랑을 그렸어요. 1956년 9월 6일 약 40세에 그가 매우 매우 가난하게 — 영양실조로 —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 박수근(朴壽根, Park Soo-keun, 1914-1965). 그가 평생 〈빨래터의 여인들〉, 〈나무와 두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같은 한 시대 한국 평민의 매일을 그렸어요. 그의 그림의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 —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花崗巖) 같은 한 표면. 그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기법 — 〈마티에르(matière,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한 표면)〉 — 으로 평생 한국 평민의 한 매일을 매우 매우 강하게 그렸어요.

세 번째 —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1913-1974). 그가 평생 〈점〉을 그렸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점들을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린 한 화가입니다.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orm, Shall We Meet Again)〉(1970)가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시조의 시조였습니다.

네 번째 — 백남준(白南準, Nam June Paik, 1932-2006). 그가 평생 〈비디오 아트(Video Art)〉의 시조였어요. 1963년 약 31세에 그가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첫 비디오 아트 전시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을 독일에서 열었고, 그 후 약 40년 동안 — 인류 비디오 아트의 가장 결정적 한 시조가 됐습니다. 그가 〈TV 부처(TV Buddha, 1974)〉, 〈TV 정원(TV Garden, 1974)〉, 〈전자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 1995)〉의 시조였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 — 1900년 한양,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1960년대 서울, 1990년대 서울. 제2부는 다섯 사람. 제3부는 다섯 점. 제4부는 일상 — 일본화 영향, 전쟁의 10년, 경제 기적, 민주화, 동시대.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2027년 11월 · 루나웨일 미술사 편집실
EDITOR — Luna Whale
02
CONTENTS · 목차

한 호의 네 부

A

시대의 풍경

1900 한양에서 1990년대 서울까지, 100년의 다섯 풍경.

P.04 – P.15
B

한국의 다섯 사람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P.16 – P.27
C

남긴 다섯 점

황소·빨래터·어디서 무엇이 되어·TV 부처·점.

P.28 – P.39
D

일제·전쟁·경제·민주·동시대

100년 한국의 다섯 자리.

P.40 – P.51
03
A
PART A · 5 STORIES · 시대의 풍경

한국의 다섯 풍경

1900년 한양에서 1990년대 서울까지. 한 시대 한국의 매우 매우 큰 격동의 다섯 풍경.

한 시대가 매우 큰 격동 안에서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들었습니다.
04 · CHAPTER OPENER
04
PART A · 다섯 풍경

한국의 다섯 풍경

A1

1900 대한제국의 한양

한국 마지막 왕조의 시간 · P.06
A2

1910~1945 일제 강점기

35년 식민의 한 시간 · P.08
A3

1950~1953 한국 전쟁

3년 전쟁의 한 시간 · P.10
A4

1960년대 서울

경제 기적의 시작 · P.12
A5

1990년대 서울

올림픽 · 외환 위기 · 한류 · P.14
05
A · 01 · 1900 한양
1900 한양
1897년 — 고종(高宗, 1852-1919)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후 약 13년 — 1910년 일본의 한 합병까지의 한 시간. 한국 마지막 왕조의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
06
A · 01 · 1900 한양 · 대한제국

한 왕조가 마지막으로 흔들리다

1897년 10월 12일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어요. 그 후 약 13년 — 한국 마지막 왕조가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 안에 — 일본·중국·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 외국 강대국들의 매우 매우 큰 압력을 받았습니다.

1897년 10월 12일 — 고종이 자기 황제 대관식을 가졌어요. 그가 자기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으로 바꿨고, 자기 직책을 〈왕(王)〉에서 〈황제(皇帝, Emperor)〉로 —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격상시켰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한국이 — 더 이상 — 중국이나 일본의 한 번국(藩國)이 아니다. 우리는 매우 독립적인 한 제국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 한국 마지막 왕조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이 1894~1895년 청일 전쟁(中日戦争)에서 청나라를 — 1904~1905년 러일 전쟁(日露戦争)에서 러시아를 — 매우 매우 큰 승리로 이겼어요. 그 두 전쟁 후 일본이 한국을 — 자기 직접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큰 변화의 한 시간에 있었어요.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새 형식이 — 〈서양화(西洋畵)〉입니다. 1909년 한국 첫 번째 서양화가 — 고희동(高羲東, Ko Hee-dong, 1886-1965)이 — 일본 도쿄 미술 학교에 입학했어요. 그가 약 4년 동안 — 일본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유화, 수채화 — 을 배웠습니다. 1915년 약 29세에 그가 — 한국 첫 서양화가로 —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 왕조가 마지막으로 흔들린 그 사례 — 1897~1910년 대한제국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그 한 왕조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끝났어요.

대한제국1897.10.12
고희동1886 ~ 1965
첫 서양화 유학1909 도쿄 미술 학교
합병1910.08.22
"한국이 더 이상 중국이나 일본의 한 번국이 아니다." — 1897년 고종의 한 줄.
07
A · 02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1910~1945년 약 35년 —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든 한 시간. 그 시기에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길을 — 일본화·서양화·전통 한국화의 셋 — 사이에서 — 만들었어요.
08
A · 02 · 일제 강점기 · 1910 ~ 1945

한 시대가 식민 안에서 미술을 만들다

1910년 8월 22일 —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후 약 35년의 식민 시기였어요. 그 시기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길을 — 만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미술이 — 세 가지 큰 흐름이 있었어요. 첫째 — 〈일본화(日本畵)〉의 영향. 그 시대 거의 모든 한국 화가가 —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学校), 가와바타 미술 학교(川端画学校) 등 — 일본의 한 미술 학교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일본화(日本畵)〉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형식이 됐어요.

둘째 — 〈서양화(西洋畵)〉의 도입. 한국 첫 서양화가 — 고희동, 김관호(金觀鎬, 1890-1959), 김찬영(金瓚永, 1893-1960) — 이 일본을 통해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유화, 수채화 — 를 배웠어요.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 그 시대 첫 서양화 — 〈자화상(1915, 김관호)〉, 〈해질녘(1916, 김관호)〉 — 을 그렸습니다.

셋째 — 〈전통 한국화〉의 매우 결정적인 부흥.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상범(李象範, 1897-1972),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 — 매우 매우 결정적 한국화 화가들이 — 전통 한국화의 한 매우 깊은 길을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다시 만들었어요.

그러나 그 시기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가지 — 〈자기 한국 정체성을 그릴 수 있는가〉라는 한 가지 큰 질문이었습니다. 일본 식민 정부가 — 매우 매우 강하게 — 한국 정체성을 매우 매우 강하게 억압했어요. 1939년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는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을 — 강제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 자기 한국 성을 — 일본 성으로 바꿔야 했어요. 약 80%의 한국 사람들이 — 매우 매우 강한 압력으로 — 자기 성을 바꿨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이었어요. 한 시대가 식민 안에서 미술을 만든 그 사례 —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기간1910.08.22 ~ 1945.08.15
첫 서양화1915 김관호 〈자화상〉
한국화 부흥김은호 · 이상범 · 변관식
창씨개명1939 (약 80% 강제)
한 시대가 식민 안에서 미술을 만든 사례 — 1910~1945년 일제 강점기.
09
A · 03 · 한국 전쟁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 약 3년 1개월의 한국 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한국 미술가들에게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시간이었어요. 이중섭이 평생 가장 어려운 한 시간이 그 시기였습니다.
10
A · 03 · 한국 전쟁 · 1950 ~ 1953

한 전쟁이 한 시대 미술을 흔들다

1950년 6월 25일 —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어요. 그 후 약 3년 1개월 — 한국 전쟁이 —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매우 큰 한 비극이었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살았어요.

1950년 6월 25일 —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군대가 — 38선 남쪽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침공했어요. 그 후 약 3년 1개월의 매우 매우 큰 전쟁이었습니다. 약 250만 명의 인명 피해,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離散家族, 가족이 헤어진 사람들), 한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 매우 매우 큰 폐허로 — 된 한 시간.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길로 — 살았어요. 매우 많은 화가들이 — 부산(釜山)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避難, 도망)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한 시간을 — 자기 가족과 함께 살았어요.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람이 — 이중섭이었습니다. 그가 1951년 약 35세에 자기 가족을 일본 — 자기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의 한 친정 — 으로 보내야 했어요. 그 후 그가 한 평생 자기 가족을 다시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기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미술 운동이 만들어졌어요. 약 195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추상 미술 운동이 —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한 사람이 —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1913-1974)였어요. 그가 1956년 약 43세에 — 프랑스 파리로 약 3년 동안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한국 전통의 깊이를 추상의 형식으로 그리겠다."

한 전쟁이 한 시대 미술을 흔든 그 사례 — 1950~1953년 한국 전쟁이었어요.

기간1950.06.25 ~ 1953.07.27
인명 피해약 250만 명
이산가족약 1천만 명
이중섭 가족 분리1951
한 전쟁이 한 시대 미술을 흔든 사례 — 1950~1953년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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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04 · 1960년대 서울
1960년대 서울
1961~1979년 약 18년 —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군사 정권. 그 시기에 〈한강의 기적(漢江の奇跡)〉이라 불리는 매우 매우 매우 큰 경제 발전이 있었어요. 그 결과 1960년대 서울이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 한 큰 도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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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04 · 1960년대 서울 · 한강의 기적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변하다

1961년 5월 16일 — 박정희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요. 그 후 약 18년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빠른 경제 발전을 — 〈한강의 기적〉 — 으로 — 일으켰습니다.

1961년 약 44세의 박정희 장군이 — 한 군사 쿠데타로 — 정권을 잡았어요. 그 후 약 18년 동안 — 1979년 10월 26일 그의 한 가운데 발에 — 그가 한국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 을 —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 추진했어요.

그 결과 한국이 — 1960년 1인당 GNP 약 79달러에서 — 1979년 1인당 GNP 약 1,693달러로 — 약 21배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漢江의 奇跡)〉이라 불려요. 그 시기에 — 1962년 한국 첫 산업단지(蔚山工業團地, 울산 공업 단지) 건설, 1968년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서울에서 부산까지) 건설, 1970년 한국 첫 산업박람회 등 — 매우 매우 매우 큰 산업 발전이 있었어요.

그 시기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진정한 추상 운동이 — 〈단색화(單色畵, Dansaekhwa)〉라는 한 새 운동이 — 시작되었어요. 가장 결정적 한 그룹이 — 박서보(朴栖甫, 1931-2023), 정상화(鄭相和, 1932-), 윤형근(尹亨根, 1928-2007), 권영우(權寧禹, 1926-2013), 하종현(河鍾賢, 1935-) —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단 한 가지 색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매우 큰 한 면〉 — 만 그렸어요.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변한 그 사례 — 1960~1980년 서울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1961.05.16 ~ 1979.10.26
1인당 GNP 1960약 79달러
1인당 GNP 1979약 1,693달러 (21배)
단색화 운동1960년대 후반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변한 사례 — 1960~1980년 서울 〈한강의 기적〉.
13
A · 05 · 1990년대 서울
1990년대 서울
1988년 서울 올림픽, 1997년 IMF 외환 위기, 그리고 1990년대 후반 〈한류(韓流)〉 — 1990년대 서울이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시간이었어요.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글로벌 도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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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05 · 1990년대 서울

한 도시가 세계의 한 자리

1988년 9월 17일 — 서울 올림픽이 개막했어요. 그 한 행사가 — 한국이 — 그 시대까지의 한 매우 매우 작은 한 나라에서 — 그 시대의 한 글로벌 도시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변한 한 시작이었습니다.

1988년 9월 17일 ~ 10월 2일 약 16일 동안 — 서울에서 24회 하계 올림픽이 열렸어요. 약 159개국 약 8,397명의 선수가 참가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행사였습니다. 그 한 올림픽이 — 한국이 그 시대 처음으로 — 세계 무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들어간 한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1997년 12월 3일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 외환 위기(IMF外換危機)〉예요. 그 시대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매우 매우 빠르게 — 거의 0달러까지 — 떨어졌어요. 한국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에 약 580억 달러의 한 긴급 자금 지원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요청했습니다. 그 후 약 4년 동안 — 한국 경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구조 조정을 겪었어요.

그러나 그 위기 직후 — 1990년대 후반에 —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새 한 사실이 — 시작되었어요. 〈한류(韓流, Korean Wave)〉입니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 K-pop — 이 — 그 시대 동남아시아·일본·중국·세계로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어요. 1997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2002 일본 방송), 2004년 영화 〈올드보이(Old Boy)〉(칸 영화제 그랑프리), 2012년 〈강남스타일〉(K-pop 첫 글로벌 히트)이 — 그 시조였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 미술도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변화를 했어요. 1995년 — 한국 첫 〈광주 비엔날레(光州 Biennale)〉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 한국 첫 큰 국제 미술 전시였어요.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글로벌 자리를 — 만들었습니다.

한 도시가 세계의 한 자리가 된 그 사례 — 1990년대 서울이었어요.

서울 올림픽1988.09.17 ~ 10.02
IMF 위기1997.12.03
한류 시작1990년대 후반
광주 비엔날레1995 첫 개최
한 도시가 세계의 한 자리가 된 사례 — 1990년대 서울.
15
B
PART B · 5 PEOPLE · 다섯 사람

한국의 다섯 사람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 김환기(1913-1974), 백남준(1932-2006), 이우환(1936-). 한국 근현대 미술의 다섯 거장.

한 시대가 다섯 사람으로 한국을 그렸습니다.
16 · CHAPTER OPENER
16
PART B · 다섯 사람

한국의 다섯 이름

B1

이중섭 — 황소의 시조

1916 ~ 1956 · 평안남도 · P.18
B2

박수근 — 화강암의 결

1914 ~ 1965 · 강원도 · P.20
B3

김환기 — 점의 시조

1913 ~ 1974 · 신안 · P.22
B4

백남준 — 비디오 아트의 시조

1932 ~ 2006 · 서울 · P.24
B5

이우환 — 모노하의 시조

1936 ~ · 경상남도 · P.26
17
B · 01 · 이중섭
이중섭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b, 1916-1956) — 평안남도 평원군 출생. 평생 〈황소(소)〉를 그린 한국 근현대 미술의 가장 큰 거장. 한국 전쟁 시기 가족과 헤어져 — 매우 매우 가난하게 살다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어요.
18
B · 01 · 이중섭 · 1916 ~ 1956

한 화가가 황소를 매우 매우 깊이 그리다

이중섭이 평생 〈황소〉를 그렸어요. 매우 매우 강한 한 황소, 매우 매우 거친 한 붓,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랑.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근현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시조 중 하나입니다.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한국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19세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분카학원(文化学院)에서 약 4년 동안 매우 정교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한 일본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2022)와 사랑에 빠졌어요. 1945년 광복 직후 — 그가 마사코와 — 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결혼했습니다.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이 — 〈황소(소)〉예요. 그 시대까지 한국 미술에서 — 〈소〉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상징이었습니다. 한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짐승,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짐승, 매우 매우 매우 일하는 한 짐승. 그가 그 한 가지 〈소〉를 — 매우 매우 거친 한 붓으로, 매우 매우 강한 한 색으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렸어요.

1950년 한국 전쟁 시작 후, 그가 자기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 — 그가 자기 가족 — 자기 아내 마사코, 자기 두 아들 — 을 — 일본 자기 친정 — 으로 보내야 했어요. 그 후 약 5년 동안 — 그가 자기 가족과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 자기 가족과 헤어져 — 살았습니다.

그가 그 시기에 —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은박지 그림(銀紙畵)〉입니다. 매우 매우 가난해 — 큰 캔버스를 살 수 없었기 때문 — 그가 매우 매우 작은 — 약 9×15cm — 크기의 — 담뱃갑의 한 은박지(銀箔紙)에 —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매우 작은 그림을 — 그렸어요. 평생 약 2,000장의 매우 매우 작은 은박지 그림이 — 그의 가족에 대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랑을 — 그렸습니다.

1956년 9월 6일 — 그가 약 40세에 한국 서울 한 정신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평생 매우 매우 가난해 — 거의 매일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한 화가가 황소를 매우 매우 깊이 그린 그 사례 — 이중섭이었어요.

생몰1916.09.16 ~ 1956.09.06
유학1936 ~ 1940 분카학원
가족 분리1951 (전쟁 중)
은박지 그림약 2,000장
한 화가가 황소를 매우 매우 깊이 그린 사례 — 이중섭.
19
B · 02 · 박수근
박수근
박수근(朴壽根, Park Soo-keun, 1914-1965) — 강원도 양구(楊口) 출생. 평생 한국 평민의 매일을 — 매우 매우 거친 화강암 같은 한 표면으로 — 매우 매우 따뜻하게 그린 한 화가.
20
B · 02 · 박수근 · 1914 ~ 1965

한 화가가 매우 거친 화강암을 그리다

박수근이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형식 —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매우 매우 거친 화강암 같은 한 표면〉 — 만 그렸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근현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한 시조입니다.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한국 강원도 양구군(楊口郡)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가족이 매우 매우 가난해 — 그가 정식 미술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생 거의 한 가지 길 — 〈독학(獨學, 자기 혼자 배우기)〉 — 으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화가가 됐어요.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인 한 영감이 — 1932년 약 18세에 본 한 미국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한 그림 〈만종(晩鐘, The Angelus, 1857-1859)〉이에요. 그 한 그림 —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두 농민이 한 들판에서 매우 매우 따뜻하게 기도하는 한 시간 — 이 — 박수근의 평생 가장 깊은 영감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거의 한 가지 주제 — 〈한국 평민의 매일〉 — 만 그렸어요. 〈빨래터(빨래터)〉, 〈할아버지와 손자〉,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장터〉. 그 모든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하고,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하고,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이었어요.

그가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매우 매우 거친 표면〉입니다. 그가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 — 약 1~2cm 두께 — 를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칠했어요. 그 두꺼운 페인트가 마른 후 — 그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칼로 그 표면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깎고 긁어 —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같은 표면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화강암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했어요.

1965년 5월 6일 — 그가 약 51세에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백내장(白內障)과 간경화(肝硬化)로 —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평생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해 — 자기 평생 마지막 약 10년 동안 — 거의 한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한 화가가 매우 거친 화강암을 그린 그 사례 — 박수근이었어요.

생몰1914.02.21 ~ 1965.05.06
출생지강원도 양구
학력독학 (정식 교육 거의 없음)
영감1932 밀레 〈만종〉
한 화가가 매우 거친 화강암을 그린 사례 —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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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3 · 김환기
김환기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1913-1974) — 전남 신안 안좌도(安佐島) 출생. 평생 〈점〉을 그린 한국 첫 큰 추상화가. 1956~1959년 파리 유학, 1963~1974년 뉴욕에서 평생 마지막 11년을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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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3 · 김환기 · 1913 ~ 1974

한 화가가 을 그리다

김환기가 평생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 — 〈점(點)〉 — 만 그렸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점들을 매우 매우 매우 많이,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린 한 화가입니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한국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安佐島)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21세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일본 대학(日本大学)에서 약 4년 동안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1937년 약 24세에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그 후 약 19년 동안 — 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추상 화가로 활동했어요.

1956년 약 43세에 그가 평생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떠나 — 프랑스 파리로 약 3년 동안 유학을 갔어요. 그 시기에 그가 — 자기 평생 가장 깊은 한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전통의 매우 매우 깊은 한 정서를 — 추상의 매우 매우 정교한 형식으로 — 그리겠다."

1959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약 4년 동안 한국에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새 형식을 만들었어요. 그러나 1963년 약 50세에 — 그가 또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자기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 영원히 — 옮겼어요. 그 후 평생 마지막 약 11년 동안 — 그가 뉴욕에서 살았습니다.

그 뉴욕 시기에 —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 — 〈점〉 — 을 만들었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점들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렸습니다. 한 그림 안에 약 5만~10만 개의 한 점이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상 — "한 점이 한 사람이고, 한 점이 한 별이고, 한 점이 한 그리움이다." — 을 그렸습니다.

그가 평생 마지막 한 시리즈가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orm, Shall We Meet Again, 1970)〉예요. 그 한 시리즈에 — 한국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의 한 시 〈저녁에〉의 한 줄 —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이 — 매우 매우 깊이 — 영감이 됐습니다.

1974년 7월 25일 — 그가 약 61세에 뉴욕에서 —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척추 사고(spine surgery 후 합병증)로 세상을 떠났어요. 한 화가가 점을 그린 그 사례 — 김환기였습니다.

생몰1913 ~ 1974 (61세)
파리 유학1956 ~ 1959
뉴욕 이주1963 (50세)
결정작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김광섭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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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백남준
백남준
백남준(白南準, Nam June Paik, 1932-2006) — 서울 종로 출생. 인류 비디오 아트(Video Art)의 가장 큰 시조. 1963년 첫 비디오 아트 전시. 〈TV 부처〉, 〈TV 정원〉, 〈전자 슈퍼 하이웨이〉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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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4 · 백남준 · 1932 ~ 2006

한 사람이 비디오 아트의 시조

백남준이 인류 비디오 아트(Video Art)의 가장 큰 시조였어요. 1963년 약 31세에 그가 — 인류 첫 비디오 아트 전시 — 를 독일에서 열었고, 그 후 약 40년 동안 — 그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 평생을 살았어요.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한국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가족이 매우 매우 매우 부유한 한 무역상이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 시작 직전 — 그가 약 17세에 일본으로 —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했어요. 그가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에서 약 6년 동안 — 매우 매우 정교한 음악과 미술사를 배웠습니다.

1956년 약 24세에 그가 독일로 갔어요. 그곳에서 그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음악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과 만났습니다. 그 후 그가 — 〈플럭서스(Fluxus, 1960년대 한 매우 매우 자유로운 한 예술 운동)〉 — 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멤버가 됐어요.

1963년 3월 11일 — 그가 약 31세에 독일 부퍼탈(Wuppertal)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 인류 첫 비디오 아트 전시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을 열었습니다. 그 전시에 약 13개의 한 텔레비전이 —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매우 매우 결정적인 형식으로 — 변형되어 — 한 갤러리에 전시되었어요. 그것이 — 인류 비디오 아트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약 40년 동안 — 그가 인류 비디오 아트의 가장 결정적인 한 시조였어요. 〈TV 부처(TV Buddha, 1974)〉 — 한 부처 조각이 자기 자신의 한 텔레비전 화상을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는 한 작품. 〈TV 정원(TV Garden, 1974)〉 — 한 큰 갤러리 안에 약 30개의 한 텔레비전이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푸른 식물 안에 함께 있는 한 작품. 〈전자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 1995)〉 — 약 336개의 한 텔레비전 + 약 50개의 한 비디오가 함께 있는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작품.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래에 모든 사람이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화면 — 으로 — 매우 매우 매우 멀리 떨어진 한 사람과 — 매일 — 만난다." 그가 1974년에 〈전자 슈퍼 하이웨이〉라는 한 단어를 — 매우 매우 매우 처음으로 — 사용했어요. 그것이 — 그 후 약 25년 후의 한 〈인터넷〉의 첫 예언이었습니다.

2006년 1월 29일 — 그가 약 73세에 미국 마이애미에서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뇌출혈(腦出血)로 세상을 떠났어요. 한 사람이 비디오 아트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백남준이었습니다.

생몰1932.07.20 ~ 2006.01.29
첫 비디오 전시1963.03.11 부퍼탈
TV 부처1974
전자 슈퍼하이웨이 단어1974
"미래에 모든 사람이 매우 작은 한 화면으로 매우 멀리 떨어진 한 사람과 매일 만난다." — 1974년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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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이우환
이우환
이우환(李禹煥, Lee Ufan, 1936-) — 경상남도 함안 출생. 한국·일본의 가장 매우 결정적 동시대 화가. 일본 〈모노하(物派, Mono-ha)〉 운동의 가장 큰 시조. 한국 〈단색화〉의 가장 결정적 한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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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05 · 이우환 · 1936 ~

한 점이 한 가운데 자리가 되다

이우환이 한국과 일본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동시대 화가예요.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 —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한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그렸습니다.

이우환은 1936년 6월 24일 한국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1956년 약 20세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약 2개월 만에 한국에서 일본 — 도쿄 — 으로 —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일본 대학(日本大学) 철학과에서 — 약 5년 동안 — 매우 매우 정교한 동양 철학을 배웠어요.

1968년 약 32세에 그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결심을 했어요. 그가 자기 평생 첫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약 50년 동안 — 평생 매우 매우 활발하게 — 작업했습니다. 그가 일본 — 도쿄와 카마쿠라(鎌倉) — 그리고 한국 — 부산과 양구 — 에 — 매우 매우 매우 큰 자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가 평생 두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운동의 가장 큰 시조가 됐어요. 첫째 — 일본 〈모노하(物派, Mono-ha, 〈물건의 학파〉)〉입니다. 1968~1972년 약 4년 동안 — 일본의 약 10명의 매우 매우 결정적 화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가지 — 〈매우 매우 매우 자연적인 한 가지 — 한 돌, 한 나무, 한 흙, 한 종이 — 의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만들었어요. 이우환이 그 운동의 가장 결정적 시조였습니다.

둘째 — 한국 〈단색화(Dansaekhwa)〉예요. 1960~1970년대 — 그가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결정적 한 형식 —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 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렸습니다.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가 — 〈선으로부터(From Line)〉, 〈점으로부터(From Point)〉, 〈조응(Correspondence)〉, 〈대화(Dialogue)〉 — 입니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한 점, 한 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가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자리 안에서 —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를 — 만들어 낸다." 그 한 줄이 — 한국·일본의 동시대 미술의 가장 매우 매우 깊은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 약 89세 —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 작업하고 있어요. 한 점이 한 가운데 자리가 된 그 사례 — 이우환이었습니다.

출생1936.06.24 한국 함안
일본 이주1956
모노하 시조1968 ~ 1972
단색화 시조1960~1970년대
"한 점, 한 줄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자리 안에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를 만들어 낸다." — 이우환.
27
C
PART C · 5 WORKS · 남긴 다섯 점

한 점씩 가까이

이중섭 〈황소〉(약 1953), 박수근 〈빨래터〉(1959),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1970), 백남준 〈TV 부처〉(1974), 이우환 〈조응〉(1990). 한국 근현대 미술의 다섯 점.

한 점을 천천히, 가까이.
28 · CHAPTER OPENER
28
PART C · 다섯 점

남긴 다섯 점

C1

이중섭 〈황소〉

약 1953~1955 · 국립현대미술관 · P.30
C2

박수근 〈빨래터〉

1959 · 호암미술관 · P.32
C3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 환기미술관 · P.34
C4

백남준 〈TV 부처〉

1974 · 여러 박물관 · P.36
C5

이우환 〈조응〉

1990 · 다양한 컬렉션 · P.38
29
C · 01 · 황소
황소
이중섭 〈황소(소)〉, 약 1953~1955년. 종이에 유화·연필, 약 30×40cm. 국립현대미술관 외(여러 〈소〉 시리즈).
30
C · 01 · 황소 · 약 1953 ~ 1955

한 황소가 매우 거친 붓으로 그려지다

이중섭의 〈황소〉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시리즈예요. 약 1953~1955년 약 2년 동안 — 그가 약 10여 점의 〈황소(소)〉를 매우 매우 거친 한 붓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그렸습니다.

이 시리즈는 1953년 이중섭이 약 37세에 그리기 시작한 한 시리즈예요. 그 시기가 —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 그가 자기 가족과 매우 매우 어려운 시간을 — 일본 — 멀리 — 보내고 있었던 한 시기였습니다. 그가 매우 매우 가난해 — 큰 캔버스를 살 수 없었기 때문 — 약 30×40cm의 매우 매우 작은 종이에 그렸어요.

그림 안에 — 한 거대한 황소 한 마리만 — 매우 매우 매우 거친 붓으로 — 매우 매우 강한 한 빨강과 한 검정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 황소의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두 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어깨,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발굽.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이에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황소의 한 표정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강하지만,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슬픈 한 표정. 한 매우 매우 깊은 한 사랑과, 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그리움이 — 그 황소의 한 두 눈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가 한국 평민의 매일의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짐승 — 황소 — 을 통해 — 자기 평생 가장 깊은 한 사랑 — 자기 가족 — 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렸습니다. 한 황소가 매우 거친 붓으로 그려진 그 사례 — 이중섭의 〈황소〉였어요.

시기약 1953 ~ 1955
크기약 30 × 40 cm
매체종이에 유화 · 연필
시리즈약 10여 점 〈소〉
한 황소가 매우 거친 붓으로 그려진 사례 — 이중섭의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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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빨래터
박수근 빨래터
박수근 〈빨래터〉, 1959년. 캔버스에 유화, 약 51×97cm.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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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2 · 빨래터 · 1959

한 평민의 매일이 한 화강암이 되다

박수근의 〈빨래터〉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한 한국 평민 마을의 한 빨래터 — 약 8명의 한 여인들이 매우 매우 따뜻하게 빨래를 하고 있는 한 시간 — 이 —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같은 한 표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59년 박수근이 약 45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약 51×97cm의 매우 매우 큰 — 박수근의 작품 안에서는 — 한 점입니다. 그림 안에 — 한 큰 시내(개울) 옆에 — 약 8명의 한 한국 여인들이 —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자세로 — 빨래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가 — 그 모든 인물이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형식으로 —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얼굴이 거의 없고,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손가락도 없고,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옷의 디테일도 거의 없어요. 그러나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 모든 인물이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하고, 매우 매우 매우 매우 한국적이고,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일의 — 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모습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 그림의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표면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칼로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깎아져,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 그 한 한국 시골 마을의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시각적 표현 — 이 만들어졌어요.

이 그림이 1962년에 박수근의 한 친구이자 한 컬렉터 박명자(朴明子, 1923-1991)가 매입한 한 점이었어요. 그러나 1990년대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7년에 — 그 그림이 — 한국 미술 경매에서 약 45억 5천만 원에 매각되었어요. 그 매각이 — 그 시대 한국 미술 경매 사상 가장 비싼 한 점 —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매각 후 —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큰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 그림의 진위(眞僞, 진짜·가짜)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약 5년의 한 큰 법정 다툼 끝에 — 2012년 그 그림이 — 한 가짜 — 라는 한 큰 판결이 나왔어요. 그러나 박수근 자신의 진정한 〈빨래터〉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점인 것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입니다. 한 평민의 매일이 한 화강암이 된 그 사례 — 박수근의 〈빨래터〉였어요.

시기1959년
크기약 51 × 97 cm
소장호암미술관
2007 매각약 45억 5천만 원
한 평민의 매일이 한 화강암이 된 사례 — 박수근의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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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어디서 무엇이 되어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orm, Shall We Meet Again)〉, 1970년. 캔버스에 유화, 약 232×172cm. 환기미술관(서울 부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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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3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1970

매우 많은 점이 한 시 한 줄이 되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약 232×172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약 5만~10만 개의 매우 매우 매우 작은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70년 김환기가 약 57세에 — 뉴욕 자기 작업실에서 — 그린 한 점이에요. 그가 평생 마지막 약 4년 동안 — 1970~1974년 — 그 〈점〉 시리즈에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충실했습니다. 약 232×172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푸른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려져 있어요.

그가 한 점을 그리는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푸른 페인트를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작은 붓 — 으로 — 한 점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그려요. 그 한 점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흰 페인트로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둥근 한 형태로 — 둘러싸요. 그 결과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별 같은 한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만들어집니다.

그 한 점을 — 약 5만~10만 번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결정 안에서 — 그렸어요. 한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 약 6개월~1년 — 이 걸렸습니다.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노동집약적인 한 형식이었어요.

그 그림의 한 가장 결정적 한 사상이 — "한 점이 한 사람이고, 한 점이 한 별이고, 한 점이 한 그리움이다." 그가 한 한국 시인 김광섭의 한 시 〈저녁에〉의 한 줄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그 한 시의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상이 — 그 그림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1992년 한국 〈환기미술관(煥基美術館)〉이 — 서울 부암동에 — 영구 전시 자리로 — 한 자리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모셔졌어요. 매우 많은 점이 한 시 한 줄이 된 그 사례 — 1970년 김환기의 한 점이었습니다.

시기1970년
크기약 232 × 172 cm
점 수약 5만 ~ 10만 개
소장환기미술관 (1992)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김광섭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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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4 · TV 부처
TV 부처
백남준 〈TV 부처(TV Buddha)〉, 1974년. 한 부처 조각 + 한 텔레비전 + 한 비디오 카메라. 첫 영구 설치 — 1974년 9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Stedelijk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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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4 · TV 부처 · 1974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보다

백남준의 〈TV 부처〉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작품이에요.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부처 조각이 —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텔레비전 안에 자기 자신의 한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는 한 작품.

이 작품은 1974년 백남준이 약 42세에 만든 한 작품이에요. 그가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18세기 한국식 한 부처 조각을 한 작은 골동품 시장에서 매입했습니다. 그 부처를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텔레비전 앞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두었어요. 그 텔레비전이 — 한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비디오 카메라 — 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연결되어, 그 카메라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 부처의 한 모습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처가 — 자기 자신의 한 비디오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어요. 한 부처와 한 부처의 한 비디오 화상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함께 있는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작품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이 — "한 부처가 — 자기 자신의 한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본다 — 그것이 한 명상(冥想, meditation)의 한 가장 결정적 한 형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 매우 매우 매우 한 가지 결정적 비판도 있어요. "한 시대 모든 사람이 — 매일 자기 자신의 한 화면 — 자기 자신의 한 SNS, 자기 자신의 한 자화상 — 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다. 그것이 — 한 시대 진정한 한 부처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실이다."

이 작품이 1974년 9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Stedelijk 박물관〉에서 처음 영구 설치되었어요. 그 후 약 약 20개의 매우 매우 다양한 박물관 —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술관〉, 뉴욕 〈휘트니〉, 도쿄 〈와타리움 미술관〉, 서울 〈백남준 아트 센터〉 — 에서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형식으로 — 영구 전시되었습니다.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본 그 사례 — 1974년 백남준의 〈TV 부처〉였어요.

시기1974년
구성부처 조각 + TV + 비디오 카메라
첫 설치1974.09.13 Stedelijk
변형약 20개 박물관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본 사례 — 1974년 백남준의 〈TV 부처〉.
37
C · 05 · 조응
이우환 조응
이우환 〈조응(Correspondence)〉, 1990년. 캔버스에 페인트, 약 218×291cm.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자리 안에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다양한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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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05 · 조응 · 1990

한 점이 한 자리를 만들다

이우환의 〈조응(Correspondence)〉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예요.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자리 — 만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990년 이우환이 약 54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조응(Correspondence)〉이라는 한 시리즈의 한 점입니다. 그 시리즈가 약 199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인 한 시리즈가 됐어요.

그림 안에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 약 218×291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자리 — 가 있어요. 그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자리 안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회색의 한 점, 또는 한 줄, 또는 한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한 점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예요.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림의 한 정확한 자리에, 한 정확한 크기로, 한 정확한 색깔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 한 점이 — 그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자리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를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만들어 냅니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한 점, 한 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가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자리 안에서 —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를 — 만들어 낸다." 그 한 줄이 — 한국·일본 동시대 미술의 가장 매우 매우 깊은 한 사상이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 그가 평생 약 200점 정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린 한 시리즈예요.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큰 박물관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카마쿠라 가나가와 현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파리 퐁피두 — 의 영구 컬렉션에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한 점이 한 자리를 만든 그 사례 — 1990년 이우환의 〈조응〉이었어요.

시기1990년
크기약 218 × 291 cm
매체캔버스에 페인트
시리즈약 200점 (1990 ~)
한 점이 한 자리를 만든 사례 — 1990년 이우환의 〈조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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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D · 5 STORIES · 100년 한국 일상

한국의 일상

일제 시대의 일본화 영향, 전쟁의 10년, 경제 기적, 민주화, 동시대.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100년의 일상 안에 미술의 또 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40 · CHAPTER OPENER
40
PART D · 다섯 가지 잡학

한국의 일상

D1

일제의 일본화 영향

1910~1945 한국 화가의 도쿄 유학 · P.42
D2

전쟁의 10년

1950~1960 피난·고아·헤어진 가족 · P.44
D3

경제 기적의 시간

1960~1980 〈한강의 기적〉 · P.46
D4

민주화의 시간

1980 광주, 1987 6월 항쟁 · P.48
D5

동시대 한국 미술

1995 광주 비엔날레 이후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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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1 · 일본화 영향
일본화 영향
1910~1945년 약 35년 동안 — 한국 거의 모든 큰 화가들이 — 일본 도쿄 미술 학교 또는 가와바타 미술 학교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일본화·서양화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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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1 · 일본화 영향 · 1910 ~ 1945

한 학교가 한 시대 한국 미술을 결정하다

일제 강점기에 — 한국 거의 모든 큰 화가들이 — 일본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 미술 학교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을 배웠어요. 그 결과 — 한 시대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한 형식이 됐습니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6년 동안 — 한국 거의 모든 큰 화가들이 — 두 가지 큰 일본 미술 학교에서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을 배웠어요. 첫째 —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学校, 지금 도쿄 예술 대학)〉. 그곳이 그 시대 일본의 가장 큰 미술 학교였습니다. 한국 첫 서양화가 고희동(1909 입학), 김관호(1909), 김찬영(1912)이 — 모두 그 학교에서 배웠어요.

둘째 — 〈가와바타 미술 학교(川端画学校)〉. 그것이 — 매우 매우 더 정교한 — 사립 한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 학교였습니다. 한국 첫 큰 화가들 — 이중섭(1936), 김환기(1933), 박수근(거의 무관, 독학) — 이 — 매우 매우 다양한 시기에 그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 두 학교의 영향이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일본화 — 〈일본화(日本畵, 니혼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일본 식 수묵·담채 — 와 — 한 가지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서양화(西洋畵)〉 — 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한국 화가들에게 — 가르쳐졌어요.

그 결과 한 시대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결정적 한 영향을 — 받았습니다.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형식 안에서 — 한국 화가들이 자기 한국 정체성을 매우 매우 매우 어렵게 — 만들어야 했어요. 1945년 광복 후 — 한국 화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자기 한국 정체성의 — 새 길을 —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학교가 한 시대 한국 미술을 결정한 그 사례 — 1910~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 미술 학교들이었어요.

도쿄 미술 학교1887 설립
가와바타1909 ~
한국 첫 서양화가고희동 1909
이중섭 유학1936 ~ 1940
한 학교가 한 시대 한국 미술을 결정한 사례 — 1910~1945년 일본 미술 학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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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전쟁의 10년
전쟁의 10년
1945~1955년 약 10년 — 광복 후 약 5년의 매우 매우 큰 사회 분열, 그리고 한국 전쟁(1950~1953)의 약 3년 + 그 후 약 2년의 매우 매우 큰 폐허. 한국 화가들에게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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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2 · 전쟁의 10년 · 1945 ~ 1955

한 시대가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 약 5년의 매우 매우 큰 사회 분열, 그리고 1950~1953년 한국 전쟁의 약 3년 + 그 후 약 2년의 폐허 — 약 10년이 한 시대 한국 화가들에게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기였어요.

1945년 8월 15일 —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면서 한국이 35년의 일제 강점기 끝에 광복(光復)을 맞았어요. 그러나 그 직후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사회 분열을 겪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 한국이 두 개 —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 으로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분단되었어요.

1950년 6월 25일 —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그 후 약 3년 1개월의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전쟁이 — 약 2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離散家族)을 만들었어요. 한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폐허로 됐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 화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길로 살았어요. 매우 많은 화가들이 — 한국 남쪽 부산(釜山)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하게 — 자기 가족과 함께 — 약 3년을 살았어요.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람이 — 이중섭이었습니다. 그가 1951년 약 35세에 자기 가족 — 자기 아내 마사코, 자기 두 아들 — 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어요.

또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비극 — 〈월북(越北, 북한으로 옮긴) 화가들〉입니다. 한국 첫 큰 한국화가 김용준(金瑢俊, 1904-1967), 한국 첫 큰 서양화가 김환기의 한 친구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추상 화가 이쾌인(약 1909-?) — 이 — 1945~1948년 매우 매우 다양한 정치 이념의 이유로 — 북한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옮겼어요. 그 후 그들이 — 한국 미술 역사에서 —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 시대가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산 그 사례 — 1945~1955년 한국이었어요.

광복1945.08.15
분단1948.08.15
한국 전쟁1950 ~ 1953
월북 화가김용준·이쾌대
한 시대가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산 사례 — 1945~1955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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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경제 기적
경제 기적
1960~1980년 약 20년 —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매우 매우 큰 한국 경제 발전. 1960년 1인당 GNP 약 79달러에서 1979년 약 1,693달러로 약 21배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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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3 · 경제 기적 · 1960 ~ 1980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큰 도시

1960~1980년 약 20년의 〈한강의 기적〉이 한국을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 한 큰 경제 — 로 — 만들었어요. 그 시기에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 박정희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그가 약 18년 동안 한국 대통령이었어요.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 을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이 — 1960년 1인당 GNP 약 79달러에서 1979년 약 1,693달러로 — 약 21배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성장했어요.

그 시기에 한국 도시들이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변했습니다. 1962년 — 한국 첫 산업단지(蔚山工業團地, 울산 공업 단지) 건설. 1968년 —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16km)이 개통되었어요. 1970년 — 새마을 운동(새마을 운동) 시작. 1973~1979년 —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한국 경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산업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 그 매우 매우 매우 빠른 한 경제 발전 안에서 —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비극이 있었어요.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한 노동자들이 —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 살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 한국 청계천(淸溪川) 평화시장의 한 22세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이 — 한국 노동법(勞動法)을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 외친 후 — 자기 자신에게 매우 매우 매우 큰 불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붙였어요. 그가 약 22세에 매우 매우 매우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건이 — 한국 노동 운동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시작이 됐어요.

그 시기에 한국 미술도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어요. 196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진정한 추상 운동이 — 〈단색화(單色畵, Dansaekhwa)〉라는 한 새 운동이 — 시작되었습니다.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권영우, 하종현 — 다섯 사람이 그 운동의 가장 결정적 시조였어요.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큰 도시가 된 그 사례 — 1960~1980년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1961 ~ 1979
GNP 21배 성장1960 ~ 1979
전태일1970.11.13
단색화 시작1960년대 후반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큰 도시가 된 사례 — 1960~1980년 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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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민주화
민주화
1980년 5월 18일 ~ 27일 광주(光州)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 한국 민주화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시간. 매우 매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평생을 — 한 민주의 자리를 위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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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4 · 민주화 · 1980 ~ 1987

한 도시가 한 민주의 시조가 되다

1980년 5월 18일 ~ 27일 — 한국 광주(光州)에서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 사건이 — 한국 민주화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시조였습니다. 그 후 약 7년 — 1987년 6월 항쟁 — 까지 — 매우 매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평생을 — 한 민주의 자리를 위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살았어요.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한 가운데 직속 부하 김재규(金載圭)에게 — 매우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살해당했어요. 그 후 약 6개월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민주화 한 시간 — 〈서울의 봄(서울의 봄)〉 — 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17일 —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요.

1980년 5월 18일 — 광주의 한 사람들이 그 군사 정권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항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약 10일 — 1980년 5월 27일까지 — 매우 매우 매우 큰 폭력 사건이 일어났어요. 한국 정부 군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매우 매우 매우 큰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약 165명의 사망자, 약 3,500명의 부상자, 약 7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어요. (이 숫자는 한국 정부의 공식 발표였고, 실제 사망자가 약 1,000명 이상이라는 한 매우 매우 큰 한 의혹이 있어요.)

그 후 약 7년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민주화 운동을 살았습니다. 1987년 1월 14일 —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朴鍾哲, 1965-1987)이 — 한 정부 고문 중 매우 매우 매우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사건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분노를 일으켰고, 그 후 약 5개월 동안 — 매일 매우 매우 매우 큰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 약 20일 — 한국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6월 항쟁(6月抗争)〉이 일어났어요. 약 500만 명 — 한국 인구의 약 12% — 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시위했습니다. 그 결과 — 1987년 6월 29일 — 한국 정부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항복을 했어요. 〈6.29 선언〉입니다. 한국 대통령을 매우 매우 매우 직접 선출하는 한 새 헌법으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바꿔야 한다는 한 약속이었어요.

1988년 2월 25일 — 한국 첫 매우 매우 매우 직접 선출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취임했습니다. 그것이 — 한국의 진정한 한 민주의 첫 시작이었어요.

한 도시가 한 민주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1980년 광주였습니다.

광주 항쟁1980.05.18 ~ 27
사망자약 165명 (공식)
박종철 사망1987.01.14
6.29 선언1987.06.29
한 도시가 한 민주의 시조가 된 사례 —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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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동시대
동시대 한국 미술
1995년 ~ 한국 동시대 미술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시간. 광주 비엔날레, 한국 화가들의 매우 매우 매우 큰 글로벌 활동, 그리고 〈한류(韓流)〉의 한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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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05 · 동시대 · 1995 ~

한 비엔날레가 한 시대 한국을 글로벌로

1995년 9월 20일 — 한국 광주에서 첫 〈광주 비엔날레(光州 Biennale)〉가 열렸어요. 그것이 — 한국 동시대 미술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큰 글로벌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글로벌 활동을 — 만들었어요.

1995년 9월 20일 ~ 11월 20일 약 두 달 동안 — 한국 광주에서 첫 〈광주 비엔날레〉가 열렸어요. 약 50개 나라의 약 92명의 한 화가들이 참여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국제 미술 전시였습니다. 그 비엔날레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이 — 〈한국 광주의 1980년 민주화 운동의 한 정신을 한 미술 전시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하자〉였어요.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글로벌 활동을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 한 사람이 — 백남준이에요. 그가 1990년대부터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 미국·유럽·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비디오 아트 활동을 했어요. 1993년 — 그가 한국 첫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Korean Pavilion)의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국관이 — 그 시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황금 사자 상(Golden Lion)〉을 받았어요.

그 후 매우 매우 매우 큰 동시대 한국 화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글로벌 활동을 했습니다. 이불(李昢, Lee Bul, 1964-) —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가장 큰 시조. 양혜규(梁慧奎, Haegue Yang, 1971-)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설치 미술. 양정욱(양정욱, Yang Jung-Uk, 1982-)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키네틱 조각. 그리고 한국 〈단색화(Dansaekhwa)〉의 다섯 사람 —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권영우, 하종현 — 이 — 약 2010년대부터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글로벌 재평가를 받았어요.

한 비엔날레가 한 시대 한국을 글로벌로 만든 그 사례 — 1995년 ~ 광주 비엔날레였습니다.

첫 광주 비엔날레1995.09.20
베니스 한국관 황금사자1993 백남준
동시대 거장이불·양혜규·양정욱
단색화 글로벌2010년대
한 비엔날레가 한 시대 한국을 글로벌로 만든 사례 — 1995년 광주 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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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시대 연표

한국 근현대 100년

한국 100년

1897.10.12 대한제국 선포 (고종)

1909 고희동 도쿄 미술 학교 입학 (한국 첫 서양화가)

1910.08.22 일제 합병 (35년 식민)

1913 김환기 출생 / 1914 박수근 출생 / 1916 이중섭 출생

1932 백남준 출생 / 1936 이우환 출생

1939 창씨개명 강제

1945.08.15 광복

1948.08.15 분단 (남한·북한)

1950.06.25 ~ 1953.07.27 한국 전쟁

1951 이중섭 가족 분리

약 1953 ~ 1955 이중섭 〈황소〉 시리즈

1956.09.06 이중섭 사망 (40세)

1956 ~ 1959 김환기 파리 유학

1959 박수근 〈빨래터〉

1961.0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

1963.03.11 백남준 첫 비디오 아트 전시 (독일 부퍼탈)

1963 김환기 뉴욕 이주

1965.05.06 박수근 사망 (51세)

1968 ~ 1972 이우환 일본 모노하 시조

1968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11.13 전태일 분신

1974 백남준 〈TV 부처〉

1974.07.25 김환기 사망 (61세)

1979.10.26 박정희 사망

1980.05.18 ~ 27 광주 민주화 운동

1987.06.10 ~ 29 6월 항쟁 / 6.29 선언

1988.09.17 ~ 10.02 서울 올림픽

1990 이우환 〈조응〉 시리즈 시작

1993 백남준 베니스 한국관 황금 사자상

1995.09.20 첫 광주 비엔날레

1997.12.03 IMF 외환 위기

2006.01.29 백남준 사망 (73세, 마이애미)

2010년대 단색화 글로벌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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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핵심 일곱 점

이 호의 일곱 점

일곱 점

1. 이중섭 〈황소〉 약 1953~1955 — 매우 거친 붓의 한 사랑.

2. 박수근 〈빨래터〉 1959 — 한 화강암의 매일.

3.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 매우 많은 점의 시.

4. 백남준 〈TV 부처〉 1974 —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보다.

5. 이우환 〈조응〉 1990 — 한 점의 한 자리.

6. 김환기 〈론도〉 1938 — 한국 첫 큰 추상.

7. 백남준 〈전자 슈퍼하이웨이〉 1995 — 인터넷의 첫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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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PHON · 닫는 글

열아홉 번째 호를 다 따라간 후

EDITORIAL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11월 1쇄

이 호의 4부

A 시대 풍경 5장면 · B 한국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100년 한국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격동의 100년 안에서 매우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든 한국.

주요 참고

이중섭 평전 (오광수, 1972) · 김환기 평전 (이일, 1989) · 백남준 평전 (한낙원, 2010) · 단색화 컬렉션 카탈로그 (국립현대미술관) · 환기미술관·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컬렉션

이미지 출처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의 모든 작품이 21세기까지 저작권 보호되므로, 시대 풍경과 작품 일부는 미드저니 v7과 한국 전통화 풍 재현 일러스트로 대체했습니다.

NEXT ISSUE · Vol.20 예고
동시대 미술

1980년부터 2027년까지 약 50년. 바스키아의 거리, 해링의 라인, 카우스의 인형, 디지털 NFT, 그리고 AI 미술. 미술이 거리·디지털·AI로 옮겨간 50년.

LUNA WHALE · ART HISTORYVOL.19 ·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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