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100년.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빨래터, 김환기의 점, 백남준의 비디오 — 한국이 매우 큰 격동 안에서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든 100년.
안녕하세요. 〈루나 미술사〉의 열아홉 번째 호를 펼쳐 주셔서 반갑습니다.
1900년부터 2000년까지 — 한국의 약 100년이에요. 그 100년 동안 한국이 —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매우 큰 격동을 겪었습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 합병, 1945년 광복, 1948년 남북 분단, 1950~1953년 한국 전쟁, 1960~1980년 군사 정권,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 1997년 IMF 외환 위기. 그 모든 큰 격동 안에서 — 한국 미술이 매우 깊은 한 길을 — 만들었어요.
이 호의 가장 큰 한 줄 — "한국 미술이 격동 안에서도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람의 매일을 그렸습니다."
네 명의 가장 결정적 거장이 있어요. 첫 번째 —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b, 1916-1956). 그가 평생 〈황소(소)〉를 그렸어요. 한 매우 매우 강한 한 황소, 매우 매우 거친 한 붓,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랑. 그가 한국 전쟁 시기 매우 매우 가난해 — 자기 가족과 헤어져, 평생 약 2,000장의 매우 매우 작은 〈은박지 그림(銀紙畵)〉을 만들어 자기 사랑을 그렸어요. 1956년 9월 6일 약 40세에 그가 매우 매우 가난하게 — 영양실조로 —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 박수근(朴壽根, Park Soo-keun, 1914-1965). 그가 평생 〈빨래터의 여인들〉, 〈나무와 두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같은 한 시대 한국 평민의 매일을 그렸어요. 그의 그림의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 —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花崗巖) 같은 한 표면. 그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기법 — 〈마티에르(matière,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한 표면)〉 — 으로 평생 한국 평민의 한 매일을 매우 매우 강하게 그렸어요.
세 번째 —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1913-1974). 그가 평생 〈점〉을 그렸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점들을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린 한 화가입니다.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orm, Shall We Meet Again)〉(1970)가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시조의 시조였습니다.
네 번째 — 백남준(白南準, Nam June Paik, 1932-2006). 그가 평생 〈비디오 아트(Video Art)〉의 시조였어요. 1963년 약 31세에 그가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첫 비디오 아트 전시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을 독일에서 열었고, 그 후 약 40년 동안 — 인류 비디오 아트의 가장 결정적 한 시조가 됐습니다. 그가 〈TV 부처(TV Buddha, 1974)〉, 〈TV 정원(TV Garden, 1974)〉, 〈전자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 1995)〉의 시조였어요.
제1부는 다섯 풍경 — 1900년 한양,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1960년대 서울, 1990년대 서울. 제2부는 다섯 사람. 제3부는 다섯 점. 제4부는 일상 — 일본화 영향, 전쟁의 10년, 경제 기적, 민주화, 동시대.
그럼 천천히 넘겨 주세요.
1900 한양에서 1990년대 서울까지, 100년의 다섯 풍경.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황소·빨래터·어디서 무엇이 되어·TV 부처·점.
100년 한국의 다섯 자리.
1900년 한양에서 1990년대 서울까지. 한 시대 한국의 매우 매우 큰 격동의 다섯 풍경.

1897년 10월 12일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어요. 그 후 약 13년 — 한국 마지막 왕조가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 안에 — 일본·중국·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 외국 강대국들의 매우 매우 큰 압력을 받았습니다.
1897년 10월 12일 — 고종이 자기 황제 대관식을 가졌어요. 그가 자기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으로 바꿨고, 자기 직책을 〈왕(王)〉에서 〈황제(皇帝, Emperor)〉로 —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격상시켰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한국이 — 더 이상 — 중국이나 일본의 한 번국(藩國)이 아니다. 우리는 매우 독립적인 한 제국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 한국 마지막 왕조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이 1894~1895년 청일 전쟁(中日戦争)에서 청나라를 — 1904~1905년 러일 전쟁(日露戦争)에서 러시아를 — 매우 매우 큰 승리로 이겼어요. 그 두 전쟁 후 일본이 한국을 — 자기 직접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큰 변화의 한 시간에 있었어요.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새 형식이 — 〈서양화(西洋畵)〉입니다. 1909년 한국 첫 번째 서양화가 — 고희동(高羲東, Ko Hee-dong, 1886-1965)이 — 일본 도쿄 미술 학교에 입학했어요. 그가 약 4년 동안 — 일본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유화, 수채화 — 을 배웠습니다. 1915년 약 29세에 그가 — 한국 첫 서양화가로 —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 왕조가 마지막으로 흔들린 그 사례 — 1897~1910년 대한제국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그 한 왕조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끝났어요.

1910년 8월 22일 —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후 약 35년의 식민 시기였어요. 그 시기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길을 — 만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미술이 — 세 가지 큰 흐름이 있었어요. 첫째 — 〈일본화(日本畵)〉의 영향. 그 시대 거의 모든 한국 화가가 —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学校), 가와바타 미술 학교(川端画学校) 등 — 일본의 한 미술 학교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일본화(日本畵)〉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형식이 됐어요.
둘째 — 〈서양화(西洋畵)〉의 도입. 한국 첫 서양화가 — 고희동, 김관호(金觀鎬, 1890-1959), 김찬영(金瓚永, 1893-1960) — 이 일본을 통해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유화, 수채화 — 를 배웠어요.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 그 시대 첫 서양화 — 〈자화상(1915, 김관호)〉, 〈해질녘(1916, 김관호)〉 — 을 그렸습니다.
셋째 — 〈전통 한국화〉의 매우 결정적인 부흥.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상범(李象範, 1897-1972),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 — 매우 매우 결정적 한국화 화가들이 — 전통 한국화의 한 매우 깊은 길을 —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다시 만들었어요.
그러나 그 시기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가지 — 〈자기 한국 정체성을 그릴 수 있는가〉라는 한 가지 큰 질문이었습니다. 일본 식민 정부가 — 매우 매우 강하게 — 한국 정체성을 매우 매우 강하게 억압했어요. 1939년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는 한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을 — 강제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 자기 한국 성을 — 일본 성으로 바꿔야 했어요. 약 80%의 한국 사람들이 — 매우 매우 강한 압력으로 — 자기 성을 바꿨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의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이었어요. 한 시대가 식민 안에서 미술을 만든 그 사례 —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어요. 그 후 약 3년 1개월 — 한국 전쟁이 —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매우 큰 한 비극이었습니다.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살았어요.
1950년 6월 25일 —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군대가 — 38선 남쪽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침공했어요. 그 후 약 3년 1개월의 매우 매우 큰 전쟁이었습니다. 약 250만 명의 인명 피해,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離散家族, 가족이 헤어진 사람들), 한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 매우 매우 큰 폐허로 — 된 한 시간.
그 시기 한국 미술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길로 — 살았어요. 매우 많은 화가들이 — 부산(釜山)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避難, 도망)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한 시간을 — 자기 가족과 함께 살았어요.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람이 — 이중섭이었습니다. 그가 1951년 약 35세에 자기 가족을 일본 — 자기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의 한 친정 — 으로 보내야 했어요. 그 후 그가 한 평생 자기 가족을 다시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기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미술 운동이 만들어졌어요. 약 195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추상 미술 운동이 —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한 사람이 —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1913-1974)였어요. 그가 1956년 약 43세에 — 프랑스 파리로 약 3년 동안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결심을 했어요. "한국 전통의 깊이를 추상의 형식으로 그리겠다."
한 전쟁이 한 시대 미술을 흔든 그 사례 — 1950~1953년 한국 전쟁이었어요.

1961년 5월 16일 — 박정희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요. 그 후 약 18년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빠른 경제 발전을 — 〈한강의 기적〉 — 으로 — 일으켰습니다.
1961년 약 44세의 박정희 장군이 — 한 군사 쿠데타로 — 정권을 잡았어요. 그 후 약 18년 동안 — 1979년 10월 26일 그의 한 가운데 발에 — 그가 한국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 을 —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 추진했어요.
그 결과 한국이 — 1960년 1인당 GNP 약 79달러에서 — 1979년 1인당 GNP 약 1,693달러로 — 약 21배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漢江의 奇跡)〉이라 불려요. 그 시기에 — 1962년 한국 첫 산업단지(蔚山工業團地, 울산 공업 단지) 건설, 1968년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서울에서 부산까지) 건설, 1970년 한국 첫 산업박람회 등 — 매우 매우 매우 큰 산업 발전이 있었어요.
그 시기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진정한 추상 운동이 — 〈단색화(單色畵, Dansaekhwa)〉라는 한 새 운동이 — 시작되었어요. 가장 결정적 한 그룹이 — 박서보(朴栖甫, 1931-2023), 정상화(鄭相和, 1932-), 윤형근(尹亨根, 1928-2007), 권영우(權寧禹, 1926-2013), 하종현(河鍾賢, 1935-) —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단 한 가지 색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매우 큰 한 면〉 — 만 그렸어요.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변한 그 사례 — 1960~1980년 서울이었습니다.

1988년 9월 17일 — 서울 올림픽이 개막했어요. 그 한 행사가 — 한국이 — 그 시대까지의 한 매우 매우 작은 한 나라에서 — 그 시대의 한 글로벌 도시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변한 한 시작이었습니다.
1988년 9월 17일 ~ 10월 2일 약 16일 동안 — 서울에서 24회 하계 올림픽이 열렸어요. 약 159개국 약 8,397명의 선수가 참가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행사였습니다. 그 한 올림픽이 — 한국이 그 시대 처음으로 — 세계 무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들어간 한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1997년 12월 3일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 외환 위기(IMF外換危機)〉예요. 그 시대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매우 매우 빠르게 — 거의 0달러까지 — 떨어졌어요. 한국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에 약 580억 달러의 한 긴급 자금 지원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요청했습니다. 그 후 약 4년 동안 — 한국 경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구조 조정을 겪었어요.
그러나 그 위기 직후 — 1990년대 후반에 —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새 한 사실이 — 시작되었어요. 〈한류(韓流, Korean Wave)〉입니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 K-pop — 이 — 그 시대 동남아시아·일본·중국·세계로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어요. 1997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2002 일본 방송), 2004년 영화 〈올드보이(Old Boy)〉(칸 영화제 그랑프리), 2012년 〈강남스타일〉(K-pop 첫 글로벌 히트)이 — 그 시조였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 미술도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변화를 했어요. 1995년 — 한국 첫 〈광주 비엔날레(光州 Biennale)〉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 한국 첫 큰 국제 미술 전시였어요.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글로벌 자리를 — 만들었습니다.
한 도시가 세계의 한 자리가 된 그 사례 — 1990년대 서울이었어요.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 김환기(1913-1974), 백남준(1932-2006), 이우환(1936-). 한국 근현대 미술의 다섯 거장.

이중섭이 평생 〈황소〉를 그렸어요. 매우 매우 강한 한 황소, 매우 매우 거친 한 붓,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사랑.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근현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시조 중 하나입니다.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한국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19세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분카학원(文化学院)에서 약 4년 동안 매우 정교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한 일본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2022)와 사랑에 빠졌어요. 1945년 광복 직후 — 그가 마사코와 — 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결혼했습니다.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이 — 〈황소(소)〉예요. 그 시대까지 한국 미술에서 — 〈소〉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상징이었습니다. 한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짐승,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짐승, 매우 매우 매우 일하는 한 짐승. 그가 그 한 가지 〈소〉를 — 매우 매우 거친 한 붓으로, 매우 매우 강한 한 색으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렸어요.
1950년 한국 전쟁 시작 후, 그가 자기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 — 그가 자기 가족 — 자기 아내 마사코, 자기 두 아들 — 을 — 일본 자기 친정 — 으로 보내야 했어요. 그 후 약 5년 동안 — 그가 자기 가족과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 자기 가족과 헤어져 — 살았습니다.
그가 그 시기에 —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은박지 그림(銀紙畵)〉입니다. 매우 매우 가난해 — 큰 캔버스를 살 수 없었기 때문 — 그가 매우 매우 작은 — 약 9×15cm — 크기의 — 담뱃갑의 한 은박지(銀箔紙)에 — 매우 매우 정교한 매우 매우 작은 그림을 — 그렸어요. 평생 약 2,000장의 매우 매우 작은 은박지 그림이 — 그의 가족에 대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랑을 — 그렸습니다.
1956년 9월 6일 — 그가 약 40세에 한국 서울 한 정신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평생 매우 매우 가난해 — 거의 매일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한 화가가 황소를 매우 매우 깊이 그린 그 사례 — 이중섭이었어요.

박수근이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형식 —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매우 매우 거친 화강암 같은 한 표면〉 — 만 그렸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근현대 미술의 가장 결정적 한 시조입니다.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한국 강원도 양구군(楊口郡)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가족이 매우 매우 가난해 — 그가 정식 미술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생 거의 한 가지 길 — 〈독학(獨學, 자기 혼자 배우기)〉 — 으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화가가 됐어요.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인 한 영감이 — 1932년 약 18세에 본 한 미국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한 그림 〈만종(晩鐘, The Angelus, 1857-1859)〉이에요. 그 한 그림 —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두 농민이 한 들판에서 매우 매우 따뜻하게 기도하는 한 시간 — 이 — 박수근의 평생 가장 깊은 영감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거의 한 가지 주제 — 〈한국 평민의 매일〉 — 만 그렸어요. 〈빨래터(빨래터)〉, 〈할아버지와 손자〉,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장터〉. 그 모든 그림이 —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하고,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하고,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이었어요.
그가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의 매우 매우 거친 표면〉입니다. 그가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 — 약 1~2cm 두께 — 를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칠했어요. 그 두꺼운 페인트가 마른 후 — 그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칼로 그 표면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깎고 긁어 —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같은 표면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국 화강암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했어요.
1965년 5월 6일 — 그가 약 51세에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백내장(白內障)과 간경화(肝硬化)로 —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평생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해 — 자기 평생 마지막 약 10년 동안 — 거의 한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한 화가가 매우 거친 화강암을 그린 그 사례 — 박수근이었어요.

김환기가 평생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 — 〈점(點)〉 — 만 그렸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점들을 매우 매우 매우 많이,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린 한 화가입니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한국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安佐島)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약 21세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일본 대학(日本大学)에서 약 4년 동안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1937년 약 24세에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그 후 약 19년 동안 — 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추상 화가로 활동했어요.
1956년 약 43세에 그가 평생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떠나 — 프랑스 파리로 약 3년 동안 유학을 갔어요. 그 시기에 그가 — 자기 평생 가장 깊은 한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전통의 매우 매우 깊은 한 정서를 — 추상의 매우 매우 정교한 형식으로 — 그리겠다."
1959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약 4년 동안 한국에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새 형식을 만들었어요. 그러나 1963년 약 50세에 — 그가 또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자기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 영원히 — 옮겼어요. 그 후 평생 마지막 약 11년 동안 — 그가 뉴욕에서 살았습니다.
그 뉴욕 시기에 —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 형식 — 〈점〉 — 을 만들었어요.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점들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렸습니다. 한 그림 안에 약 5만~10만 개의 한 점이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어요. 그 한 가지 형식이 —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상 — "한 점이 한 사람이고, 한 점이 한 별이고, 한 점이 한 그리움이다." — 을 그렸습니다.
그가 평생 마지막 한 시리즈가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Where, In What Form, Shall We Meet Again, 1970)〉예요. 그 한 시리즈에 — 한국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의 한 시 〈저녁에〉의 한 줄 —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이 — 매우 매우 깊이 — 영감이 됐습니다.
1974년 7월 25일 — 그가 약 61세에 뉴욕에서 —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척추 사고(spine surgery 후 합병증)로 세상을 떠났어요. 한 화가가 점을 그린 그 사례 — 김환기였습니다.

백남준이 인류 비디오 아트(Video Art)의 가장 큰 시조였어요. 1963년 약 31세에 그가 — 인류 첫 비디오 아트 전시 — 를 독일에서 열었고, 그 후 약 40년 동안 — 그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 평생을 살았어요.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한국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가족이 매우 매우 매우 부유한 한 무역상이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 시작 직전 — 그가 약 17세에 일본으로 —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했어요. 그가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에서 약 6년 동안 — 매우 매우 정교한 음악과 미술사를 배웠습니다.
1956년 약 24세에 그가 독일로 갔어요. 그곳에서 그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음악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과 만났습니다. 그 후 그가 — 〈플럭서스(Fluxus, 1960년대 한 매우 매우 자유로운 한 예술 운동)〉 — 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멤버가 됐어요.
1963년 3월 11일 — 그가 약 31세에 독일 부퍼탈(Wuppertal)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 인류 첫 비디오 아트 전시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을 열었습니다. 그 전시에 약 13개의 한 텔레비전이 —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매우 매우 결정적인 형식으로 — 변형되어 — 한 갤러리에 전시되었어요. 그것이 — 인류 비디오 아트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약 40년 동안 — 그가 인류 비디오 아트의 가장 결정적인 한 시조였어요. 〈TV 부처(TV Buddha, 1974)〉 — 한 부처 조각이 자기 자신의 한 텔레비전 화상을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는 한 작품. 〈TV 정원(TV Garden, 1974)〉 — 한 큰 갤러리 안에 약 30개의 한 텔레비전이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푸른 식물 안에 함께 있는 한 작품. 〈전자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 1995)〉 — 약 336개의 한 텔레비전 + 약 50개의 한 비디오가 함께 있는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작품.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래에 모든 사람이 —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화면 — 으로 — 매우 매우 매우 멀리 떨어진 한 사람과 — 매일 — 만난다." 그가 1974년에 〈전자 슈퍼 하이웨이〉라는 한 단어를 — 매우 매우 매우 처음으로 — 사용했어요. 그것이 — 그 후 약 25년 후의 한 〈인터넷〉의 첫 예언이었습니다.
2006년 1월 29일 — 그가 약 73세에 미국 마이애미에서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뇌출혈(腦出血)로 세상을 떠났어요. 한 사람이 비디오 아트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백남준이었습니다.

이우환이 한국과 일본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동시대 화가예요.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 —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한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그렸습니다.
이우환은 1936년 6월 24일 한국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1956년 약 20세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약 2개월 만에 한국에서 일본 — 도쿄 — 으로 —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일본 대학(日本大学) 철학과에서 — 약 5년 동안 — 매우 매우 정교한 동양 철학을 배웠어요.
1968년 약 32세에 그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결심을 했어요. 그가 자기 평생 첫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약 50년 동안 — 평생 매우 매우 활발하게 — 작업했습니다. 그가 일본 — 도쿄와 카마쿠라(鎌倉) — 그리고 한국 — 부산과 양구 — 에 — 매우 매우 매우 큰 자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가 평생 두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운동의 가장 큰 시조가 됐어요. 첫째 — 일본 〈모노하(物派, Mono-ha, 〈물건의 학파〉)〉입니다. 1968~1972년 약 4년 동안 — 일본의 약 10명의 매우 매우 결정적 화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가지 — 〈매우 매우 매우 자연적인 한 가지 — 한 돌, 한 나무, 한 흙, 한 종이 — 의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만들었어요. 이우환이 그 운동의 가장 결정적 시조였습니다.
둘째 — 한국 〈단색화(Dansaekhwa)〉예요. 1960~1970년대 — 그가 한국에서도 매우 매우 결정적 한 형식 —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 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렸습니다.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가 — 〈선으로부터(From Line)〉, 〈점으로부터(From Point)〉, 〈조응(Correspondence)〉, 〈대화(Dialogue)〉 — 입니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한 점, 한 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가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자리 안에서 —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를 — 만들어 낸다." 그 한 줄이 — 한국·일본의 동시대 미술의 가장 매우 매우 깊은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 약 89세 —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 작업하고 있어요. 한 점이 한 가운데 자리가 된 그 사례 — 이우환이었습니다.
이중섭 〈황소〉(약 1953), 박수근 〈빨래터〉(1959),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1970), 백남준 〈TV 부처〉(1974), 이우환 〈조응〉(1990). 한국 근현대 미술의 다섯 점.

이중섭의 〈황소〉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시리즈예요. 약 1953~1955년 약 2년 동안 — 그가 약 10여 점의 〈황소(소)〉를 매우 매우 거친 한 붓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그렸습니다.
이 시리즈는 1953년 이중섭이 약 37세에 그리기 시작한 한 시리즈예요. 그 시기가 —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 그가 자기 가족과 매우 매우 어려운 시간을 — 일본 — 멀리 — 보내고 있었던 한 시기였습니다. 그가 매우 매우 가난해 — 큰 캔버스를 살 수 없었기 때문 — 약 30×40cm의 매우 매우 작은 종이에 그렸어요.
그림 안에 — 한 거대한 황소 한 마리만 — 매우 매우 매우 거친 붓으로 — 매우 매우 강한 한 빨강과 한 검정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 황소의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두 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어깨,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발굽.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형식이에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황소의 한 표정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강하지만,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슬픈 한 표정. 한 매우 매우 깊은 한 사랑과, 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그리움이 — 그 황소의 한 두 눈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가 한국 평민의 매일의 매우 매우 매우 강한 한 짐승 — 황소 — 을 통해 — 자기 평생 가장 깊은 한 사랑 — 자기 가족 — 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렸습니다. 한 황소가 매우 거친 붓으로 그려진 그 사례 — 이중섭의 〈황소〉였어요.

박수근의 〈빨래터〉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한 한국 평민 마을의 한 빨래터 — 약 8명의 한 여인들이 매우 매우 따뜻하게 빨래를 하고 있는 한 시간 — 이 —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같은 한 표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59년 박수근이 약 45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약 51×97cm의 매우 매우 큰 — 박수근의 작품 안에서는 — 한 점입니다. 그림 안에 — 한 큰 시내(개울) 옆에 — 약 8명의 한 한국 여인들이 — 매우 매우 따뜻한 한 자세로 — 빨래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가 — 그 모든 인물이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단순한 한 형식으로 —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얼굴이 거의 없고,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손가락도 없고,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옷의 디테일도 거의 없어요. 그러나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 모든 인물이 매우 매우 매우 따뜻하고, 매우 매우 매우 매우 한국적이고,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일의 — 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모습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 그림의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표면이에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두꺼운 페인트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칼로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깎아져, 매우 매우 매우 거친 한 화강암 — 그 한 한국 시골 마을의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시각적 표현 — 이 만들어졌어요.
이 그림이 1962년에 박수근의 한 친구이자 한 컬렉터 박명자(朴明子, 1923-1991)가 매입한 한 점이었어요. 그러나 1990년대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7년에 — 그 그림이 — 한국 미술 경매에서 약 45억 5천만 원에 매각되었어요. 그 매각이 — 그 시대 한국 미술 경매 사상 가장 비싼 한 점 —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매각 후 —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큰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 그림의 진위(眞僞, 진짜·가짜)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약 5년의 한 큰 법정 다툼 끝에 — 2012년 그 그림이 — 한 가짜 — 라는 한 큰 판결이 나왔어요. 그러나 박수근 자신의 진정한 〈빨래터〉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점인 것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입니다. 한 평민의 매일이 한 화강암이 된 그 사례 — 박수근의 〈빨래터〉였어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점이에요. 약 232×172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 약 5만~10만 개의 매우 매우 매우 작은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70년 김환기가 약 57세에 — 뉴욕 자기 작업실에서 — 그린 한 점이에요. 그가 평생 마지막 약 4년 동안 — 1970~1974년 — 그 〈점〉 시리즈에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충실했습니다. 약 232×172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캔버스 위에,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푸른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매우 매우 매우 많이 — 그려져 있어요.
그가 한 점을 그리는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푸른 페인트를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작은 붓 — 으로 — 한 점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그려요. 그 한 점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흰 페인트로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둥근 한 형태로 — 둘러싸요. 그 결과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별 같은 한 점이 —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만들어집니다.
그 한 점을 — 약 5만~10만 번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결정 안에서 — 그렸어요. 한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 약 6개월~1년 — 이 걸렸습니다.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노동집약적인 한 형식이었어요.
그 그림의 한 가장 결정적 한 사상이 — "한 점이 한 사람이고, 한 점이 한 별이고, 한 점이 한 그리움이다." 그가 한 한국 시인 김광섭의 한 시 〈저녁에〉의 한 줄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 별 하나 그 하나에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그 한 시의 매우 매우 매우 깊은 사상이 — 그 그림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1992년 한국 〈환기미술관(煥基美術館)〉이 — 서울 부암동에 — 영구 전시 자리로 — 한 자리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모셔졌어요. 매우 많은 점이 한 시 한 줄이 된 그 사례 — 1970년 김환기의 한 점이었습니다.

백남준의 〈TV 부처〉가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작품이에요.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부처 조각이 —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텔레비전 안에 자기 자신의 한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는 한 작품.
이 작품은 1974년 백남준이 약 42세에 만든 한 작품이에요. 그가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18세기 한국식 한 부처 조각을 한 작은 골동품 시장에서 매입했습니다. 그 부처를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텔레비전 앞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두었어요. 그 텔레비전이 — 한 매우 매우 매우 작은 한 비디오 카메라 — 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연결되어, 그 카메라가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 부처의 한 모습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처가 — 자기 자신의 한 비디오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어요. 한 부처와 한 부처의 한 비디오 화상이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에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함께 있는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작품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사상이 — "한 부처가 — 자기 자신의 한 화상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본다 — 그것이 한 명상(冥想, meditation)의 한 가장 결정적 한 형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 매우 매우 매우 한 가지 결정적 비판도 있어요. "한 시대 모든 사람이 — 매일 자기 자신의 한 화면 — 자기 자신의 한 SNS, 자기 자신의 한 자화상 — 을 매우 매우 매우 깊이 보고 있다. 그것이 — 한 시대 진정한 한 부처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실이다."
이 작품이 1974년 9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Stedelijk 박물관〉에서 처음 영구 설치되었어요. 그 후 약 약 20개의 매우 매우 다양한 박물관 —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술관〉, 뉴욕 〈휘트니〉, 도쿄 〈와타리움 미술관〉, 서울 〈백남준 아트 센터〉 — 에서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형식으로 — 영구 전시되었습니다.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본 그 사례 — 1974년 백남준의 〈TV 부처〉였어요.

이우환의 〈조응(Correspondence)〉이 그의 평생 가장 결정적 한 시리즈예요.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캔버스 위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점, 한 줄, 한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자리 — 만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990년 이우환이 약 54세에 그린 한 점이에요. 〈조응(Correspondence)〉이라는 한 시리즈의 한 점입니다. 그 시리즈가 약 199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 그가 평생 가장 결정적인 한 시리즈가 됐어요.
그림 안에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캔버스 — 약 218×291cm의 매우 매우 매우 큰 자리 — 가 있어요. 그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자리 안에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회색의 한 점, 또는 한 줄, 또는 한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 — 만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 한 가지가 — 그 한 점의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자리예요.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림의 한 정확한 자리에, 한 정확한 크기로, 한 정확한 색깔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그려져 있어요. 그 한 점이 — 그 매우 매우 매우 큰 흰 자리의 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가지를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만들어 냅니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한 점, 한 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 가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흰 자리 안에서 —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한 가지를 — 만들어 낸다." 그 한 줄이 — 한국·일본 동시대 미술의 가장 매우 매우 깊은 한 사상이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 그가 평생 약 200점 정도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하게 — 그린 한 시리즈예요.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큰 박물관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카마쿠라 가나가와 현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파리 퐁피두 — 의 영구 컬렉션에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한 점이 한 자리를 만든 그 사례 — 1990년 이우환의 〈조응〉이었어요.
일제 시대의 일본화 영향, 전쟁의 10년, 경제 기적, 민주화, 동시대. 작품 너머의 다섯 자리.

일제 강점기에 — 한국 거의 모든 큰 화가들이 — 일본의 한 매우 매우 결정적 미술 학교에서 —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을 배웠어요. 그 결과 — 한 시대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한 형식이 됐습니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6년 동안 — 한국 거의 모든 큰 화가들이 — 두 가지 큰 일본 미술 학교에서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을 배웠어요. 첫째 —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学校, 지금 도쿄 예술 대학)〉. 그곳이 그 시대 일본의 가장 큰 미술 학교였습니다. 한국 첫 서양화가 고희동(1909 입학), 김관호(1909), 김찬영(1912)이 — 모두 그 학교에서 배웠어요.
둘째 — 〈가와바타 미술 학교(川端画学校)〉. 그것이 — 매우 매우 더 정교한 — 사립 한 매우 매우 정교한 미술 학교였습니다. 한국 첫 큰 화가들 — 이중섭(1936), 김환기(1933), 박수근(거의 무관, 독학) — 이 — 매우 매우 다양한 시기에 그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 두 학교의 영향이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일본화 — 〈일본화(日本畵, 니혼가)〉, 매우 매우 정교한 한 가지 일본 식 수묵·담채 — 와 — 한 가지 매우 매우 정교한 서양화 — 〈서양화(西洋畵)〉 — 가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한국 화가들에게 — 가르쳐졌어요.
그 결과 한 시대 한국 미술이 —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결정적 한 영향을 — 받았습니다.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일본적인 형식 안에서 — 한국 화가들이 자기 한국 정체성을 매우 매우 매우 어렵게 — 만들어야 했어요. 1945년 광복 후 — 한국 화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자기 한국 정체성의 — 새 길을 —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학교가 한 시대 한국 미술을 결정한 그 사례 — 1910~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 미술 학교들이었어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 약 5년의 매우 매우 큰 사회 분열, 그리고 1950~1953년 한국 전쟁의 약 3년 + 그 후 약 2년의 폐허 — 약 10년이 한 시대 한국 화가들에게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기였어요.
1945년 8월 15일 —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면서 한국이 35년의 일제 강점기 끝에 광복(光復)을 맞았어요. 그러나 그 직후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사회 분열을 겪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 한국이 두 개 —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 으로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분단되었어요.
1950년 6월 25일 —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그 후 약 3년 1개월의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전쟁이 — 약 2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離散家族)을 만들었어요. 한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폐허로 됐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 화가들이 매우 매우 매우 다양한 한 길로 살았어요. 매우 많은 화가들이 — 한국 남쪽 부산(釜山)으로 매우 매우 빠르게 피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하게 — 자기 가족과 함께 — 약 3년을 살았어요.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람이 — 이중섭이었습니다. 그가 1951년 약 35세에 자기 가족 — 자기 아내 마사코, 자기 두 아들 — 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어요.
또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비극 — 〈월북(越北, 북한으로 옮긴) 화가들〉입니다. 한국 첫 큰 한국화가 김용준(金瑢俊, 1904-1967), 한국 첫 큰 서양화가 김환기의 한 친구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추상 화가 이쾌인(약 1909-?) — 이 — 1945~1948년 매우 매우 다양한 정치 이념의 이유로 — 북한으로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옮겼어요. 그 후 그들이 — 한국 미술 역사에서 —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 시대가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산 그 사례 — 1945~1955년 한국이었어요.

1960~1980년 약 20년의 〈한강의 기적〉이 한국을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 한 큰 경제 — 로 — 만들었어요. 그 시기에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 박정희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그가 약 18년 동안 한국 대통령이었어요. 그가 한 가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정책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 을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이 — 1960년 1인당 GNP 약 79달러에서 1979년 약 1,693달러로 — 약 21배 —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성장했어요.
그 시기에 한국 도시들이 매우 매우 매우 빠르게 변했습니다. 1962년 — 한국 첫 산업단지(蔚山工業團地, 울산 공업 단지) 건설. 1968년 —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16km)이 개통되었어요. 1970년 — 새마을 운동(새마을 운동) 시작. 1973~1979년 —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한국 경제가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산업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 그 매우 매우 매우 빠른 한 경제 발전 안에서 —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비극이 있었어요. 매우 매우 매우 가난한 한 노동자들이 — 매우 매우 매우 어려운 한 시간을 — 살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 한국 청계천(淸溪川) 평화시장의 한 22세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이 — 한국 노동법(勞動法)을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 외친 후 — 자기 자신에게 매우 매우 매우 큰 불을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붙였어요. 그가 약 22세에 매우 매우 매우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건이 — 한국 노동 운동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시작이 됐어요.
그 시기에 한국 미술도 매우 매우 매우 큰 변화를 했어요. 1960년대 후반부터 — 한국 첫 진정한 추상 운동이 — 〈단색화(單色畵, Dansaekhwa)〉라는 한 새 운동이 — 시작되었습니다.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권영우, 하종현 — 다섯 사람이 그 운동의 가장 결정적 시조였어요.
한 도시가 매우 빠르게 큰 도시가 된 그 사례 — 1960~1980년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 27일 — 한국 광주(光州)에서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 사건이 — 한국 민주화의 가장 매우 매우 결정적 시조였습니다. 그 후 약 7년 — 1987년 6월 항쟁 — 까지 — 매우 매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평생을 — 한 민주의 자리를 위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살았어요.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한 가운데 직속 부하 김재규(金載圭)에게 — 매우 매우 매우 갑작스럽게 — 살해당했어요. 그 후 약 6개월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민주화 한 시간 — 〈서울의 봄(서울의 봄)〉 — 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17일 —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장군이 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요.
1980년 5월 18일 — 광주의 한 사람들이 그 군사 정권에 매우 매우 매우 큰 항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약 10일 — 1980년 5월 27일까지 — 매우 매우 매우 큰 폭력 사건이 일어났어요. 한국 정부 군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매우 매우 매우 큰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약 165명의 사망자, 약 3,500명의 부상자, 약 7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어요. (이 숫자는 한국 정부의 공식 발표였고, 실제 사망자가 약 1,000명 이상이라는 한 매우 매우 큰 한 의혹이 있어요.)
그 후 약 7년 동안 — 한국이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민주화 운동을 살았습니다. 1987년 1월 14일 —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朴鍾哲, 1965-1987)이 — 한 정부 고문 중 매우 매우 매우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사건이 —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분노를 일으켰고, 그 후 약 5개월 동안 — 매일 매우 매우 매우 큰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 약 20일 — 한국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6월 항쟁(6月抗争)〉이 일어났어요. 약 500만 명 — 한국 인구의 약 12% — 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매우 매우 매우 강하게 시위했습니다. 그 결과 — 1987년 6월 29일 — 한국 정부가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인 한 항복을 했어요. 〈6.29 선언〉입니다. 한국 대통령을 매우 매우 매우 직접 선출하는 한 새 헌법으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바꿔야 한다는 한 약속이었어요.
1988년 2월 25일 — 한국 첫 매우 매우 매우 직접 선출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 취임했습니다. 그것이 — 한국의 진정한 한 민주의 첫 시작이었어요.
한 도시가 한 민주의 시조가 된 그 사례 — 1980년 광주였습니다.

1995년 9월 20일 — 한국 광주에서 첫 〈광주 비엔날레(光州 Biennale)〉가 열렸어요. 그것이 — 한국 동시대 미술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첫 큰 글로벌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글로벌 활동을 — 만들었어요.
1995년 9월 20일 ~ 11월 20일 약 두 달 동안 — 한국 광주에서 첫 〈광주 비엔날레〉가 열렸어요. 약 50개 나라의 약 92명의 한 화가들이 참여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국제 미술 전시였습니다. 그 비엔날레의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사상이 — 〈한국 광주의 1980년 민주화 운동의 한 정신을 한 미술 전시로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하자〉였어요.
그 후 약 30년 동안 — 한국 미술이 매우 매우 매우 큰 글로벌 활동을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 한 사람이 — 백남준이에요. 그가 1990년대부터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 미국·유럽·한국에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비디오 아트 활동을 했어요. 1993년 — 그가 한국 첫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Korean Pavilion)의 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국관이 — 그 시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매우 매우 매우 큰 한 〈황금 사자 상(Golden Lion)〉을 받았어요.
그 후 매우 매우 매우 큰 동시대 한국 화가들이 — 매우 매우 매우 활발하게 글로벌 활동을 했습니다. 이불(李昢, Lee Bul, 1964-) —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가장 큰 시조. 양혜규(梁慧奎, Haegue Yang, 1971-)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설치 미술. 양정욱(양정욱, Yang Jung-Uk, 1982-) — 매우 매우 매우 정교한 한 키네틱 조각. 그리고 한국 〈단색화(Dansaekhwa)〉의 다섯 사람 —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권영우, 하종현 — 이 — 약 2010년대부터 — 매우 매우 매우 결정적 한 글로벌 재평가를 받았어요.
한 비엔날레가 한 시대 한국을 글로벌로 만든 그 사례 — 1995년 ~ 광주 비엔날레였습니다.

1897.10.12 대한제국 선포 (고종)
1909 고희동 도쿄 미술 학교 입학 (한국 첫 서양화가)
1910.08.22 일제 합병 (35년 식민)
1913 김환기 출생 / 1914 박수근 출생 / 1916 이중섭 출생
1932 백남준 출생 / 1936 이우환 출생
1939 창씨개명 강제
1945.08.15 광복
1948.08.15 분단 (남한·북한)
1950.06.25 ~ 1953.07.27 한국 전쟁
1951 이중섭 가족 분리
약 1953 ~ 1955 이중섭 〈황소〉 시리즈
1956.09.06 이중섭 사망 (40세)
1956 ~ 1959 김환기 파리 유학
1959 박수근 〈빨래터〉
1961.0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
1963.03.11 백남준 첫 비디오 아트 전시 (독일 부퍼탈)
1963 김환기 뉴욕 이주
1965.05.06 박수근 사망 (51세)
1968 ~ 1972 이우환 일본 모노하 시조
1968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11.13 전태일 분신
1974 백남준 〈TV 부처〉
1974.07.25 김환기 사망 (61세)
1979.10.26 박정희 사망
1980.05.18 ~ 27 광주 민주화 운동
1987.06.10 ~ 29 6월 항쟁 / 6.29 선언
1988.09.17 ~ 10.02 서울 올림픽
1990 이우환 〈조응〉 시리즈 시작
1993 백남준 베니스 한국관 황금 사자상
1995.09.20 첫 광주 비엔날레
1997.12.03 IMF 외환 위기
2006.01.29 백남준 사망 (73세, 마이애미)
2010년대 단색화 글로벌 재평가

1. 이중섭 〈황소〉 약 1953~1955 — 매우 거친 붓의 한 사랑.
2. 박수근 〈빨래터〉 1959 — 한 화강암의 매일.
3.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 매우 많은 점의 시.
4. 백남준 〈TV 부처〉 1974 — 한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보다.
5. 이우환 〈조응〉 1990 — 한 점의 한 자리.
6. 김환기 〈론도〉 1938 — 한국 첫 큰 추상.
7. 백남준 〈전자 슈퍼하이웨이〉 1995 — 인터넷의 첫 예언.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7년 11월 1쇄
A 시대 풍경 5장면 · B 한국의 다섯 사람 · C 다섯 점 · D 100년 한국 일상 5가지 · 부록(연표·일곱 점). 격동의 100년 안에서 매우 매우 깊은 미술을 만든 한국.
이중섭 평전 (오광수, 1972) · 김환기 평전 (이일, 1989) · 백남준 평전 (한낙원, 2010) · 단색화 컬렉션 카탈로그 (국립현대미술관) · 환기미술관·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컬렉션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의 모든 작품이 21세기까지 저작권 보호되므로, 시대 풍경과 작품 일부는 미드저니 v7과 한국 전통화 풍 재현 일러스트로 대체했습니다.
1980년부터 2027년까지 약 50년. 바스키아의 거리, 해링의 라인, 카우스의 인형, 디지털 NFT, 그리고 AI 미술. 미술이 거리·디지털·AI로 옮겨간 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