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역사 Luna History · 2026 July
Vol
01
JULY · 2026
정약용
SPECIAL ISSUE · 한 사람을 따라가는 잡지

정약용

한 사람이 강진에서 보낸 18년 — 1762 마재의 한강가에서 1836 여유당의 마지막 글까지, 한 학자의 75년이 한 권에 들어갑니다.

LUNA WHALE · HISTORY ISSUE 54 PAGES · 4 PARTS
EDITOR'S LETTER · 여는 글

한 사람의 일생을 한 권에 담는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자주 생각합니다. 75년의 시간을 54페이지로 옮긴다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어떤 자리를 골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생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정약용입니다. 1762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태어나 1836년 같은 마을에서 세상을 떠난 한 학자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그의 이름은 보통 〈목민심서〉 한 줄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책은 1818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마무리되었고, 그 책상까지 가는 길에는 정조와의 우정, 1801년 신유박해라는 가족의 비극, 그리고 18년 동안의 유배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한 시대 전체가 자연스럽게 곁가지로 따라옵니다. 정조 시대의 마지막 학자, 천주교 박해 시기의 한 가족, 조선 후기 실학의 어느 자리. 이번 호의 네 부에 그 모든 것을 차례로 담았습니다.

제1부는 사람입니다. 1762년 마재 출생부터 1800년 정조의 죽음까지, 한 청년이 어떻게 자기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는지를 따라갑니다. 제2부는 1801년 신유박해입니다. 한 가족이 같은 해에 받은 세 가지 죄 — 처형, 흑산도 유배, 그리고 강진 유배 — 를 차례로 살핍니다. 제3부는 강진의 18년입니다. 머물 곳도 없던 한 학자가 어떻게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고 500권의 책을 썼는지를 봅니다. 제4부는 후세입니다. 1818년의 해배 귀향부터 일제강점기 다산학의 부활, 그리고 오늘의 한 권의 〈목민심서〉까지.

학급에서 시연 자료로, 또 가정의 거실 바닥에서 한 페이지씩 천천히 넘겨 봐 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음 호의 주인공은 9년의 제주 유배에서 〈세한도〉 한 점을 그린 또 한 사람입니다.

이번 호를 펼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7월 1일 · 루나웨일 역사 편집실
EDITOR — Luna Whale
02
CONTENTS · 목차

한 사람을 따라가는 4부

A

사람 — 마재의 한 청년

1762 광주 마재 출생부터 정조의 신임받는 신하, 한강 배다리, 수원 화성 거중기, 그리고 1800년 정조의 죽음까지.

P.04 – P.15
B

1801 신유박해

한 해 동안 한 가족 세 사람에게 내려진 세 가지 죄. 형 정약종의 순교, 형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그리고 자신의 강진 유배.

P.16 – P.27
C

강진 18년

머물 곳 없던 한 학자가 어떻게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고 500권의 책을 썼는지. 〈목민심서〉의 책상과 혜장 스님과의 우정.

P.28 – P.39
D

후세 — 잠들었다 깨어나는 책

1818년의 해배 귀향부터 여유당의 말년 18년, 일제강점기 다산학의 부활, 그리고 오늘의 〈목민심서〉.

P.40 – P.51
03
A
PART A · 5 STORIES · 사람

마재의 한 청년

1762년 경기도 광주 마재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자리였고,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었습니다. 자라서 정조의 신임받는 신하가 되었고, 한강 위에 배다리를 띄웠으며, 수원 화성에 거중기를 들였습니다. 첫 번째 부는 그 한 청년의 일상을 따라가는 시간입니다.

한 강가 마을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75년.
04 · CHAPTER OPENER
04
PART A · 다섯 장면

한 청년의 다섯 장면

한강가의 마재 마을에서 정조의 죽음까지, 38년의 다섯 장면을 차례로 보여 드립니다.

A1

1762 마재 마을

한강이 흐르는 광주의 작은 마을 · P.06
A2

22세의 청년 학자

생원시 합격 · 정조와의 첫 만남 · P.08
A3

한강 배다리

1789 ·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한 부교 설계 · P.10
A4

수원 화성 거중기

1796 · 도르래로 성벽을 올리다 · P.12
A5

1800 정조의 죽음

한 시대가 닫히던 6월의 어느 밤 · P.14
05
A · 01 · 마재
마재 마을
경기도 광주 마재 마을 — 한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자리. 18세기 중엽의 어느 한 풍경.
06
A · 01 · 1762 · 출생

한강이 흐르는 마을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재 마을의 한 한옥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호가 같았던 그 마을의 강 이름이 자녀의 평생에 함께했습니다.

마재(馬峴)는 한강 본류가 한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대입니다. 마을 앞으로 한강이 천천히 흐르고, 그 강을 따라 한양으로, 또는 강원도 산간으로 사람과 짐이 자주 오갔습니다. 정약용이 평생 이 강을 잊지 않았던 것은 그 흐름이 곧 바깥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낸 학자 출신 관료였습니다. 어머니 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이었고, 그쪽 집안은 남인 학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위로 정약전·정약종·정약현 세 형이 있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같은 가족 안에서 운명이 갈리게 되는 그 형제들입니다.

어린 시절의 일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글에 가끔 등장하는 마재의 풍경 — 강변의 갈대, 봄에 물이 오르던 버드나무, 가을에 마을로 내려오던 안개 — 이 그가 평생 잊지 않은 한 가지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출생1762.06.16
마을광주 마재
아버지정재원
형제4남 2녀 중 막내
한강이 흐르는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의 7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07
A · 02 · 청년
청년 정약용
22세의 청년 정약용 — 한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에서 책을 펼쳐 든 어느 한낮.
08
A · 02 · 1783 · 정조와의 첫 만남

생원시 합격의 그날

22세 되던 1783년, 정약용은 생원시(소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날 창덕궁의 어느 자리에서 한 청년 학자가 정조와 처음으로 마주 보게 됩니다.

조선의 과거 제도는 두 단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차인 소과(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공부한 뒤 2차인 대과(문과)에 합격해야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28세인 1789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신하가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 관계 이상이었습니다. 정조는 자기보다 10살 어린 이 청년 학자를 자주 불러 글을 짓게 했고, 학문에 관해 길게 토론했습니다. 정약용은 자기 글에서 정조를 두고 "스승이자 친구"라 적은 적이 있는데, 군주에게 그런 표현을 쓴 신하는 조선 500년 동안에 거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을 알아본 매우 드문 짝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정약용은 광범위한 학문에 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학의 경전 해석, 천문과 역법, 의학과 농학,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양 과학 — 이른바 서학(西學)까지. 그 서학에 대한 관심이 1801년 신유박해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1789년의 그 청년은 그 일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생원시1783 (22세)
대과 급제1789 (28세)
군주정조
학파남인 · 서학
정약용이 정조를 두고 "스승이자 친구"라 부르던 시대가 18년 후의 강진 유배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09
A · 03 · 배다리
한강 배다리
1789년의 한강 배다리 — 수십 척의 배를 옆으로 묶어 강을 건너는 거대한 부교(浮橋). 정약용 28세의 첫 공학 작품.
10
A · 03 · 1789 · 주교사 설계

한강 위에 다리를 놓다

정조는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고, 매년 한 번씩 그곳에 행차하기로 결정합니다. 문제는 한강이었습니다.

한강에는 다리가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한양에서 한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거나, 임금의 행차 같은 큰 행사 때만 임시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건넜습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매년 천 명이 넘는 인원과 수백 마리의 말이 함께 움직이는 큰 행사였기 때문에, 안전하고 빠른 한강 도하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정조는 1789년 주교사(舟橋司)라는 임시 관청을 만들고, 28세의 정약용에게 배다리 설계를 맡깁니다. 정약용이 제출한 설계서가 〈주교지남(舟橋指南)〉입니다. 핵심 발상은 단순했습니다. 크고 튼튼한 배 30~40척을 옆으로 가지런히 묶고 그 위에 널판자를 깔아 길을 만든다. 그러나 단순함 안에 정교한 계산이 있었습니다 — 배 사이의 간격, 물 위의 흔들림을 줄이는 닻의 위치,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 때 이 배다리가 처음으로 정식 사용되었고, 그 후 약 10년 동안 매년 봄과 가을에 한 번씩 한강 위에 등장하는 거대한 부교가 되었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에 그 행차 풍경이 그림으로 남아 있어, 오늘 우리는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설계1789
주교지남
사용화성 행차 1795~
기록원행을묘정리의궤
한 청년이 도형으로 그어 둔 한 줄이 매년 봄 한강 위에서 다시 그려졌습니다.
11
A · 04 · 거중기
수원 화성 거중기
1796년의 수원 화성 공사 — 거중기(擧重機)로 큰 돌을 들어 올리는 장면. 한 사람의 도면이 한 도시의 성벽을 짓고 있었습니다.
12
A · 04 · 1796 · 화성 완공

도르래로 성벽을 짓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약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을 가능하게 한 한 도구가 거중기였습니다.

거중기(擧重機)는 정약용이 1792년 정조의 명을 받고 설계한 일종의 크레인입니다. 무거운 돌 한 덩이를 들어 올리려면 보통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힘을 써야 했습니다. 거중기는 도르래 여덟 개를 위·아래로 결합해 한 사람이 줄을 잡아당기는 힘만으로 무게의 약 1/4까지 줄여 주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BC 3세기에 시러큐스 항구에서 시연한 합성 도르래의 원리가, 2,000년 후 수원 화성 공사 현장에 거의 같은 모양으로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거중기 외에도 정약용은 화성 공사를 위해 녹로(轆轤, 수직 도르래)와 유형거(遊衡車, 수레형 운반 기구)를 함께 설계했습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이 도구들의 설계 도면이 정확하게 남아 있어, 1995년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될 때 이 의궤가 결정적 근거 자료가 되었습니다.

한국 토목사에서 화성 공사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동시대의 다른 큰 공사들이 보통 5~10년이 걸렸는데, 화성은 정확하게 2년 9개월 만에 끝났고, 비용도 처음 책정한 예산의 절반 정도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의 한가운데에 한 청년 학자가 그어 둔 한 도면이 있었습니다.

공사1794-1796
발명거중기·녹로·유형거
기록화성성역의궤
유산1995 유네스코
한 사람의 도면이 한 도시의 성벽을 만들었고, 그 성벽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13
A · 05 · 1800
정조의 빈 어수당
1800년 6월의 어느 밤 — 정조가 마지막까지 책을 읽었던 어수당의 빈 책상. 한 시대가 그 자리에서 끝나고 있었습니다.
14
A · 05 · 1800.06.28 · 정조 승하

한 시대가 닫히던 밤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의 일을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 짧게 한 줄로 적었습니다. "스승이자 친구를 잃었다."

정조의 죽음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가 즉위한 1776년부터 24년 동안 추진한 개혁 — 규장각·장용영·수원 화성 — 은 보수 노론 세력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직후 그의 모든 정책이 빠르게 뒤집힌 것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단순한 병사 이상의 무엇이 있었을 가능성을 거론합니다. 그러나 직접 증거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세기 후반 조선의 가장 야심찬 개혁기가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정조의 후계자는 11세의 어린 순조였고, 실권은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 벽파에게 넘어갔습니다. 정조의 신임받던 신하들은 일제히 내쳐졌고, 그 가운데에서도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남인 학파에는 곧 큰 비가 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 한 해 뒤인 1801년, 정약용 38세의 나이에 한 가족 전체에 닥친 비극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부의 이야기입니다.

정조 승하1800.06.28
즉위11세 순조
실권정순왕후 노론
정약용당시 38세
한 군주의 죽음과 한 사람의 인생이 어디까지 묶여 있을 수 있는지를 다음 부에서 보게 됩니다.
15
B
PART B · 5 STORIES · 신유박해

1801 한 가족의 한 해

정조가 죽은 다음 해, 노론 벽파는 천주교 박해를 명분으로 남인 학파 전체에 대한 정치적 숙청을 시작합니다. 한 해 동안 약 300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의 한 가족 안에서도 운명이 갈렸습니다 — 형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한 해, 한 가족, 세 가지 죄.
16 · CHAPTER OPENER
16
PART B · 다섯 장면

1801년 봄에서 겨울까지

신유박해의 시작에서 강진 도착까지, 한 해의 다섯 장면을 차례로 보여 드립니다.

B1

1801 신유박해의 시작

정월 정순왕후의 사학 엄금령 · P.18
B2

형 정약종의 순교

2월 26일 · 서소문 형장 ·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자 · P.20
B3

형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서남쪽 끝 섬 · 〈자산어보〉의 탄생 · P.22
B4

강진 도착

11월 22일 · 한 학자의 첫 겨울 · P.24
B5

한 해의 점잖은 이름

신유박해 · 황사영 백서 · 그 다음 100년 · P.26
17
B · 01 · 박해
1801 신유박해
1801년 정월 — 한밤중의 한양에서 횃불을 든 관군이 천주교 신자의 집을 두드리던 어느 날.
18
B · 01 · 1801 정월 · 사학 엄금

정순왕후의 한 줄

1801년 음력 정월 10일,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는 천주교 엄금령을 내립니다. 그날 한 해 동안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에 청나라 사신 일행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양 학문의 한 분과로 여겨져 남인 학파의 일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습니다. 정약용·정약전·정약종 형제도 이 시기에 천주교 책을 접합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어머니의 위패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일어나면서,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상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1801년 정순왕후의 사학(邪學) 엄금령이 내려지자, 한양과 지방 곳곳에서 동시에 검거가 시작됩니다. 약 300명이 처형되었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습니다. 이 박해의 정치적 본질은 사실 종교 탄압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조 시대의 개혁을 이끌었던 남인 학파를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노론 벽파의 정치 숙청이기도 했습니다.

정약용 가족은 이 박해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형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고, 형 정약전과 정약용도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1801년 정월 19일, 세 형제와 매형 이승훈(한국 천주교 최초의 영세 신자)이 같은 날 체포됩니다.

시기1801 정월
실권정순왕후 김씨
처형약 300명
체포정월 19일 형제 모두
한 가족 세 형제와 매형이 같은 날 끌려간 그 정월의 어느 새벽이 한 해의 출발이었습니다.
19
B · 02 · 정약종
정약종 순교
정약종 (1760-1801) —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회장.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20
B · 02 · 1801.02.26 · 서소문 형장

한 형의 마지막 한 마디

정약종은 정약용보다 두 살 위의 셋째 형이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한국어 교리서 〈주교요지〉의 저자였고, 1801년 2월 26일 41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정약종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깊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1791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신자가 되었고, 1799년경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 회장 격인 명도회(明道會) 회장에 임명됩니다. 그가 직접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쓴 〈주교요지(主敎要旨)〉는 한국 천주교의 첫 한국어 교리서로, 평민·여성·아이도 읽을 수 있게 한 책이었습니다.

정약종은 체포된 후 의금부에서의 신문 과정에서 자기 신앙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 정약종 전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임금보다 더 높은 분이 계시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답했고, 이 한 줄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서도 그는 흰 옷에 십자가를 안고 침착했다고 합니다.

정약종의 처형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 정철상(1796 처형) ·정하상(1839 처형) 모두 후에 같은 자리에서 순교했고, 그의 아내 유소사도 1839년 순교했습니다. 한 가족 안에서 4명이 순교한 그 가족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 시성식을 거행했을 때 모두 함께 성인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막내 동생 정약용에게 그 형의 죽음은 평생의 짐이 됩니다.

생몰1760-1801
주교요지 (한국어 교리서)
처형1801.02.26 서소문
시성1984 요한 바오로 2세
한 형이 마지막 순간에 던진 한 마디가, 막내 동생의 평생의 짐이 되었습니다.
21
B · 03 · 흑산도
흑산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 한반도 서남쪽 끝의 외딴 섬. 정약전이 1801년부터 1816년 사망 때까지 머문 자리.
22
B · 03 · 1801-1816 · 흑산도 16년

바닷가의 물고기를 적다

정약전은 정약용보다 네 살 위의 형이었습니다. 1801년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옮겨가 16년을 그 섬에서 보내고, 1816년 그 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흑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의 서남쪽 끝에 있는 섬입니다. 오늘날에도 목포에서 배로 약 2시간이 걸리고, 19세기 초의 항해 조건에서는 사실상 한반도의 가장 먼 자리였습니다. 조선 정부가 그곳을 유배지로 자주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 들어간 사람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정약전은 그 섬에서 16년을 보내며 자기를 '천주교를 잘못 받아들인 학자'로 자책하기보다, 새로운 학문 한 권을 완성합니다. 흑산도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그 바다의 물고기와 해양 생물 226종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 책 〈자산어보(玆山魚譜)〉가 그것입니다. 한반도 최초의 본격적인 어류 도감이자, 한국 해양생물학의 시조 격인 책입니다. 그가 책의 머리말에 적어 둔 한 줄이 인상적입니다 — "내가 흑산에 있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쓴다."

2021년 영화 〈자산어보〉는 이 책의 집필 과정을 영상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흑백 화면으로 정약전과 흑산도 어부 장창대의 우정을 그려, 잊히던 한 책을 다시 한 번 사람들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정약전은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형의 죽음을 동생 정약용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한참 후에야 알게 됩니다.

유배1801-1816
자산어보 226종
의의한국 어류 도감 시조
영화자산어보 (2021)
한 섬에서 한 사람이 평생을 들여 쓴 한 권의 책이 200년 후에 다시 펼쳐졌습니다.
23
B · 04 · 강진
강진 도착
1801년 음력 11월 22일 — 39세의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의 어느 길에 첫발을 내딛던 겨울날.
24
B · 04 · 1801.11.22 · 강진 도착

39세의 겨울

정약용은 1801년 음력 2월 27일 처음 체포되어 포항·경주 등지로 옮겨졌고, 그해 가을에 다시 한양으로 끌려와 추가 신문을 받은 뒤, 11월 22일 강진에 도착합니다. 39세의 한 학자의 18년이 그날 시작되었습니다.

전라도 강진은 한반도 남쪽 끝 가까이의 작은 군현이었습니다. 한양에서 천 리(약 400km) 떨어져 있었고, 18세기 말 인구는 약 3만 명. 정약용이 도착했을 때 그는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첫 8년을 보낸 곳은 강진 읍내의 어느 주막이었습니다. 동문 밖 머물 주막의 주모(이름이 전해지지 않습니다)가 그를 거두어 주어 작은 골방 한 칸을 내주었습니다. 그 방을 정약용은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었습니다. "생각은 맑게, 외모는 가지런히,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思宜澹·貌宜莊·言宜訒·動宜重)"라는 네 가지를 마땅히 지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칸 골방의 이름이 그 사람의 18년의 학문의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8년 동안 그는 주모의 딸 두 명에게 글을 가르쳤고,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 5~6명을 모아 작은 서당을 열었습니다. 죄인의 거처가 어느 새 마을의 학당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학당이 결국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도착1801.11.22
나이39세
첫 거처주막의 사의재
기간주막 8년 (1801-1808)
한 칸 골방을 자기 이름으로 부른 한 사람의 18년이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5
B · 05 · 1801
신유박해 정점
1801년 신유박해는 단순한 종교 박해가 아니라 정조 개혁기 남인 학파에 대한 노론 벽파의 정치 숙청이기도 했습니다.
26
B · 05 · 한 해를 부르는 한 단어

신유박해라는 이름

한 해의 일들을 한 단어로 부르면 어떤 것을 잃게 될까. 1801년 신유박해는 단순한 종교 박해 사건 이상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1801년의 박해는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그 후 100년 가까이 이어진 한국 천주교 박해의 첫 큰 물결이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까지 — 약 65년 동안 한국 천주교는 거의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고, 모두 합쳐 약 1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가운데 1801년이 특별한 것은, 이 박해가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사건과 맞물리며 정치적·외교적 사건으로 확산된 데 있습니다. 황사영은 정약현(정약용의 큰형)의 사위로, 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의 토굴에 숨었다가 청나라 북경 주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비단에 적어 보내려 합니다. 편지에는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에 종교 자유를 강제해 달라"는 한 줄이 담겨 있었습니다. 1801년 9월 이 편지가 발각되면서 박해는 더욱 격렬해졌고, 정약용 가족도 추가 신문을 받게 됩니다.

한 시대의 큰 사건들은 보통 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신유박해'라는 네 글자 안에 정약종의 죽음, 정약전의 흑산도, 정약용의 강진, 그리고 그해 처형된 약 300명의 이름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한 단어 뒤의 사람들을 한 명씩 다시 부르는 일이, 어쩌면 잡지 한 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박해1801·1839·1846·1866
총 순교약 1만 명
시성1984 요한 바오로 2세
관련황사영 백서
한 단어 뒤의 한 명씩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보는 일이 어쩌면 역사 잡지의 가장 작은 일입니다.
27
C
PART C · 5 STORIES · 강진 18년

다산초당의 책상

1801년 11월 강진의 어느 주막 골방에서 시작된 18년은 결국 한 사람이 자기 일생의 가장 긴 시간을 학문에 들이게 합니다.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를 비롯한 약 500권의 책이 그 책상 위에서 쓰였고, 옆에는 백련사의 혜장 스님이 자주 와서 차를 함께 마셨습니다.

유배의 시간이 한 사람의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28 · CHAPTER OPENER
28
PART C · 다섯 장면

강진 18년의 다섯 자리

주막의 골방에서 다산초당의 책상까지, 한 학자의 18년의 다섯 자리를 차례로 보여 드립니다.

C1

머물 주막의 사의재 8년

1801-1808 · 주막 골방의 작은 학당 · P.30
C2

다산초당 10년

1808-1818 · 윤단의 별장에 자리 잡다 · P.32
C3

〈목민심서〉의 책상

500권의 책이 쓰인 자리 · P.34
C4

백련사 혜장 스님

유학자와 선승의 차 한 잔 · P.36
C5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학연·학유에게 보낸 50여 통의 편지 · P.38
29
C · 01 · 사의재
머물 주막 사의재
강진 동문 밖 머물 주막의 사의재(四宜齋) — 한 칸 골방에서 시작된 8년의 학문.
30
C · 01 · 1801-1808 · 주막의 8년

한 칸 골방의 학당

강진 동문 밖의 머물 주막은 그저 한 칸 작은 주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막의 골방 한 칸이 18년의 학문의 첫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막은 18~19세기 조선의 길가에 흔히 있던 작은 음식점 겸 여관이었습니다. 길을 지나는 상인이나 양반에게 막걸리와 국밥을 팔고, 운이 좋으면 작은 방 한 칸을 내주어 하룻밤 자게 했습니다. 정약용이 1801년 11월 강진에 도착했을 때, 동문 밖의 한 주막을 운영하던 주모(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가 그에게 작은 골방 한 칸을 내주었습니다.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은 큰 위험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있었고, 관아에 신고당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주모는 정약용을 8년 동안 그 골방에 머물게 했습니다. 정약용 자기 글에 그 주모를 두고 "내 평생의 은인 중 한 사람"이라 적은 적이 있습니다. 주모의 두 딸에게 그가 글을 가르친 것이 자기가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01년부터 1808년까지의 그 8년 동안 그는 주모의 딸들 외에도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 5~6명을 모아 작은 서당을 운영합니다. 그 무렵 쓴 책의 일부 — 〈주역사전〉·〈상례사전〉 등 — 가 후에 그의 학문의 기초가 되어 다산초당의 더 큰 책들로 이어집니다. 한 칸 골방이 한 사람의 학문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기간1801-1808 (8년)
장소강진 동문 밖 주막
은인이름 모를 주모
학생주모의 두 딸 + 5~6명
한 사람의 학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한 칸 골방이 알려 주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31
C · 02 · 다산초당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 —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정약용이 머물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들을 쓴 자리.
32
C · 02 · 1808-1818 · 다산초당 10년

초당의 10년

1808년 봄, 정약용은 강진 만덕산 기슭의 작은 별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 자리의 이름이 다산초당이었습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윤단(尹慱)이라는 강진의 한 양반이 자기 휴식처로 쓰던 별장이었습니다. 윤단은 정약용의 외갓집인 윤선도 가문의 먼 친척이기도 했습니다. 1808년 봄, 윤단은 자기의 별장을 정약용에게 내주었습니다. 정약용 49세, 강진 유배 8년 차의 일이었습니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의 차나무 숲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리였고, 정약용은 곧 그 자리의 이름을 자기 호로 삼았습니다. 그가 평생 사용한 호 〈다산〉이 바로 그 산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이름 없던 한 학자가 강진의 한 작은 산을 자기 평생의 이름으로 삼은 셈입니다.

1808년부터 1818년 해배 때까지의 10년이 정약용 학문의 황금기였습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경세유표(經世遺表, 1817)〉·〈흠흠신서(欽欽新書, 1819)〉의 이른바 '1표 2서'가 모두 이 10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그 외에도 시·산문·경전 주석을 합쳐 총 약 500권의 책이 이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한 자리에서 평생의 가장 긴 책상을 차렸던 자리 — 그 자리가 다산초당이었습니다.

기간1808-1818 (10년)
장소강진 만덕산
호의 유래다산(茶山)
집필약 500권
한 사람의 호가 한 산의 이름이 되고, 그 산이 한 사람의 평생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33
C · 03 · 목민심서
목민심서 책상
정약용의 책상 위 —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권을 18년 동안 쓰던 자리. 벼루와 붓, 한지에 적힌 한자가 흩어져 있는 풍경.
34
C · 03 · 1818 · 〈목민심서〉 완성

백성을 다스리는 한 권

〈목민심서(牧民心書)〉는 한국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책 중 하나입니다. 그 책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 제목 한 줄은 들어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고, '심서(心書)'는 '마음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책 제목을 풀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의 마음에 두어야 할 책'이라는 뜻이 됩니다. 1818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완성된 이 책은 12편 72조로 구성된, 조선 시대 지방 수령(목사·군수·현감)을 위한 일종의 행정 매뉴얼입니다.

책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부임할 때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임지 도착 첫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금은 어떻게 거둬야 하는지, 가난한 백성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부패한 아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하는지까지. "청렴(淸廉)은 목민관의 본분이며, 모든 선의 원천이며, 덕의 뿌리이다(廉者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라는 한 줄이 책의 핵심을 가장 짧게 보여 줍니다.

정약용이 이 책을 쓴 시기는 의미심장합니다. 자기 자신이 정조 시대에 지방관으로서의 짧은 경험을 가졌고, 형이 처형되었으며, 자신은 18년의 유배 중이었습니다.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권력의 가장 바깥으로 떨어진 한 사람이 다시 한 번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관한 책을 쓴 셈입니다. 그래서 〈목민심서〉는 단순한 행정 매뉴얼이 아니라,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한 사람이 권력에 보내는 한 통의 긴 편지로도 읽힙니다.

제목牧民心書
완성1818
구성12편 72조
대상지방 수령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 사람이 권력에 보낸 한 통의 긴 편지입니다.
35
C · 04 · 혜장
혜장 스님과의 차 한 잔
백련사 마루의 어느 한낮 — 유학자 정약용과 선승 혜장이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있는 풍경.
36
C · 04 · 1805 · 백련사의 만남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백련사(白蓮寺)는 다산초당에서 산길로 걸어서 약 1km 떨어진 작은 절이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 혜장(惠藏, 1772-1811)이 정약용보다 10살 어린 한 선승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05년 봄 강진의 어느 길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혜장은 그때 33세, 정약용은 43세였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첫날부터 깊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주역〉에 관한 토론으로 시작된 대화가 밤을 새워 이어졌고, 그날 이후 약 6년 동안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혜장은 그 시대 조선 불교계에서 가장 학문이 깊은 선승 중 한 명이었습니다. 〈주역〉뿐 아니라 노장(老莊) 철학과 한문 시(漢詩)에도 능했고, 정약용에게 강진의 차(茶) 문화를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유학자가 평생을 보낸 자리에서 한 선승의 가르침으로 차 한 잔의 시간을 알게 된 일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매우 드문 풍경입니다.

혜장은 1811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정약용은 그 친구를 위해 매우 슬픈 묘지명 한 편을 적었고, 그 글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6년의 우정이 한 학자의 강진 18년 가운데 가장 따뜻한 자리였다는 사실을 그 묘지명의 한 줄이 보여 줍니다 — "혜장은 나의 벗이자 스승이었다." 형 정약종을 두고 한 말 〈벗과 스승〉이 다른 한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적힌 것입니다.

친구혜장 스님
생몰1772-1811
만남1805 (43세 vs 33세)
우정약 6년
유학자가 선승에게 처음 배운 것은 차 한 잔의 시간이었습니다.
37
C · 05 · 편지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지 위의 한자 한 줄 — 강진에서 한양의 두 아들에게 보낸 50여 통의 편지 중 한 장.
38
C · 05 · 1810년대 · 가족 간 서신

아버지의 한 줄

정약용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입니다. 강진 18년 동안 그가 한양의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약 50통 이상 남아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양합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가난한 시대에 어떻게 자기를 지켜야 하는지. 한 아버지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한 줄씩 적어 둔 가르침입니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편지 중 한 통은 1810년경 큰 아들 학연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자제일수록 더욱더 책을 읽어야 한다(寒素之家 子弟尤宜讀書).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책이 아니면 없다." 자기가 죄인의 자식이 되어 한양에서 벼슬길이 막힌 두 아들에게 보낸 한 줄입니다. 권력의 가장 바깥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권력 너머의 길을 보여 주려는 한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두 아들에게 〈가종을 넘기는 일〉에 관한 한 줄을 적었습니다. 죄인의 자식들도 자기 자손을 둘 수 있고, 그 자손에게 한 가지 가종(家種)을 넘겨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두 아들에게 넘기고 싶었던 가종은 두 가지였습니다 — 책 읽는 습관,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마음. 그 두 가지가 18년의 강진의 한 아버지가 한양의 두 아들에게 마지막까지 적어 두려 했던 한 줄이었습니다.

아들학연·학유
편지약 50통
시기1810년대 강진
남긴 가종책 읽는 습관 · 측은지심
한 아버지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한 줄씩 적어 둔 가르침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읽힙니다.
39
D
PART D · 5 STORIES · 후세

잠들었다 깨어나는

1818년 9월 14일 정약용은 18년 만에 강진에서 풀려납니다. 마재로 돌아온 후 다시 18년을 살다 1836년 같은 마을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책들은 약 10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깨어남이 오늘의 〈목민심서〉까지 이어집니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이 다시 시작되는 일이 있습니다.
40 · CHAPTER OPENER
40
PART D · 다섯 이야기

200년의 여정

1818년의 해배 귀향에서 오늘의 〈목민심서〉 한 권까지의 200년의 다섯 자리.

D1

1818 해배 귀향

9월 14일 · 18년 만의 마재 · P.42
D2

여유당의 말년 18년

1818-1836 · 〈자찬묘지명〉을 짓는 사람 · P.44
D3

일제강점기 다산학 부활

정인보·안재홍 · 1934 〈여유당전서〉 · P.46
D4

오늘의 다산

강진 다산초당 · 수원 화성 유네스코 · P.48
D5

"시대를 앓다"

정약용의 한 줄로 닫는 글 · P.50
41
D · 01 · 해배
1818 해배 귀향
1818년 가을 — 18년 만에 강진에서 마재로 돌아오는 56세의 정약용. 한 봇짐의 책과 한 사람의 18년이 길 위에 있었습니다.
42
D · 01 · 1818.09.14 · 해배

18년 만의 마재

1818년 음력 8월 그믐, 정약용은 강진을 떠납니다. 9월 14일 마재의 옛 집 마당에 들어선 그날 그는 56세였습니다. 1801년 39세에 떠난 자리로 18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해배(解配)는 유배에서 풀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정약용의 해배는 1818년 8월에 결정되었고, 9월에 실제 귀향이 이루어졌습니다. 1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떠날 때 강진의 다산초당에는 약 18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황상(黃裳, 1788-1870)을 비롯한 강진 출신의 한 무리의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습니다.

마재로 돌아온 그날을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 짧게 적었습니다. "고향에 들어서니 형들이 모두 죽고 없었다(歸鄕兄弟皆亡). 어머님도 떠난 지 오래였다." 18년 사이에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정약종은 서소문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 윤씨도 1801년 박해 직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큰형 정약현뿐이었습니다.

마재의 한강은 그가 떠날 때와 거의 같은 모양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마을의 사람들은 거의 다 바뀌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18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의 한 줄짜리 묘지명이 보여 줍니다.

해배1818.08
귀향1818.09.14
나이56세
강진18년
한 사람이 18년 만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를 묻는 일이 있습니다.
43
D · 02 · 여유당
여유당 말년
마재의 여유당(與猶堂) — 정약용이 1818년부터 1836년까지 살며 평생의 책들을 정리한 자리.
44
D · 02 · 1818-1836 · 마지막 18년

여유당의 또 다른 18년

강진의 18년이 끝나고 정약용에게는 한 번 더의 18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재의 여유당(與猶堂)에서 보낸 1818-1836의 마지막 18년입니다.

여유당의 '여유(與猶)'는 〈노자〉 15장에서 따온 글자입니다.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건너듯이 조심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猶兮若畏四鄰)"는 한 줄에서 두 글자를 골라 자기 집의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18년의 유배에서 돌아온 한 사람이 자기 마지막 자리를 어떻게 부르고 싶었는지를 그 두 글자가 보여 줍니다.

여유당의 18년 동안 정약용은 강진에서 미완성으로 둔 책들을 마무리하고, 새로 쓴 글들을 모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썼습니다. 〈흠흠신서〉가 1819년에 마무리되었고, 자기 평생을 한 글로 정리한 〈자찬묘지명〉을 1822년 60세에 직접 썼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자기 손으로 미리 적어 둔 것입니다.

그 묘지명에서 그는 평생을 단 몇 줄로 정리했습니다. "정조 임금을 만나 18년을 함께했고, 강진에서 18년을 보냈고, 마재에서 다시 18년을 살다 갔다." 75년의 인생을 18년·18년·18년의 세 묶음으로 적어 둔 셈입니다. 1836년 음력 2월 22일, 정약용은 마재의 여유당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의 일은 자기 묘지명에 미리 적혀 있었습니다.

여유당
기간1818-1836 (18년)
자찬묘지명1822 (60세)
서거1836.02.22 (75세)
자기 평생을 18년·18년·18년의 세 묶음으로 적어 둔 한 사람의 75년이 그곳에서 닫혔습니다.
45
D · 03 · 부활
일제강점기 다산학 부활
1934년의 어느 책상 — 일제강점기 한 학자가 〈여유당전서〉를 펼치며 잊힌 한 사람을 다시 살려 내려 하던 시기.
46
D · 03 · 1934 · 〈여유당전서〉

100년 만의 다시 펼침

정약용이 1836년에 죽은 후 그의 책들은 약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를 다시 깨워 낸 사람은 일제강점기의 한 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였습니다.

정약용 사후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한 차례 큰 격동에 들어갑니다. 동학농민혁명·갑오개혁·청일전쟁·러일전쟁·1905 을사늑약·1910 한일강제병합. 약 75년 사이에 한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진 그 시기에, 정약용의 책들은 마재의 다락방과 강진의 친척집에서 거의 잊혀 갔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강점기의 한 무리의 학자들이 한국의 옛 학문을 다시 살피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조선학(朝鮮學)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의 중심에 있던 학자가 정인보였고, 그가 1934년에 신조선사를 통해 출간한 책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76책이었습니다. 정약용의 평생 저술을 처음으로 한꺼번에 모아 정식 출판한 것입니다. 잠들었던 한 사람이 100년 만에 처음으로 한 권의 모음으로 다시 한 번 펼쳐진 것입니다.

정인보는 그 작업을 두고 한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산은 우리 민족이 가진 가장 풍부한 학문의 자원이다. 그를 다시 읽는 일이 곧 우리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우리 자신의 자원을 다시 찾으려 한 한 학자의 한 줄이, 잊힌 한 사람을 100년 만에 다시 한 번 살려 냈습니다.

학자정인보 (1893-1950)
출판1934 신조선사
여유당전서 76책
운동조선학 운동
한 사람이 죽고 100년이 지난 뒤, 다른 한 사람의 손에서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시작되었습니다.
47
D · 04 · 오늘
오늘의 다산초당
2026년의 다산초당 — 한 고등학생이 마룻바닥에 앉아 〈목민심서〉 보급판을 펼치고 있습니다.
48
D · 04 · 21세기의 다산

오늘의 한 권

200년이 지난 지금, 정약용은 우리 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우리 일상의 일곱 자리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진 다산초당입니다. 정약용이 살던 그 자리는 1956년 한국전쟁 직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매년 약 20만 명이 방문하는 강진의 가장 중요한 명소이고, 그가 평생 차를 마시던 〈정석(丁石)〉이라는 바위 글씨도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수원 화성입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고, 그 등재의 결정적 근거가 〈화성성역의궤〉에 남은 정약용의 거중기 도면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목민심서〉의 오늘의 역할입니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평생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 알려진 책 — 이 일화는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지만 — 이고, 한국에서는 매년 신임 공무원 교육 자료로 일부 발췌가 쓰입니다. 네 번째는 남양주 마재의 다산 유적지입니다. 1986년부터 정비가 시작되어 정약용 묘소·여유당·다산 기념관 등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학문의 다산학입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다산학(茶山學)〉이라는 한 분과가 정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산학술재단이 매년 학술지를 발간하고, 약 100명 이상의 학자가 정약용 한 사람만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영화·드라마·소설에서의 등장입니다. 일곱 번째는 어쩌면 가장 큰 자리 — 그의 한 줄 "청렴은 목민의 본분이며 모든 선의 원천이며 덕의 뿌리이다"가 21세기 한국의 거의 모든 공직자 윤리 강령의 첫 줄에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산초당강진 (연 20만 명)
화성1996 유네스코
유적지남양주 마재
다산학학자 약 100명
우리 동네 어디에서 한 사람의 한 줄이 작동하는 자리를 한 번 같이 찾아봐 주세요.
49
D · 05 · 한 줄
마재의 한강
2026년 새벽의 마재 한강가 — 200년 전 한 사람이 평생 잊지 않은 그 강이 같은 자리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50
D · 05 · 닫는 자리 · 한 줄

"시대를 앓다"

정약용이 평생을 한 줄로 정리한다면 어떤 한 줄일까. 자기 묘지명에서 자기를 두고 그가 직접 적어 둔 한 줄이 있습니다.

〈자찬묘지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약용은 자기 평생을 두고 한 글자씩 적어 갑니다. "내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군주의 신하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인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학자였다." 그러다 마지막에 한 줄을 적습니다. "내가 한 일은, 시대를 앓는 일이었다(疾於時)."

'질어시(疾於時)' — 시대를 앓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를 그저 살기만 하지 않고, 그 시대의 병을 자기 몸으로 같이 앓는다는 뜻입니다. 정약용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조 시대의 개혁이 절반에서 멈춘 것을 같이 앓았고, 1801년 가족의 비극을 같이 앓았으며, 강진의 18년 동안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병을 같이 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앓음이 결국 500권의 책으로 흘러나왔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한 사람의 그 한 줄이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해 봅니다. 시대를 앓는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앓음이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옮겨질 수 있는지. 200년 전 한 사람이 한강가의 한 마을에서 시작해 강진의 18년을 거쳐 마재의 마지막 18년까지를 그 한 줄로 닫았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에게 던지는 한 가지 작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줄疾於時 (질어시)
출처자찬묘지명 (1822)
시대를 앓다
평생500권의 책
한 사람이 한 줄로 자기 평생을 닫았을 때, 우리는 그 한 줄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요.
51
APPENDIX · 시대 연표

정약용의 200년

시대 연표

1762.06.16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출생 · 정재원의 4남

1783 22세 · 생원시 합격 · 정조와의 첫 만남

1789 28세 · 대과 급제 · 한강 주교(배다리) 설계

1796 35세 · 수원 화성 거중기·녹로·유형거 설계 / 화성 완공

1800.06.28 정조 승하 (49세) · 어린 순조 즉위

1801.02.26 형 정약종 서소문 처형 / 정약용 강진 유배 결정

1801.11.22 39세 · 강진 도착 · 사의재 8년 시작

1808 47세 · 다산초당 이주 · 다산 호 사용 시작

1816 형 정약전 흑산도에서 사망

1818.09.14 56세 · 18년 만의 해배 귀향

1822 60세 · 〈자찬묘지명〉 자작

1836.02.22 75세 · 마재 여유당에서 서거

1934 정인보 〈여유당전서〉 76책 출간 · 다산학 부활

1995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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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 핵심 저작 일곱

평생의 일곱 권

핵심 저작 도해

1. 〈주교지남(舟橋指南)〉 1789 — 한강 배다리 설계서. 28세 청년의 첫 공학서.

2. 〈마과회통(麻科會通)〉 1798 — 홍역 치료서. 정조의 명으로 작성된 의학 책.

3. 〈경세유표(經世遺表)〉 1817 — 국가 제도 개혁안. '경세'는 '세상을 경영한다'는 뜻.

4.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 — 지방 수령의 행정 지침서. 12편 72조. 가장 자주 인용되는 한 권.

5. 〈흠흠신서(欽欽新書)〉 1819 — 형사 사건 처리 매뉴얼. '흠흠'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한다'는 뜻.

6.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1822 — 자기가 자기 묘지명을 직접 쓴 글. 평생을 18년·18년·18년으로 정리.

7.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934 출간 — 평생 저술을 모은 76책. 정인보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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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PHON · 닫는 글

한 사람을 다 따라간 후

EDITORIAL

Editor — Luna Whale
Curator — 손창범 (루나웨일 아트랩 원장)
2026년 7월 1일 1쇄

본 호의 4부 + 25 장면

A 사람 5장면 · B 신유박해 5장면 · C 강진 18년 5장면 · D 후세 5장면 · 부록(연표·핵심 저작). 한 사람이 흔든 시대 전체를 한 권에 정리하는 잡지.

주요 참고

정약용 〈자찬묘지명〉 1822 · 〈여유당전서〉 정인보 편 1934 · 박석무 〈정약용 평전〉 2014 · 다산학술재단 〈다산학〉 학술지 · 강진 다산기념관 자료

관련 자료

강진 다산초당 · 남양주 마재 다산유적지 · 수원 화성 (유네스코 1996) · 〈자산어보〉 영화 (이준익, 2021) · 다산학술재단 jasan.or.kr

NEXT ISSUE · Vol.02 예고
9년의 제주에서 한 점

1840년 추사 김정희가 9년의 제주 유배에서 그린 한 점의 그림 〈세한도〉. 한 사람이 한 그림으로 한 시대를 닫는 또 한 번의 이야기.

LUNA WHALE · HISTORY ISSUE VOL.01 · JUL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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